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혼자서, 그리고 같이, 인천을 걷기 - <인천수첩, 두 각을 이루는 곡선>

2015. 10. 19. 13:29Review

 

혼자서, 그리고 같이, 인천을 걷기

전시 <인천수첩, 두 각을 이루는 곡선>에 대한 단상

_전강희

 

길다래와 유광식이 인천 여기저기를 걷고, 또 걸었던 때는 아마 봄이었을 것이다. 지난 달, 갤러리 카페 파란광선에서 있었던 이들의 전시 <인천수첩, 두 각을 이루는 곡선>은 여름 색깔이라 할 수 있는 파란색이 지배적인 색조였지만, 설치된 작품 속 길다래의 바다와 유광식의 하늘에서 여전히 따스한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계절을 보내며,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엇을 보았을까? 이들이 나에게 안내할 인천은 어떤 모습일까?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부터, 전시장에 감도는 파스텔 톤 하늘색의 따뜻함 때문에, 호흡을 느리게 가다듬었다. 길다래와 유광식도 이렇게 천천히, 조용히 걸으며, 인천의 사소한 모습들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느린 산책을 즐겼을 테다.

 

# 유광식

- , , 도시에서 듣기

유광식이 카메라에 담은 인천을 멀리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80년대 어쩌면 70년대의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사진 속 건물은 모두 낮은 키에, 부식된 자국이 외벽에 선명하게 남아있으며, 창과 문도 아름다움 보다는 기능을 더 고려한 모양새이다. 요즘 자주 접하는 송도신도시나 인천국제공항의 매끈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거쳐 바라보던 도시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인천의 옛날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버려진 건물이 몇 채 보인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에 닿기 전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사진 속 파란 하늘과, 이에 어울리는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다. 버려졌다는 외로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성이다. 사진 속에서 포착되는 따뜻함은 사실 무형의 것이다. 피사체의 특성이라기보다 작가가 인천을 바라보는 시선 끝에서 생겨난 햇살과 바람이다.

작가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 위해서는 작품 앞에 서서 전시를 관람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사진은 마치 등장인물이 아직 무대에 올라가지 않은 세트장 같다. 이제, 관람자는 등장인물이 되어, 연극을 올리기 전, 무대를 탐색하며 몸이 공간에 적응하는 시간을 벌 듯이,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서있기보다는 수고를 들여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인천의 구도심(중구, 동구, 남구)에 있는 오래된 동네 구석구석을 걸으며 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화려한 신도시의 빠른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익숙해진 오늘의 감각 대신에, 옛날,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었던 시절의 느린 감각으로 자신을 되돌리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한 후에야, 유광식의 시선을 만날 수 있다.

관람자의 바뀐 몸의 리듬은 작은 골목들을 소홀히 대하지 않도록 만든다. 파라다이스 호텔 벽면에 비바람에 너덜해진 채로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페인트 조각껍질, 홍예문 천장에 난 작은 틈새와 모자이크처럼 박혀있는 다채로운 갈색을 띤 돌덩어리, 촌스러운 듯, 혹은 정겨운 듯 보이는 옛날 간판 들을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는다. 집과 길을 거닐며, 주위를 세밀하게 바라보던 몸은, 공간이 품고 있는 시간과 만나게 된다. 그 시간 속에 있었을 개개인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 본다. 과거가 나에게 다가와 현재가 된다.

 

# 길다래

- 공간을 타고 흐르는 파랑

최근 길다래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작업하는 과정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 시간 속에서 나에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 맑은 파란색 물감을 기다란 종이 위에 무심하게 쓱쓱 칠하던 모습이다. 붓이 가는 대로, 종이 위에 물감이 번져 흐르는 대로, 길다래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의 바다를 그려 나갔다. 3m길이의 바다 그림은 한 발 물러나 바라보면 삼각 돛대처럼 보인다. 돛대가 바다를 헤쳐 나가는 배의 중심을 잡아 주듯이, 이 그림도 파란광선의 벽 두 곳을 삼각형으로 이어주며, 전시의 방향을 잡아 주고 있었다.

큰 그림이 마주하고 있는 벽면에 기다란 창이 하나있다. 작가는 파란 투명 시트지로 이 창을 덮었다. 삼각형 큰 그림이 창에 비치는 듯, 창문 밖 파란 하늘이 창 안으로 쏟아지는 듯, 정형화된 공간은 빛이 지나는 시간에 따라 유동적인 공간으로 모습을 변화시켰다. 작가에게 공간은 또 다른 캔버스이기도 하다. 이 전시 이외에 다른 곳에서 만난 작품 <어떤 바다의 정원>에서도 전시장의 바닥이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작가는 회색빛 바닥위에 여러 글귀를 흰 수성 펜으로 적어놓았다. 전시가 끝날 무렵,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쌓여 글자는 지워지거나 일그러져, 다른 모양새를 갖추었다. 바닷가 모래 위에 새긴 말이 물과 바람 때문에 지워지는 것처럼, 이 공간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처음과 다른 공간이 되었다.

길다래에게 공간은 고정된 무언가를 존속시키는 장소가 아니다. 그녀가 만든 공간 안에서 마주하는 것은 미세하게 감지되는 시간의 흐름이다. 공간은 존속되는 것이 아니라 느린 흐름을 따라 매 순간 발생한다. 작품에 담고 있는 인천도 마찬가지로, 존속이 아닌 발생하는 공간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 모든 게 가려지고 / 새롭게 드러난다 / 어둠이 만든 길로 유유히 들어가/ 서성이다 만나는 것”, 전시 오프닝 퍼포먼스에서 작가가 낭독한 첫 번째 시 중 일부다. 작가는 일상에서 만난 인천의 풍경을 글로 그리고 있다. 시도 그림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담는다. 어떤 심상의 찰나에서 만난 순간적으로 발생한 공간의 한 귀퉁이를 오랫동안 글 안에 간직하고자 한다.

 

유광식과 길다래가 작품에 담아내는 인천은 멀리서 보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유광식이 사진을 통해 구체적인 인천의 모습을 포착해낸다면, 길다래는 좀 더 추상적인 스케치와 색채로 인천을 그려낸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질감이 한 공간 속에 공존한다. 사진 속에는 지금은 한적하지만 한때는 북적거렸을 도시의 모습이, 그림 속에는 예전에는 바다가 삶의 터전이었을 도시의 모습이 있다.

두 사람의 작품은 카페의 콘크리트 벽면과 바닥을 더 큰 배경으로 삼는다. 유광식의 사진이 콘크리트 벽면과 대비되면, 새롭게 번성하는 도시의 리듬을 따라가지 못해 뒤처지고 만 옛 도시가 그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회색빛 벽면이 길다래의 작품을 만나면, 가공된 것의 리듬에 제 속도를 잃어가는 자연의 리듬이 떠오른다. 서로 다른 질감의 작품이 한 공간 안에 있다. 관람객은 파란광선안에서 두 개의 시간 속에 머물고 있는 인천을 만난다. 이중의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것과 생성되는 것은 동일한 것일까? 두 개의 각을 만들어 내는 선형적인 시간을 순환적인 시간으로, 곡선으로 이어나가는 역할은, 관람객에게 주어진 몫이 아닐까.

 

인천수첩 ․ 두 각을 이루는 곡선 Icheon Note of 2 artists

길다래_유광식 2인展 2015_0607 ▶ 2015_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