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역문화공작소 "공간의 기억" <기억하는 사물들>, <헤테로토피아>

2014. 12. 13. 22:54Review

 

서울역문화공작소 "공간의 기억" 

<기억하는 사물들>, <헤테로토피아>

 

글_채 민

 

구서울역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문화역 서울 284에서 <서울역 문화공작소-공간의 기억> 프로그램이 기획 되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함께 한 이 공간이 기억하고 있는 삶의 이야기들을 동시대 예술가의 시각으로 끌어내고, 이곳에 미래의 기억을 담는 것이 목표이다. 근대사는 겪어보지도 못한 젊은 예술가들이 끌어낼 수 있는 서울의 이야기는 무엇인지, 장소성을 기반으로 하는 장소특정적 다원예술 프로젝트로서 그들이 이곳에 담고자하는 ‘미래의 기억’은 무엇인지. 의구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문화역 서울 284를 찾았다.

  

<기억하는 사물들> - 재현된 공간에서의 오디오 투어

3등 대합실,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있다. 헤드폰을 받아들기 전에는 누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인지, 누가 공연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중앙에 육중한 원기둥의 구조물이 서있다. 기둥에는 톱니바퀴들과 타자기, 오래된 재봉틀 등이 매달려 있다. 바깥쪽에는 직선으로 뻗어 있어야 하는 플랫폼의 입구들이 기둥을 둘러싸고 이어져있다.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는 구조물은 그렇게 완전체가 된다. 검은색 철제 스탠드가 구조물 사이사이에 설치되어 따듯한 전구색으로 오브제를 비춘다. 기억이 담긴 사물들을 매달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이 키네틱아트 자체가 역을 의미한다는 것을 곧 등장하는 역장을 통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역’은 공간을 가득 메우는 소리와 함께 돌아가기 시작한다. 소리는 레일 위로 들어오는 육중한 기차를 상기시킨다. 플랫폼에서 들릴법한 신호등 소리와 모든 마찰음들이 일정한 박자를 가진 음악으로 변한다. 이제는 더 이상 역이 아닌 이곳, 시간을 박제해놓은 박물관에서 ‘역’이었던 시간이 다시 이어진다. 눈앞에 돌아가는 키네틱 아트는 오래된 타임머신의 엔진처럼 전시실 곳곳에 잃어버린 시간을 불어 넣을 듯 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키네틱 아트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 둘 씩 일어난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의자위에 놓인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들의 모습은 어느덧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역무원도 같은 공간 어디에선가 이렇게 등장했을 것이다. 한동안 역(키네틱 아트)을 살피던 역무원은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히고 검표를 시작한다. 열 명의 관객은 좀 전에 받은 헤드폰을 쓰고 먼저 나간 배우들을 따라 이동을 시작한다. 

 

 

함께 나온 배우들은 사라지고 없다. 앳된 구두닦이 혼자 남아 복도 위에 길게 늘어뜨려진 털목도리를 바라보고 있다. 어느 하루, 자신의 일상을 벗어나 역 구경을 하기로 마음먹은 듯 보이는 그가 말 없는 시선으로 공연을 끌어간다. 그의 시선은 털목도리의 끝에 놓여있는 작은 탱크에 머문다.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미니어처들이 포근한 목도리 위에서 강한 대비를 보여준다. 길고 긴 목도리의 끝은 어떤 여인의 무릎 위에서 계속 된다. 뜨개질 하는 여인은 누군가를 그리는 뒷모습을 가진다. 실처럼 얽힌 우리의 역사와 그 안의 모든 이야기를 감싸 안는 것은 여인의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지나 '역장실'에 들어선다. 별다른 가구 없이 책상 위에 오래된 타자기가 올려져 있다. 어두운 방, 창문에 지나가는 기차의 빛이 번쩍인다. '역장이 방을 비운 저녁의 어느 때' 이렇게 공간은 보여주고자 의도하는 개별의 시간을 가진다. 역장실의 근처에는 '귀빈실'이 있다. 구두닦이는 귀빈실 바닥에 놓인 장난감 레일에 관심을 갖는다. 잘 차려 입은 부잣집 아이들이 카펫이 깔린 바닥에 앉아 가지고 놀았으리라. 이와 같이 전시장 곳곳의 사물들은 사람들의 기억과 상상을 가져온다.

 

 

복도와 복도가 교차되는 지점들에 우리의 서글픈 기억을 끼워 넣었다. 창문을 향해 있는 재봉틀 기계에 앉은 ‘공순이’는 간혹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창문 밖에는 기약 없는 밝은 미래를 스스로에게 약속하는 글자들이 누워있다. 또 다른 복도의 끝에는 바닥부터 뒤엉켜 올라간 수많은 넥타이들이 닫힌 창문을 부여잡고 있다. 이 모습은 출구 없는 고통에서 몸부림 쳤어야 했던 1997년 경제위기를 상기시킨다.

나누어준 헤드폰에서는 각 공간에 관련된 감상적인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넓지 않은 공간에서 구두닦이를 따라 몰려다니는 형태는 오디오 투어와 다름없었다. 그의 시선과 시간을 쫓느라 우리는 각자의 공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공연의 마지막 무렵 다시 3등 대합실로 돌아왔고 끝은 시작과 같은 과정을 밟았다. 전시의 곳곳으로 들어갔던 배우들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동시대의 일상인들이 되었다. ‘기억하는 사물들’의 공연적인 요소는 시작과 끝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3등 대합실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들은 몇 가지 상징적인 오브제를 활용한 시대의 재현으로만 멈추었다.

 

<헤테로토피아> - 기억에서 빌려 온 환상

유토피아는 실제 장소를 갖지 않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그 자체로 완벽한 사회이다. 푸코는 사회 안에 실제하며 유토피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장소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헤테로토피아’다. 이것은 보통 서로 양립이 불가능한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 놓는데 그 원리가 있다. 극장은 대표적인 ‘헤테로토피아’로서 사각의 무대 위에 온갖 낯선 장소들이 연이어지게 만든다.

부인대합실과 통해있는 1,2등 대합실의 문 앞에 수십 켤레의 장화가 놓여있다. 장화를 신고 대합실 안에 들어서면 런웨이 같은 통로의 양 옆으로 물이 차있다. 공간에 기억을 불러오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헤테로토피아는 물이다. 기억의 덩어리를 상징한다는 12개의 오브제들이 통로를 따라 설치되어 있다. 총 10회에 걸친 퍼포먼스는 매번 다른 주제를 가지고 진행된다고 했다. 내가 보게 된 공연은 ‘늙어 간다는 것’

 

 

물에 반사되는 조명이 검은 벽에 너울거린다. 몽환적인 음악과 함께 습한 공기가 온몸을 나른하게 만든다. 장화를 신은 발은 물속에 담근 채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빗자루로 물을 휘젓는 소리와, 배우의 움직임에 따라 전해지는 물결이 잔잔한 파도같이 느껴졌다. 그들이 조성한 공간은 내게로 하여금 초저녁의 바다를 연상 시켰다. 개인(나)의 기억에서 빌려온 환상. 그 편리한 환상에 잠시 동안 나는 위로를 느꼈다.

늙는다는 것에 대한 그들의 사유를 담은 간단한 텍스트를 벽에 투영한다. 그 아래에서 물에 몸을 담근 남자와 여자가 각자의 내러티브 없는 움직임을 가진다. 간혹 리얼타임 카메라로 확대된 그들의 몸짓도 벽에 투영된다. 나는 텍스트와 그들의 움직임, 소리 등이 서로 가지는 연관성에 집착하지 않고, 각각을 소재로 받아들이며 나만의 기억을 공간에 아카이브 했다.

이 외에 서울역을 하나의 거대한 턴테이블로 표현한 <턴테이블 위의 시간>과 특징이 다른 11개의 방을 설치한 <기억극장> 등 몇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더해져 <공간의 기억> 프로젝트가 완성된다. 다음 전시관을 향해 걸어가던 와중에 문득 문화역 서울 284는 건축물 자체가 ‘역’으로서 가지는 공간성이 강렬한 곳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구서울역 시절의 기억에 천착하지 않고, 장소의 역사성을 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다면 동시대 예술가들의 아이디어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진제공_문화역서울 284

**문화역서울284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seoul284.org

 

 필자_채민

 소개_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를 믿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고민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