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필요한 사실주의 공연, 로베·르네 집

2009. 4. 10. 14:16Review

상상력이 필요한 사실주의 공연
로베·르네 집

  • 조원석
  • 조회수 436 / 2008.09.10



(사과와 홍시)의 로베·르네 집은 소박하다. 소박하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무대도 있고, 조명도 있다. 새삼스럽게 연극 공연에서 무대와 조명이 있다고 감탄하다니? 이상하게 여길 만하다. 하지만 공연(로베·르네 집)이 열린 갤러리 바?, 로베르네집에 가면 새삼스러워했던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작은 공간. 좁은 공간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 곳에 가면 내가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커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작은 공간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무대와 관객석과 바. 무대와 관객석과 바는 물리적으로 붙어 있다. 손을 뻗으면 배우가 닿는 거리에 관객석이 있고, 관객이 앉은 의자는 바의 앞에 놓인 의자다. 의자가 모자라 일인용 돗자리가 놓여 있다. 그 돗자리 앞에 하얀 종이가 깔려 있다. 그 하얀 종이가 무대를 가리킨다. 그 하얀 종이 위에 멍석 대신에 요가 깔려 있다. 그 요 밖으로 소품이 놓여있는 곳을 빼면 사실 그 하얀 요가 무대 크기의 전부다. 이러한 장치들은 마치 소꿉 같다. 이러한 소꿉을 가지고 두 배우가 연극 놀이를 한다. 소꿉질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모래로 밥을 짓고, 풀을 뜯어 반찬을 만들고, 퇴근하는 아빠를 흉내 내고, 요리를 하는 엄마를 흉내 내는 짓을 한 번쯤은 했거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빠인 척, 엄마인 척 하는 연기를 리허설 없이도 훌륭하게 해냈던 명배우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이 명배우들은 보수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 관객이 없어도 그들의 연기혼을 불살랐다. 어렸을 때 미니카를 몰다가 책상 위에서 추락한 적이 있을 것이고, 아픈 인형 다리를 고치려다가 부러뜨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아파하고,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연기가 무엇인지 모를 나이였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연기가 아니라 상상이었다. 연기에는 관객이 필요하지만 상상에는 관객이 필요 없다. 관객이 없어도 즐거운 것이 상상이다. 관객을 속이기 위한 아빠인 척, 엄마인 척이 아니라, 상상하는 그 순간은 진짜 아빠였고, 진짜 엄마였다. 상상은 상상에 그치지 않는다. 상상은 그 자체가 힘이다. 현실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힘이다. 임신이 아닌데도 배가 불러오는 상상임신이나, 잘린 다리의 통증을 느끼는 환상지통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갖는 근심, 걱정, 희망, 꿈들도 상상의 결과들이다. 이러한 근심, 걱정, 희망, 꿈들이 또 다른 결과를 생성하는 데, 이것이 현실이다. 결국 현실은 상상의 결과다. 현실이 고정되어 있지 않는 것도 상상의 특성 때문이다.





 상상은 있는 그대로를 상상하지 않는다. 물병을 들고서 물이 있었으면 하고 상상하지는 않는다. 잔소리를 하더라도 부모가 있었으면 하고 상상하는 아이는 고아일 것이다. 상상이라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은 현실이다. 그리고 상상이 날아가 맞혀야 할 과녁도 현실이다. 그러나 이 두 현실은 서로 다르다. 변화된 현실은 또 다시 상상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변한다. 반면에 연기는 있는 그대로를 상상한다. 물을 마시면서 물을 마시는 장면을 상상해야 하고, 부모가 없는 고아이면 부모가 없는 고아의 심정을 상상해야 한다. 연기 역시 상상의 결과다. 상상의 결과지만 현실로 나아가지 않고 상상에서 멈춘다. 연기가 상상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실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엄마 역을 맡은 배우는 엄마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역을 맡은 배우를 상상해야 한다. 말을 하는 엄마가 아니라 대사를 하는 엄마를 상상해야 한다. ‘대사를 하는 엄마’는 배우다. 그래서 소꿉놀이에서의 엄마인 척은 말 그대로 엄마인 척하는 것이라면, 연극에서 엄마인 척은 배우가 배우인 척하는 것이다. 


 배우는 배우를 상상하고, 연극은 연극을 상상하는 것. 이것이 연극에 대한 사실주의다. 사실주의가 “현실생활를 자세하며 꾸밈없이 묘사하는 것”이라면 사실주의 연극은 현실을 모방하는 소꿉놀이다. ‘꾸밈없이 묘사’할 때 연기는 필요 없다. 연기는 ‘꾸밈 있는 묘사’다. 극이 극다울 때, 극다운 상상이 가미된 연극이 연극에 대한 사실주의다.




 

 실험극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을 실험한다는 말인가? 현실을? 아닐 것이다. 실험극은 연극을 실험한다는 말일 것이다. 새로운 시도의 연극. 또는 새로운 연극. 현실에 대한 상상은 현실을 변화 시키듯이 연극에 대한 상상은 연극을 변화 시킨다.


 ‘로베·르네 집'에서도 연극에 대한 상상을 엿볼 수 있다. 50분의 공연 시간 동안 다섯 가지 형식의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배우 두 명 모두 출연하는 에피소드는 둘이고, 한 명이 출연하는 에피소드는 셋이다. 일인극인지, 이인극인지, 일인 다역인지 정의내리기가 모호하다. 에피소드의 형식도 모두 다르다. 구연동화도 있고, 그림자극도 있고, 포퍼먼스도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인 독백극이라고나 할까? 아직 여물지 않은 풋과일 같은 공연이었지만 두 배우의 연극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공연이었다. 연극에 대한 애정이 있다고 한 것은 두 배우가 그들이 느꼈던 성장통을 연극을 빌려 얘기한 것이 아니라, 성장통을 빌려 연극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이 다섯 가지 형식과 에피소드를 가진 연극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연극을 통해 현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빌려 연극을 얘기하는 것은 도리어 연극의 가치를 흐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이 중요하다. 현실을 떠나서 살 수는 없지만 연극을 떠나선 살 수 있다. 이것은 물리적인 경우다. 정신적으로는 어떨까? 오히려 현실을 떠나야 살 수 있지 않을까? 순간에 충실 하라는 말이 있다. 상상 없이 순간에 충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감각이다. 미각, 촉각, 시각, 후각, 청각은 순간에 충실 할 수 있다. 하지만 오감에는 의지가 없다. 의지의 발현으로 충실하기 위해서는 상상이 필요하다.  무엇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지금 이 순간의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연극은 상상이다. 현실을 빌려 연극을 얘기하고, 연극을 통해 의지가 생기는 것. 현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것이 예술이다. 그래서 설득에 의한 의지가 아니라 감동에 의한 의지를 예술가들에게 바란다. 파리의 로베르네집 역시 예술가들의 집이 아니었던가! 연극 로베·르네집의 두 여배우 <사과와 홍시>도 잘 여문 예술가가 되리라 생각한다.



 

보충설명

작품명 : 로베-르네집
공연자 : 사과와 홍시
일 시 : 2008년 8월 24일-26일
장 소 : 홍대 로베르네집

작| 홍한솔 천진영
연출|홍한솔 천진영
음향/조명|정세연
촬영|이다민
기록|김예인
출연|홍한솔 천진영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주중에는 충북음성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학원 선생.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