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여기는 당연히, 극장 <commercial, definitely>이 연극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2015. 10. 17. 12:25Review

 

2015 혜화동1번지 6기동인 가을 페스티벌 [상업극] 첫 번째 작품

이 연극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 <commercial, definitely>

- 마카다미아, 표절, 메르스 그리고 맨스플레인 -

 

글_황지윤

 

 

발칙하고 오만한 연극이 시작되었다

우리와 같은 몽매한 관객은 잘 알지 못하는 다양한 변수들을 엄밀하게 측정한 결과,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시간은 ‘58분 32초’까지라고 한다. 고로 오늘의 연극은 58분 32초 안에 막이 올라야만 한다. 무대 뒤편 스크린에서 쏜살같이 떨어지는 스톱워치의 시간은 감사하게도 58분 32초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서만 작동하는 관객의 수준을 배려한다. 이들이 전제하는 관객은, 그러니까 오늘 이 연극을 보러 온 나는, 지나치게 무겁고 깊이 있는 것을 피하고 알맞게 피상적이어서 도리어 교양 있어 보이는 그런 사람. 적당히 문화 예술을 즐기고 향유할 줄 아는, 단정한 로퍼를 신고 바지 밑단 정도는 접어 입을 줄 아는 사람. 공연의 러닝타임이 한 시간을 넘길 즈음 연거푸 하품도 할 줄 아는, 그런 흔하디 흔한 오늘 날의 힙(hip)한 관객.

본 연극은 스크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소극장 공연임에도 무려 영어 자막을 제공한다. 도입부터 일본의 유명 연출가 오카다 토시키의 추천사가 담긴 영상을 함께 보고, 본 연극의 모티프가 된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Gier> 실황 공연의 일부를 영상으로 시청한다. 배우가 매번 과장된 손가락 인용을 해가며 강조한 바 있듯이, 시작부터 아주 “인터랙티브”하다. 아아! 이 엄청난 인터랙티브함과 상호텍스트성의 향연! 동시대 힙스터 관객을 위한 극단의 세심한 배려가 아닌가? 공연이 끝나자마자 어서 인스타그램에 #대학로 #혜화동1번지 #상업극 #이랬는데 실험극? #인터랙티브 #존잼 등의 해시태그를 남발하여 인증 사진을 올리고 싶은 마음 뿐이다.

 

 

돈과 픽션 그리고 상업극과 실험극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암전이 끝남과 동시에 네 명의 배우가 시야에 들어온다. 배우들에게는 앞 뒤로 각각 네 개의 의자와 스탠딩 마이크가 주어진다. 이들은 뒤 편에 놓인 의자와 앞 쪽에 세워진 마이크로 인해 만들어진 임시적인 직선 공간이 마치 자신의 독립적인 구역인 양, 그 안에서 움직이고 말하고, 노래한다. 배우들은 서로의 대사에 끼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이들 각각의 이야기가 교차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병렬적인 구성으로 극이 진행된다.

그래서 도입부터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을 인용하는 걸까?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쓴 바 있다. 당대의 맥락에서 작가의 방점은 ‘여성’에 찍혀 있지만 본 공연은 이보다는 ‘돈과 픽션’에 무게를 둔다. ‘자기만의 방’ 안에 머물러 있는 배우들은 돈과 픽션, 혹은 예술과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물적 조건에 관해 고민한다. 이는 곧, 혜화동1번지 가을 페스티벌의 타이틀인 ‘상업극’에 관한 물음, 즉 상업극이냐 실험극이냐 하는 물음과도 맥을 같이 한다. 아, 이 내용과 형식의 일치. 참 대단하지 않은가?

네 명의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2015년 상반기가 눈 앞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다. 표절 의혹에 시달리는 신경쇠약 직전의 작가. 그러니까 작가 신경ㅅ-ㅇㄱ. 그는 열렬히 표절 행위를 부인한다. 그는 절규하며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내지는 “의도하지 않았습니다”와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리고 땅콩회항 사건으로 2015년 새해를 장식한 바 있는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아로 분한 단발 머리의 분신이 있다. 그는 외친다. “마카, 마카, 마카다미아!” 뿐만이 아니다. 리베카 솔닛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 의해 널리 알려진 신조어 ‘맨스플레인(mansplain)’을 시전하는 한 맨스플레이너(mansplainer)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거나 혹은 모르지만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지루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연극의 주석 역할을 맡은 한 배우가 있다.

  

▲주석 역할에 이리배우(왼쪽), 맨스플레이너 역할에 박경구 배우(오른쪽)

 

“여러분, 생각이라는 것을 해 보십시오”

주석 역할을 맡은 배우는 생소하게도 스스로를 ‘서술자’도 아닌 ‘주석’으로 호명한다. 주석은 읽는 이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해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독자에게 강제되는 첨언이다.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 우리의 시선은 주석에 의해 일시적인 휴지를 경험하며 개인의 내밀한 독해는 외부자의 무례한 침입에 의해 방해 받고, 심지어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되기까지 한다.

맨스플레이너는 매번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라는 문구로 대사를 시작한다. 반면 주석 역할을 맡은 배우는 일정한 규칙 없이, 다시 말해 본인이 내킬 때면 언제든지 대사와 대사 사이에 끼어들며 극과 관객 사이를 오간다. 맨스플레인이 “오빠가 알려줄게”의 전형이라면 주석은 성별을 뛰어넘은 고차원의 오지랖이다. 20세기 문예이론에 의해 그만 죽어버리고만 저자를 착잡한 마음으로 애도하듯 “작가님이 알려줄게”의 뉘앙스로 쉼없이 주해를 덧붙이는 것은 이미 죽은 자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오만한 첨언은 귀찮고 성가시지만 생사를 건 자기 존립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무척이나 짠하기도 하다.

주석은 설명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독자의 이해력을, 대중의 저급한 입맛을, 그리고 관객의 집중력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는 관객의 인식 밑바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그들의 사고 하나하나에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지경이다. 주석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십시오”

아이러니하게도, 본 공연은 관객의 수준을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지만 그와 동시에 관객에게 ‘생각’이라는 것을 해 볼 것을 요청한다. 배우들은 대중의 저급한 취향을 경멸하고, 표절 의혹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몰아붙이는 공격을 위한 공격, 폭로를 위한 폭로를 감행하며 희열을 느끼는 광기 어린 대중의 마녀화형식 놀음에 분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없는 작가는 무의미하며 관객 없이 연극은 존립할 수 없다. 더욱이 대중에게 호응을 얻지 못하는, 즉 대중성이 없는 예술이 시장에서 살아 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중이라는 존재는 필수적이지만 그들의 저급한 취향에 예술을 맞출 수는 없다. 그들은 이러한 딜레마를 상당한 절망으로 표현한다. 상업극을 표방하며 실험극을 하고 있는 이들은, 한 시간이 지나면 지루함을 느끼는 관객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클라이맥스도 템포도 없는 이 세상에

그리하여 냉소만이 남았다. 이들이 화음을 섞어 장엄하게 합창하는 노래 말에 따르면, 변화가 불가능한 우리의 공동체는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실패라는 현상을 문제시 하지만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지 않으며 이를 극복할 만한 명시적인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실패의 현상에 냉소하며 이제는 이야기를 꺼내기 조차도 지겨운 너저분한 사건들만을 나열할 뿐이다. 메르스로 국민들이 불안해 할까 혹은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까 염려하여 한국을 재난 선포 지역으로 공표하지 않았다는 관계 당국의 발언과 같은 그런 너저분한 일들 말이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나열은 뚜렷한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 공연은 일종의 시니컬한 관점주의로 일관하며 안전한 전개를 꾀한다.

예컨대 국가적 위신과 한국 문화예술계의 발전을 위해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표절 즈음은 묻어버리는 것이 이롭지 않겠냐고 웅변하는 모습,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에서 기원하였다면 표절로서의 모방은 필연적이지 않은가 하는 견해, 혹은 고의가 아닌 결과적 표절에 관해 우리는 심판할 수 없다고 소리치는 것 등은 사실 이들이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리는 에피소드는 사건을 둘러싼 일종의 스케치, 즉 현상의 묘사에 지나지 않으며 관객은 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한다. 주석이 덧붙인다. 너무 심도 깊은 논의는 모두를 지루하게 할 뿐이라고.

대한항공 부사장의 분신이 경건하고 성스럽게 마카다미아에 관해 노래할 때, 본 공연의 관조적인 시니컬함은 극에 달한다.

 

마카 마카다미아/ 이 배를 돌려라/ 이대론 항해할 수 없어/ 그릇이 필요해/ 나의 마음 담아 줄/

매뉴얼 필요해/ 내 앞에 무릎 꿇어라/ 땅콩 뿌려줄 테니

 

한창 성악을 하던 배우는 난데없이 멜랑꼴리와 인생의 허무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그는 일등석에 앉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는 것의 참을 수 없는 지루함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땅콩회항 사건은 인생에 관한 본질적인 허무 또는 한 개체적 실존의 공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극을 받지 못하는 어느 재벌 2세의 안타까운 불감증에서 비롯된 사건은 아닌가, 하는 뉘앙스를 풍길 때에는 너무나 작위적이면서도 어처구니 없는 분석에 그만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실패했을지도 모른다고 담대히 규정해버리는 이들의 태도가 실은 그리 공허하지 만은 않다. 이들이 늘어놓는 냉소의 향연이 무기력함을 환기하지는 않았다. 실천적 페시미즘이 삶에 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고 니체가 말했던가? 그렇다. 하지만 니체에 관한 언급은 삼가도록 하자. 본 공연에서도 니체에 관한 언급은 하려다 말았으니까. 게다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이제 슬슬 지겨워졌을 것이다. 본 연극의 구성상 클라이맥스는 존재할 수 없지만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는 것에 노래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 노래나 한번 불러볼까, 하는 심정으로 배우들은 마지막 합창을 시작한다. 

클라이맥스도 템포도 없는 이 세상/ 클리토리스도 템폰도 없는 이 세상/

 너를 사랑하는 것 만으로는 견딜 수 없는 세계/ 변할 수 없는 공동체/ 우리는 실패한 걸까

 

 

*사진제공_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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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_황지윤

 소개_연극을 보러 다니는 철학도입니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