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1회 바닥소리극 페스티벌 <안네의 일기, 판소리 하다>

2015. 10. 9. 15:41Review

 

제 1회 바닥소리극 페스티벌

판소리극의 정체성을 찾아서

<안네의 일기, 판소리 하다>

 

글_율

 

지구는 우주를 구성하는 천체 중 하나다. 하지만 지구 표면에서부터 우주로 향하는 통로인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디에서부터 우주라고 할 수 있고, 어디까지가 지구의 대기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애매해진다. 실제로도 우주의 경계에 관한 학설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지구로부터 100km로 상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주와 지구의 경계를 명확히 구획할 수 없는 것은 상이하게 다른 성질을 갖고 있지만, 큰 논리구조는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존재는 자신들이 가진 특이점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둘은 같은 시간축을 중심으로 돌지만 중력, 진공상태, 온도 등 너무도 다른 환경 요건을 지니고 있다.

가까이 맞닿아있지만 너무도 다른 환경조건을 갖는 두 세계를 이어보려는 시도는 오랫동안 시도되어 왔다. 그 시도는 관찰과 같은 기초적 단계부터 시작해서 이윽고 직접 우주선을 쏘아올리기까지 이르렀다. 분명히 큰 논리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 환경이 너무도 상이한 두 개념을 성공적으로 이어서 접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고찰을 필요로 한다. 전통 연희와 서구식 연극의 결합 또한 이와 비슷하다. 전통 연희와 서구식 연극은 구성 요소 상 공통점도 있지만, 그 연행 형태 측면에서는 상이하게 차이가 있다.

 

 

전통 연희 중 서구식 연극의 방식을 차용해 온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으며, 무대에 오르게 된 연희도 굿, 판소리와 같은 소리예술 종류의 것들뿐이다. 판소리의 경우에는 대목의 배역들을 나누어서 무대 위에 서서 나누어 부르던 것을 시작으로, 지금의 연기, 소품, 반주음악이 곁들어진 창극까지 변화를 경험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판소리 논법을 덜어내고 여타 다른 예술 장르의 요소를 차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안네의 일기, 판소리 하다>(이하 <안네의 일기>)는 그 삭제와 차용의 사이에서 절충점을 어느 정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판소리를 구성하는 연행 요소는 발림, 아니리, 소리로 나눌 수 있다. 각각 몸짓, 대사, 노래 정도의 이름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 위에 판소리 특유의 논조가 얹힌다는 점에서 달리 인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잡가들 중 긴 사설을 노래하는 종류는 주로 앉아서 소리(坐唱)를 하지만, 판소리는 한 편의 유장한 서사를 혼자서 연행해냄에도 불구하고 서서 노래(立唱)한다. 그렇기에 서 있는 동안 몸을 어떻게 움직일지, 그 긴 시간동안 관객들을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연행자 자신이 탈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연행되어 왔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공연에서 사용하는 것은 판소리가 현 세대로부터 유리된 장르가 된 것과도 관련이 크다. 그리고 <안네의 일기>에서는 발림, 아니리, 소리 모두를 동시대 사람들의 논리로 짜려 한 흔적이 보인다. 몸을 곧고 직선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호와 원형의 궤적을 그리듯이 움직이는 발림은 인물의 성격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행동들로 구현되었고, 남도 사투리의 억양과 방언으로 구현되는 경우가 많은 아니리는 평이한 어투의 표준어로 쓰여졌다. 하지만 이 연극이 ‘음악극’이 아니라 ‘판소리극’으로 분류될 수 있던 점은 소리에 있다.

아니리와 소리가 교차되는 지점은 극 내의 긴장도를 조절하기 위함이다. 아니리는 사건을 간단히 요약하거나 시공간의 이동 등, 극 내의 정보를 응축시켜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해설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소리는 인물의 내면 심리를 음악적 어법을 덧씌워서 전달한다. 이는 관객들이 극에 더 몰입하게 이끈다. 하지만 오로지 창으로만 극을 진행하는 방법은 관객들의 집중도를 유지시키는 측면에서도, 그리고 연행자의 체력적 측면에서도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아니리와 소리를 교차시키는 적절한 지점을 찾는 것은 판소리 공연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화롭게 유지시키는 데에 있어 무척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는 단시간 동안 알아내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전승 5바탕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한 바탕을 짜올리는 작업들이 판소리 내에서 아직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안네의 일기>에서는 이 지점을 적절하게 찾아내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네와 키티 배역이 중간중간 다른 인물을 연기할 때엔 그 변화를 빠르게 캐치해내는 게 어려웠던 부분도 있었지만, 인물의 소리로 서사의 긴장감을 조였다가 아니리로 밀도감을 낮추는 기능은 어색하지 않게 잘 구현되었다. 즉, <안네의 일기>에는 연극적 요소가 들어가 판소리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지만, 결국 극이 전개되는 흐름의 양식은 판소리의 논법을 따르고 있다. 이는 <안네의 일기>가 음악극이 아니라 판소리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여기에 공연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던 것은 밴드의 연주이기도 하다. <안네의 일기>에서는 전통적 연행방식인 고수와 명창 조합에 낮은 음조의 악기(베이스,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가 더해진다. 고수는 장단을 만들고, 여기에 판소리의 대사에 맞추어서 선율이 더해지면서 서사의 밀도감은 더욱 촘촘해지고 인물의 감정은 보다 더 입체적으로 표현된다. 서양악기와의 협연은 젊은 국악인들이 많이 시도하는 방식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시도들 중에는 선율의 구성이 판소리의 전체적인 조와 다르거나, 혹은 두 요소가 잘 어우러지지 못해 악기와 소리가 따로 노는 듯 어색해지는 경우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안네의 일기> 속에서는 소리와 연주가 무척 잘 맞았다. 판소리에선 대사의 맥락, 정서와 실제 구현되는 방식인 소리의 분위기와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이 공연에서는 밴드의 협연 또한 이를 잘 고려하고 성공해낸 것처럼 보였다.

필자가 극 내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부분은 키티와 안네 사이의 관계가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과정이었다. 안네가 생일 선물로 받은 일기장을 키티로 명명하고 처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할 때, 키티는 관찰자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심지어 안네의 말에도 대꾸하지 못하고, 무대 한 편에 놓여져 있는 책상 근처만을 맴돌며 안네를 볼 뿐이었다. 하지만 안네가 키티에게 페터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는 순간, 비로소 키티의 말문이 열린다. 진정으로 안네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키티’라는 친구가 생겨나는 순간이다.

키티가 단순히 안네의 말상대가 되어줌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고 싶어함을 보여주는 부분은 극의 절정부분에서 등장한다. 안네가 전쟁이 끝난 뒤에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열거할 때, 키티는 고수의 북을 빼앗아와서 본인이 직접 안네의 노래에 장단을 만들어주기 시작한다. 키티와 안네의 합은 연극적으로도, 그리고 판소리적으로도 큰 함의를 지니는 부분이다.

 

 

판소리에서는 고수와 소리꾼 사이의 관계가 무척 중요하다. 한 명의 몸으로 무대의 청중을 장악하고 리드해나가는 것은 소리꾼이지만, 중간중간 소리꾼의 상태를 파악하고 적적한 장단을 즉흥적으로 짜내 소리꾼이 좀 더 편하게 연행할 수 있도록 길을 닦는 것은 고수의 몫이기 때문이다. 즉, 좋은 공연이 있기 위해서는 소리꾼과 고수 사이의 깊은 이해와 유대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안네와 키티 사이의 심리적 거리 변화를 판소리 논법에서 가져와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지점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존재했다. 재치가 있어야 할 부분에서는 충분히 재치 있게 연기하고, 쉬어야 할 부분에서는 적절하게 쉬었지만 절정에서 결말부로 이어지는 부분이 지나치게 짧았던 것 같다. 그렇기에 결말 부분에서의 오열은 감정의 굴곡선을 너무 급격하고 거칠게 꺾은 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안네의 일기>가 픽션이 아닌, 실제로 일어났던 비극적인 역사이자 인류가 자행한 참극이었기에 나온 연출이라는 생각이 물론 들지만, 극이 관람객의 몰입을 여러 요소로 방해하는 판소리의 분위기를 따라서 진행되어 왔던 것을 생각하면 결말이 극 내의 전체적인 표현의 온도와 어긋나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답습과 보존에 중점을 둔 무형문화재 제도가 시행된 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도의 여파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판소리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누가 더 스승의 소리를 똑같이 하느냐에 중점을 맞추는 동안, 더늠과 같이 소리꾼 개개인이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데에는 실패했다. 젊은 소리꾼들의 행적에 더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판소리는 현재 갖고 있는 이미지인 ‘오래된 어투를 고집하며, 긴 호흡을 가지고 노래하는 한(恨)의 노래’로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기기 전, 여러 매체들이 등장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서구식 연극 무대로 옮겨가기 전의 판소리는 슬픔도, 기쁨도, 유머도, 분노 또한 있는 한 편의 드라마이자 관객들의 이야기, 당대의 이야기를 하는 살아 움직이는 예술이었다.

바닥소리 페스티벌에서 행해지는 공연들이 판소리의 본래 의미를 되살려 낼 수 있는 일련의 움직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판소리를 보다 친근한 장르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성과를 이룩해내야 할 것이다. 판소리라는 오래 된 장르를 현대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리고 서구식의 연극에 알맞게 짜여진 무대 위에서 판소리 논법으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상이한 두 가지의 논리를 동시에 소화해내려면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안네의 일기>를 본 지금은, 그들이 다음 작품 또한 멋지게 우주로 쏘아 올려지는 로켓이 되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 사진제공_바닥소리

** 판소리 공장 바닥소리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badaksori.com/ 

 

 필자_율

 소개_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