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신혜진이재은장홍석, 기술이 실패할 때

 

신혜진이재은장홍석, <기술이 실패할 때>

 ‘실패의 기술(技術/technic) 또는 기술(記述)

 

글_김민관

 

(이 글은 심각한 혼동들로부터 시작돼 결국 그 기술(記述)이 분열하는 시점에 이르는 글이니 주의하세요. 심각한 착시를 경험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공연을 다루는 또 다른, 아니 유일한 기술(技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기술’의 의미

자전거, 책장, 이불 세 가지 종류의 사물들을 다루는 신혜진, 장홍석, 이재은. <기술의 실패>라는 제목의 공연, 허나 이 ‘기술’의 정체가 묘연하다. 프로그램 북을 보고서야 이것이 ‘technique’으로 번역되는 기술(技術)임을 알았다. 세 명의 ‘안무가/무용수/퍼포머’라는 것은 안무(choreography)가 춤(choreo-)의 글쓰기(graphy)임을 생각할 때 춤의 (글)쓰기를 실패할 때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보다 공연의 맥락에서 이 ‘기술(技術/technic)’ 자체라는 것이 묘연하다. 기술이 주어인 이 제목은 기술의 실패가 야기하는 조건/결과에 대한 어떤 (춤이라는) 기술(記述)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을 표현하는 기술(技術/technic)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기술(技術/technic)이 바탕이 되는, 그 기술의 결과 또는 총체로서 기술(技術/technology)의 의미를 고려해 본다면 기술의 ‘테크놀로지’의 번역 역시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과학 문명의 인간의 의식 전반을 지배하여, 자칭 성공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자리가 실종된다는 차원에서 실패의 차원을 기술(記述)하는,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진단으로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진단은 오산이다. 초입이 길었다.

세 사람은 각각의 사물-오브제로부터 출발하지만, 곧 그것으로부터, 그것과 함께 구성되지만, 그 오브제를 돌연 (서로) ‘바꿈’하기로 한다. 가령 장홍석은 책장을 가지고 책장과 하나 되기 또는 휘휘 돌면서 투포환처럼 그 동력에 감싸이던 순간에서 그 사용을 멈추고 신혜진이 사용하던 자전거를 가지고 자전거 타는 흉내 내기를 한다. 각각의 사물을 마주하고 그것으로부터 움직임을 구성·도출한다. 곧 사용하고 다시 놓고, 다른 걸 사용하는 식으로 이들은 오브제-특정적인 사용에서 재배치된 장소의 다른 오브제 사용, 그리고 다른 문맥을 생산한다. 또는 그 문맥 안에서 기능한다. 어쩌면 이들은 사물-기계, 사물로부터 출현하는, 그것으로부터 맥락화되는, 사물에 접변되고 사물에 포개지는 ‘사물-인간’의 어떤 구성적 맥락을 주요하게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실패의 기술’

근대 과학 문명에서, 사물을 도구로서 사용·지배함이 기술(技術/technic)의 맥락이라면, 기술(技術/technology)의 실패는 일어나지 않고 대신 기술(技術/technology)에의 (인간의) 실패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기술은 인간의 사용을 전제하지만, 인간의 사용의 성공/실패로 가늠할 수 없이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공연에서의 ‘실패’는 바로 인간의 기술(技術/technic)이 실패하는 어떤 순간을 기술(記述)한다. 그리고 그 실패는 결국 사물과의 관계 맺음의 어떤 실패에 가깝다. 사물이 사용(use)됨으로써 사용됨의 가치(useful)를 획득하는 대신, 도구가 아닌 맥락에서 사물이 (잘못) 사용됨으로써, 사물과 일체화된 신체(움직임)를 낳는 데 그친다.

그래서 이는 춤이 유용한가(-도구적 측면에서) 무용한가(-역시 도구적 측면에서)라는 물음을 담은 최은진 안무가의 <유용무용론>이라는 작품의 질문의 맥락을 있거나 갱신하는 또 다른 작업으로도 보인다. 최은진의 공연이 춤이 어떤 사용 가치를 띨 수 있는가의 표면적 물음에서, 생계와 작업을 병행하는 예술가의 삶을 조소적으로 또 메타 비평적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모순 형용의 작업이었다면, 이 작업은 ‘기술’이 신체의 연장(延長)으로 사용되거나 그래서 가령 유용한 도구로서 연장 역할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움직임을 추동하고 개발하는, 사물-신체의 부분이 되는 데 집중한다. 최은진이 절박하게 자신의 질문을 실제 말로 던지고 그 말의 자취가 흩어지고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가운데 무용한 춤의 유용한 가치를 실험하는 자조 의식이 깔려 있었던 데 비해 이들은 사물과 싸우거나 사물에 매진한다. 그러려고 애쓴다. 입을 다문다.

<기술의 실패>는 사물-신체의 구성이 사물이 움직임의 영감이 되고, 움직임의 생산 방식, 경로를 다르게 바꾼다는 점에서 사물이 움직임의 일부로 구성된다. 이는 ‘이들이 사물과 맺는 관계’ 방식이자 이들이 팸플릿에서는 쓰지 않고 현장에서 나눠줬던 A4에 실려 있던, 사물이 (사물이 지시하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할 때”라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물의 본래의 사용 가치는 그 사물을 기능의 측면에서 유용함의 평가 기준으로 만드는 반면, 움직임을 (재)구성하는 방식의 쓰임에서는 사물의 형태와 그 말하는 방식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생겨나고, 이들은 그 유용함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사물의 다른 사용을 만든다.

그런 차원에서, 이들의 사물 앞에 머물기는 이 사물을 어떻게 사용할까가 아닌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고민이며, 무엇보다 어떤 결과를 창출하기 위한 기능적 쓰임에 대한 고민이 아니다. 또 그 고민은 사물과 일체화되어 만드는 ‘시공간의 차원에 대한 기술(技術/technic)’곧 안무에 대한 순간적 고려와 판단일 수 있다. 그와 같은 순간 이후 이어짐은 사물과 일체화되어 또 다른 사물이 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사물-인간의 삐거덕거리는 합은 곧 끝나고, 말 그대로 기술(技術/technology)의 실패가 동반된다. 왜냐하면 그 시공간의 판은 하나의 신체일 수 없어 불가항력적으로 그 움직임의 동력이 다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물의 본래의 목적을 상실할 때”

따라서, 신혜진은 자전거를, 장홍석은 책장을, 이재은은 이불을 계속 자기 몸의 바깥으로 계속 사용할 수만은 없다. 이들은 이 실패의 순간을 용인하는 대신, 사물의 교환가치를 새로이 획득하는, 다른 사물로의 이동을 통해 장소를 재배치하고 다시 시작한다. 시공간의 판이 분절되는 편집점, 사물을 바꿔, 움직임의 동력이 되는 사물 앞에 다시 놓이고, 그 사물로부터 규정되는 또 다른 장소에서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기술의 실패인 이동은 또 다른 기술의 필요를 부르고 ‘다른 사용’, 곧 다른 사물과의 대면과 순간의 멈춤과 어떤 사유, 판단이 생겨나고, 또 앞선 다른 사용의 맥락들을 가져오는 여지도 생겨난다.

가령 앞선 사용에 대한 관성-자전거가 없지만 여전히 페달을 밟는 행동이 이어지기도 한다. 사물을 다루는 기술(技術/technic)은 기술(記述)하는 방식으로 재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물과 그 장소를 떠났지만 몸에 익은 흔적들은 기억의 일부로서 신체-움직임으로 작용한다. 이 부분이 이들이 말한 “사물의 본래의 목적을 ‘상실’할 때”를 드러낸다. 여기서 사물의 목적이란 꽤나 ‘막연한 말’(-왜냐하면 사물의 목적이 생기는 이상 사물은 다시 도구의 기능적 가치를 실현하는 존재로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다)은 사물의 특정한 도구적 쓰임이 아닌 사물의 다른 쓰임, 사물을 다르게 지시하며 그럼으로써 사물의 본래 목적으로부터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사물을 목적을 갖는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사물과 관계 맺으며 목적이 없는 상태를 향해 그 쓰임의 가치로부터 탈주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들이 말한 “목적”은 부정적 의미에서의 기능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상실’은 또 다른 차원이다. 사물로부터 벗어날 때, 멀어질 때, 사물의 (잘못) 사용을 더 이상 하지 못할 때, 그 사용이 다하는 순간이 올 때, 그 사물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들의 몸의 이전 기술(記述)에서의 흔적으로 튀어 나온다. 부재가 아닌 부재의 흔적으로, 상실에 대한 기억으로 여전히 사물이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물이 없기에 사물을 다루는 방식으로서 기술(技術/technic)은 실패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실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새로 만난 사물을 새롭게 다루며 적응하기도 하지만, 어떤 흔적은 관성처럼, 아니 새롭게 움직이고자 하는 몸의 관성을 넘어 다시 움직임으로 튀어나오곤 한다.

 

‘야릇한 실패의 흔적’

장홍석이 문화역서울 284의 기둥을 발로 차며 뒤로 튕겨 나감은 기둥이 없는 허공을 차는, 여전히 같은 움직임을 하되 움직임이 공간에서 뒤틀리는 ‘야릇한 실패의 흔적’을 남긴다. 지금까지 작품을 지시하거나 그것에 실패한/실패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를 작품과 교차하며 기술하고자 했다. 하나의 단어 ‘준안정(metastable)’이 남았는데, 이는 과학 용어다. 가령 물이 수증기가 될 때 보통의 기준점인 100도씨가 아닌 상태에서 수증기가 되거나 할 때 준안정 상태라 이야기한다. 곧 기준점(안정)을 충족시키는 상태로의 변화 이전의 상태, 따라서 그 변화로의 잠재적인 역량을 갖고 있는, 전이(liminal) 영역인 셈이다. 이 잠재성의 영역은 사물을 대하는 방식의 멈춤에서-사물과 어떻게 다루기 직전에 안정되지 않은 여러 가능성을 가진 상태에, 때론 계속 멈춤일 수도 있는 그런 상태에서 느껴지거나, 한편으로 이들이 계속 파편적으로 사물과 붙어 놂을 지속하다 그것을 벗어나 하나의 신체 집단의 형태를 이룰 때, 하나의 자전거가 굴러감을 표현할 때, 한 명이 삐죽 그것을 이탈하려고 할 때 드러난다. 사물의 당연한 쓰임을 재현하는 것에서 흩어져 다른 사용을 찾거나 이전의 기억의 흔적으로 돌아가려 할 때, 아니 어떻게 될지 모를 때- 감각된다. 사물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에서 오기보다 사물을 다루려는 순간, 다루는 순간에서 이탈하려는 순간에 드러난다. 앞서 기술(技術/technic)이 실패하는 순간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공연은 거국적으로 상실의 차원을, 공연 도중 두 번의 암전을 통해서도 적용한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과 같은 이런 편집점의 주어짐은 사물의 다른 사용들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이는 일종의 단기 기억적인, 반복되는 움직임들, 사물을 다루는 방식인 어떤 관성의 움직임들을 다시 상실하는 데 유용한 방법적 기술(記述)이기도 하다. 또한 새로운 몸의 기술(技術/technic)을 획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제한의 (불)가능성’

더 잘 실패할 수 있는 법을 이들이 찾았던 것처럼(“잘 하는 실패”), 이들이 그 실패의 기술(記述)로 매끄러운 미적 도상의 동작을 구성하는 대신, 그리고 최대한 이음매 없이 이어가는 대신 동작이 사물과 엉켜 반복된 움직임을 만들고 이마저도 사물과 멀어져 어떤 사물에 가까운 모습으로 본래 목적을 잃어버릴 때, 그 움직임, 기술(技術/technic)/기술(記述)은 실패한다. 기술(技術/technic)의 기술(記述)이 실패하는 과정 속에서 이들은 서로의 사물을 교환하고 상대의 기억을 자신의 방식으로 대체하거나 또는 자신의 기억 안에서 지속하면서 공간을 누빈다.

곧 사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무용의 익숙함(그래서 새로움)을 가져오는 대신-역설적으로 사물과 만나고 사물로부터 접히고 확장되는 사물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사물의 무모한 사용을 통해 움직임은 현란해지기보다 단순화되고 사물을 벗어나 자연스러워지기보다 그 사물을 알던 때의 상태로 관성화되고, 이런 과정 자체가 재배치를 통해 원환의 과정을 이룬다. 따라서 이들이 다루는 사물은 무한한 쓰임과 실천을 허락하기보다 그 사물로부터 몸을 제한하고 나아가 그 제한에 대한 저항과 실천으로 표현과 감상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 사물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의도한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익숙하게 다루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되 다르게 다룰 수 있는 어떤 불가능성의 실천에 무모하게 몸을 던진 것에 가깝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거나 핸들을 돌리며 방향을 조절하거나 하는 전형적인 쓸모를 향한 사용의 움직임을, 이불은 펴고 잡아당기는 식의 신축성 있는 소재에 기댄 움직임을, 책장은 책이 없는 상태에서 무겁고 단단한 오브제로 그것이 들렸을 때 위태롭게 다룰 수밖에 없는 움직임을 낳음은 모두 사물 그 자체로부터, 사물과의 관련성으로부터 나오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사물의 쓰임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나지만 그것을 일상에서 유희적으로 다룬다 할 때 그러한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영점에서의 시작’

대신, 이들은 그 사물로부터 나온 움직임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재배치를 통해, 허공에 짓는, 인간 간의 관계 맺기에서 오는 무용의 계보적이고 익숙한 움직임의 전형으로부터 벗어나 ‘시작’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들 앞에 놓인 사물은 말이 없는 대상이나 단순한 오브제가 아닌, 관성화된 움직임의 가능성을, 그것이 튀어나옴 자체를 배제한 채 시작(해야)하는 잠재성의 지대이자 막막한 현실의 유비가 아닐까. 그러니까 이 사물은 그 사물 자체로 투명하지 않고 매우 불투명하게 그들 앞에 놓이고 거대한 벽이자 암흑으로 그들 시야에 놓여 그들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모한 어떤 실행들로 보이는 움직임들은 자전거를 마치 와작 내듯 바닥을 밟거나 이불을 찢을 듯 펴내거나 벽을 온몸을 던져 차는 신혜진, 이재은, 장홍석의 각각의 모습의 과격함은 이 현실(‘제도/관습은 권력이자 초자아다!’) 타개책에 대한 고민과 저항의 또 다른 모습으로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기술(技術/technic)의 실패는 더 이상 테크닉적으로 아름다움을 충족시키는 기술(奇術)만으로는 부족한, 동시대적인 감각의 부재에 대한 기술(記述)에서 출발하며, 그래서 기술(技術/technic)의 우월에 대한 벗어남으로, 그럼에도 남은 관성의 기술(記述)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물이 없음에도 작동하는 그 힘 자체가 있고, 이는 테크닉으로서의 춤에 대한 흔적과 우스꽝스러움, 그럼에도 어떤 항거의 의미가 겹쳐진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사물을 다루는 태도로서 무모함은 매우 깔끔한 반복 동작의 단위들과 자리바꿈을 통한 재배치의 문맥 아래 기술(技術/technology)의 세계를 재현하는 듯한 컨베이어벨트의 원환 관계, 그리고 때로 발생하는 그 기계 전반의 오작동으로서의 재배치와 각 기계와도 같은 신혜진·장홍석·이재은의 오작동으로서의 반복으로만 해석/재단할 수 없는, 그 힘들의 과도함이 묻어난다. 그래서 이 공연은 무용의 기술(技術/technic)이 실패할 때의 무용의 다른 기술(記述)을 위한 방법론의 차원에서 시작하며, 그래서 (아름다울 수도 없고 어떤 동작들 자체를 구현하는 데 머물 수도 없는) 무모하고 따라서 실패할 수 없음의 가능성이 높음을 긍정하는 데서 또한 시작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 기술(技術/technic)의 실패는 변증법적으로 ‘실패의 기술’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그들이 말하는 “좋은 실패, 잘 하는 실패”에 대한 어떤 불가능한 염원에서 비롯된.

 

 

*사진제공_문화역284(1,2,3) 장홍석(4,5)

**신혜진이재은장홍석 SNS페이지 바로가기 >> www.facebook.com/shin.lee.jang

***문화역서울284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seoul284.org

 

 필자_김민관

 소개_공연예술 프리랜서 기자 및 자유기고가. 문화예술 분야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 중. 온라인 뉴스채널 http://artscene.co.kr 편집장

 

□ 문화역서울 284 (구 서울역사)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김종덕)가 주최하고 (재)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최정철)이 주관하는 2014년 시즌프로그램 <오픈스페이스 2014-Winter>를 개최한다. 2014년 11월 18일(화) ‘한국트러스트무용단과 독일 Iptanz 협력공연 <Time is Time is...>를 시작으로 다양한 장르의 8개 작품을 12월 14일(일)까지 문화역서울 284 RTO 공연장에서 선보이는 중이다.

 □ 12월 7일(일) 오후 5시에는 2개의 무용작품이 함께 선보인다. ‘신혜진 이재은 장홍석’은 공동 작업을 통해 몸의 상태들이 교란되고 증폭되는 매커니즘을 탐구하는 무용 작품 <기술이 실패할 때>를 선보인다. 몸과 몸 사이, 공간과 동선 사이에서 반응하며 끊임없이 재배치되며 증폭하는 과정을 보게 되고, 관객들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각자의 방식, 생각대로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 안무가이자 퍼포머인 ‘신혜진 이재은 장홍석’은 협력, 상호보완, 능동적 참여, 소통, 자생을 위한, 새로운 대안을 찾는 유연한 집단이다. 신체의 운동성에 주안점을 두고 다각도에서 접근을 시도하며 공연의 형식과 작업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 시즌프로그램 <오픈스페이스 2014>는 실력과 도전의식을 겸비한 예술가들에게 문화와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역서울 284'에서 전시와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사전 공모에 신청한 총 68팀 중 최종 선발된 18팀이 여름(Summer), 가을(Autumn), 겨울(Winter) 시즌별로 전시와 공연을 진행한다. ‘시즌 3 Winter’에서는 ‘시즌 1 Summer', ‘시즌 2 Autumn’에 이어 복합·설치미술·미디어아트·무용·연극 등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가들이 참여해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전시·공연 관람의 기회를 제공한다.

 □ <오픈스페이스 2014> 프로그램의 모든 전시와 공연은 무료이다. 문의 및 참가신청 예약은 전화 02-3407-3500, 3502와 문화역서울 284의 홈페이지(www.seoul284.org)를 통해 할 수 있다. 전시는 별도 예약 없이 관람 가능하며, 공연은 인터넷으로 예약 후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