오디언스 AUDIENCE (청중) - 모순으로 아파하고 모순으로 위로받다

오디언스 AUDIENCE (청중) - 모순으로 아파하고 모순으로 위로받다

  • 조원석
  • 조회수 426 / 2008.09.10

오디언스 AUDIENCE (청중) - 모순으로 아파하고 모순으로 위로받다


바츨라프 하벨 作(체코) ‘청중’은 동구권 부조리극 중 하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작품이 ‘동구권’에 속하고, ‘부조리극’이라는 것은 알자.

 ‘동구권’이라는 단어에서는 동구 공산주의라는 말이 연상되고, 공산주의라는 말에서는 전체주의라는 말이 연상된다. 이 전체주의를 ‘청중’에서는 전통과 습관이 지배하는 양조장으로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양조장의 총책임자로 나오는 슬라덱(이경준)은 전체주의의 대변자다. 그리고 슬라덱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바넥(전중용)은 전체주의를 부정하는 개인주의의 대변자다. 그런데 이 극은 부조리극이다. 부조리극의 특징 중의 하나가 모순, 비논리이다. 그래서 슬라덱도 모순이 있고, 바넥도 모순이 있고, 이 둘이 모여 또 다른 모순을 보여준다. 사실 모순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보이고,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고, 어제 한 행동과 오늘 한 행동이 다른 사람이야 흔히 볼 수 있지 않은가? 가까운 곳에서 찾는 다면 바로 나 자신도 그러하다. 이러한 모순을 누가 감히 비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모순이 무지나 망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라면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강요된 모순은 강요를 받은 사람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다. 고통은 자신 스스로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데서 나온다. 그리고 동병상련. 모순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에 대한 연민은 같은 이유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다름 아니다. 연민은 이처럼 고통을 공유하는 데서 나온다. 이 극에서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이 슬라덱과 바넥만은 아니다. 이 극을 보고 있는, 이 두 배우의 고통을 듣고 있는 청중 역시 고통을 공유하게 된다.



슬라덱의 모순

 맥주 양조장의 총책임자인 슬라덱은 바넥이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이미 술에 취해 책상에 엎드려 있다. 바넥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난 슬라덱은 바넥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극의 대화는 시작된다. (사건이라고 하지 않고 대화라고 한 까닭은 말 그대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역설이 되는 데, 대화와 심리변화 외에는 별 다른 변화가 없는 극 속에서 슬라덱은 바넥에게 "대화를 해야 돼요“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슬라덱이 전체주의의 대변자라는 것은 대사를 통해 드러나다.

 “난 모두 한 배를 탄 거라고 생각해요.”

 “난 늘 작은 집단이 기본이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맥주를 마시지 못하는 바넥에게 맥주를 권하며 하는 말 “ 여기선 다들 맥주를 마시니까. 글쎄, 뭐 전통이라고나 할까.......”에서 보듯이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하고, 바넥의 취향보다는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슬라덱의 또 다른 대사,

 “너무 친한 거 안 좋아요. 누구하고도 말이오. 난 여기 놈들 아무도 안 믿어요. 다들 개새끼니까. 정말 개새끼지.”에서 보듯이 한 배를 탄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이중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더 나아가 바넥에게 여배우 보달로바를 소개시켜달라며 내세우는 논리,


 “제기랄, 누굴 사귀든 그 여자 맘이잖아, 그건 절대적인 권리 아닌가.” 에서는 심지어 개인의 권리를 절대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보달로바를 향한 슬라덱 자신의 욕정 역시 절대적 권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전체주의자. 이것이 슬라덱의 모순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순을 강요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보달로바를 향한 욕정은 강요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전체주의. 이 전체주의의 구체적인 형상물이 등장하지 않는 인물, 안톤 마첵이다. 마첵은 슬라덱의 친구이고, 슬라덱 자신도 마첵을 좋은 친구라고 말한다. 여기서 ‘친구’라는 단어는 전체주의의 성격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슬라덱은 친구인 마첵에게 자신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으면 양조장 총책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된다고 말한다.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유지되는 관계가 친구인 것이다. 그래서 슬라덱도 바넥에게 친구가 될 것을 강요하고 있으며, 자신이 바넥의 친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창고지기라는 편한 자리를 바넥에게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슬라덱에 있어서 친구는 바로 ‘작은 집단’인 것이다. 큰 집단보다는 작은 집단이 중요한 사회가 전체주의이고, 전체주의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관료주의, 부패, 비리 등은 바로 이러한 작은 집단에서 나온다. 이제 바넥이 친구라는 것을 인정하자, 슬라덱은 바넥에게 두 가지를 요구 한다. 하나는 전체주의에 반대하다 좌천당한 바넥이 스스로를 고발하는 고발장을 쓰는 것과 또 하나는 여배우 보달로바를 소개시켜 달라는 것이다. 앞서 슬라덱의 두 가지 상반된 면을 얘기했다. 하나는 집단을 중시하는 모습과 하나는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모습. 이 두 모습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고발장을 쓸 것을 부탁하는 것은 집단을 중시하는 면이고, 보달로바를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은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면이다. 그리고 이것은 ‘친구’의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는 전체주의의 ‘친구’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간의 ‘친구’이다. 바넥이 고발장 쓰는 것을 거절하자 슬라덱은 바넥을 비난하면서도 고발장은 없던 일로 해도 좋지만 보달로바는 제발 소개시켜달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슬라덱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여자를 소개시켜 주는 ‘친구’였던 것이다. 보달로바를 향한 욕정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전체주의 속에서 상실된 개인의 권리를 향한 욕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슬라덱이 보달로바를 선택하리라는 것은 ‘친구가 있었던’ 과거 양조장에 대한 추억을 통해 암시된다.

 “5년만 일찍 왔어도 좋았을 텐데. 그땐 손발이 척척 맞았죠. 지금은, 흥.......어림없지. 정말 재미있었어요. 엿기름 공장에 있었는데, 마르야넥이란 친구하고, 지금은 거기 없어요.”


‘지금’은 없는 ‘친구’에 대한 추억. 보달로바를 선택한 지금, 슬라덱과 바넥은 친구가 될 수 있다. 맥주를 같이 기울 수 있는.

 


바넥의 모순

 맥주보다는 와인에 익숙한 극작가였던 바넥은 양조장의 노동자로 전락했다. 지금까지 정신적,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살아왔던 바넥은 물질적 빈곤에 힘들어 하고, 그 빈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슬라덱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권리와 전체주의 사이에서 자신의 권리를 끝내 놓지 않는다. 바넥은 슬라덱이 맥주를 권하지만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코후트와 어울리지 말라는 슬라덱의 요구에 원하는 사람과 사귈 수 있는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발장 쓰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서 개인주의자로서의 바넥을 엿볼 수 있다. 슬라덱의 요구 중에서 유일하게 거절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보달로바를 소개 시켜달라는 것이다. 거절하지 않는 이유는 보달로바 만큼은 권위를 내세운 요구가 아니라 개인의 욕망에 속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바넥은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슬라덱이 바넥에게 창고지기 자리를 제공하면서부터다. 창고지기를 원하는 바넥은 스스로 그 자리가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바넥은 양조장에서 처음에는 통 굴리기를 했다. 그리고 이어서 통 굴리기보다 편한 펌프질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양조장에서 가장 편한 창고지기가 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바넥은 자신이 편한 일을 하게 될 때마다 자신이 하던 힘든 일을 누군가는 대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개인의 일이 그 개인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전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바넥은 창고지기를 원하다.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창고지기가 될 수는 있지만 자신의 도덕적 신념에 위배되는 고발장은 쓸 수 없다. 이것이 바넥의 모순이다. 바넥의 모순은 위선의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모순을 강요한 것은 창고지기이다. 창고지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보편적이라니? 무슨 말인가? 적어도 이 극에서 창고지기는 누구나 원하는, 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것으로 나온다. 보달로바와는 다른 욕망이다. 슬라덱은 바넥에게 ‘보달로바와 잤느냐’고 묻는다. 바넥이 ‘아니’라고 대답하자 ‘병신’이라고 놀린다. 보달로바는 개인의 취향에 불과하다. 이것을 편의상 개인적 욕망이라고 한다면 창고지기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고, 그래서 창고지기는 개인에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창고지기를 선택함으로 인해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그 피해가 갈 수 밖에 없는 욕망. 이것을 편의상 보편적 욕망이라고 하자.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이었기 때문에 신념이 투철한 바넥도 쉽게 이를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슬라덱과 바넥의 동병상련

 슬라덱은 고발장을 포기하고 보달로바를 선택한다. 바넥은 창고지기를 포기하고 고발장 쓰는 것을 거절한다. 슬라덱은 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개인의 욕망을 선택한다. 바넥은 보편적인 욕망을 거절하고  개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선택한다. 이 둘은 정반대의 입장으로 만났지만 똑같이 괴롭다. 상대방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괴로움을 통해 상대방의 괴로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그 모순이 강요되었기 때문에 온다. 그래서 “괴로워하지 말아요.”라는 대사는 상대방에게만 해당하는 대사가 아니다. 어쩌면 이 대사는 강요된 모순을 지니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대사일 것이다. 가깝게는 이 극을 보고 있는 청중에게.

보충설명

작품명 : 오디언스
일시 : 2008년 8월 16일(토)-17일(일)
장소 : 떼아뜨르 추
극단/전이 작/바츨라프 하벨/ 연출 하일호/ 제작 김성철/ 예술감독 전규일/ 조연출 남정우/ 무대 유영봉/ 음악 김은정/ 의상 이명아/ 사진 임종선/ 배우 전중용 이경준

*사진제공/극단 전이

필자소개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주중에는 충북음성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학원 선생.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