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잡온론> 우주마인드프로젝트

2015. 12. 25. 21:46Review

 

생활/연극인의 21세기 자본론

우주마인드프로젝트, 연극<잡온론>

@상암월드컵경기장

 

글_이은서

 

풍문으로 먼저 들었소.

올 여름, 상암으로 이사 간 프린지 페스티벌 소식을 풍문으로만 들었다. 둘째를 낳고 한 달이 채 안 되어, 땀을 뻘뻘 흘려도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못 틀어서 온 몸에 땀띠를 달고 있던 그 때에, 경기장으로 옮겨 간 프린지가 얼마나 놀라웠는지 카톡으로, 페북으로, 뉴스레터로, 아기를 보기 위해 놀러 온 손님들로부터 듣고 또 들었다.

'당분간 공연 보는 일은 대단히 애써서 조력자를 찾지 않는 이상,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적어도 두 아이가 꽤 커서 애들만 두고 저녁에 집을 비울 수 있게 되기까지 (한 15년?) 내 인생에 저녁 공연 관람은 물 건너갔다.' 는 생각을 하면서 좀 서글퍼지고 있던 차였다. 수행하듯 두 아이와 집에서 엉켜 있다가, 결국 교육기관에는 최대한 늦게 보내자는 나의 신념을 깨고, 8월 말에 큰 애를 급하게 어린이집으로 우겨(?)넣었다.

“아이는 언제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저 공포 속에 남겨두고 갈 수 밖에 없는 이 상황을요. 아이는 언제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엄마 아빠도 그닥 단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잡온론 1장 中

풍문을 통해 꼭 보고 싶었던 공연이 있었다. 연극하는 엄마 아빠들은 모두 눈물 한번 훔치거나, 먼 산을 바라보게 만든다는 공연이었다. 그 공연이 2015년 12월 2일에 있단다. 수요일 오후 1시, 3시에 있단다. 평일 낮에 있단다. 무조건 가야한다. 큰애는 어린이집에, 작은애는 잠시 어머님께 맡겨두고, 바람처럼 달려간다. 잡온론(Job on Loan). 우주마인드프로젝트(Would you mind Project). 어머나. 이 이름. 곱씹을수록 흥미는 더해진다.

 

 

언어유희의 힘

“독일 출신의 칼 맑스는 칼을 막 쓰기로 유명한 요리사입니다. …(중략)… 칼은 엥겔스와 함께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공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공상단 선언’을 집필하게 됩니다.” -잡온론 2장 中

극은 배우인 부부의 실제 일상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상에 대한 묘사는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데, 하필 연극을 하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야기이다. 심지어 이야기 하나하나가 너무나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켜서, 촉각을 곤두세워 의식하며 듣고 있기엔 뼈마디가 편치 않다. 더군다나 비슷한 상황에서 연극을 하고, 연극을 선택해온 나에게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배우가 전쟁터 같은 아침의 지하철 안에서 겪었을 일들과 그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노라면 ‘내가 이 극을 과연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스멀스멀 겁이 나기 시작한다. 또 배우 개인의 팍팍한 삶과 삶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구조와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이로써 극은 굳이 애를 키우지도 않고, 연극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다가 한국 사람이 아니다 할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생활을 영위하고 수입을 얻을 목적으로 한 가지 일에 종사하는 지속적인 사회 활동(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을, 사유하게 만든다. 하지만 안 돼. 더 이상은. 너무나 거대해. 힘들어.

 

 

그런 심각함에 빠져드는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말장난들은 나를 구제해준다. 제목과 팀명뿐만 아니라, 극 전반에서 보여주는 기가 막힌 언어유희는 이 극의 백미이다. 칼을 막 쓰기로 유명한 칼 맑스에서, 보이스 피싱과 스미싱의 대가 스미스와 아담의 이야기까지……. 언어유희를 통한 유머러스한 표현 방식은 한국사회의 경제 현실,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개인과 구조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견디어 갈 만큼의 사유(思惟)를 이끌어낸다.

또 칼 맑스와 아담과 스미스의 싸움을 계단을 이용해 속도감 있고, 기발하게 연출한다. 다만 관객들이 싸움 장면의 호흡을 조금만 더 같이 따라갈 수 있도록 하는 휴지부가 곳곳에 있었더라면, 혹은 그 호흡을 최대한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다른 장치가 있었더라면, 다양한 언어유희를 즐길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근데, 말장난의 묘미는 ‘얼른 뱉고, 딴 주제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공연의 최적화 된 무대, 계단

계단은 아담, 스미스, 맑스의 싸움 장면에서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엄마, 아빠이자, 연극인이자, 또 다른 직업인으로서 살아가는 두 배우의 아침 풍경에서도 계단은 효과적으로 쓰인다. 아이와 정신없는 아침을 보내고, 또 전쟁터 같은 지하철 속에서 지하철을 놓치고, 새로 탄 지하철에서 사람들 틈에 부대끼는 배우들의 일상묘사에도 탁월한 표현수단이 된다.

공감에 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배우들의 일상을, 계단에서의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땀과 숨으로 실감나게 표현을 한다. 한 계단 한 계단 걷는 것으로는 현실감을 표현하는 것이 충분치 않다. 그래서 배우들은 계단을 뛰어 오르고 뛰어 내린다. 관객은 계단에 앉아서 지하철에 허덕이며, 시간에 쫓기는 아침 풍경을 그야말로 실감나게 감각하게 된다. 동시에 “도가니”가 아프고 “구역질이 날 것” 같다는 대사가 몸으로 쏙쏙 들어오기 까지. 계단은 표현을 최적화하기 좋은 무대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두 배우의 꿈을 담아, 계단아래 관객의 시야 멀리까지 나아가 다시 관객의 앞으로 달려 들어오기까지, 계단은 관객에게 또 다른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내가 연극 하고 싶었던, 사유(思惟)

당연한 말일 수 있지만, 나는 사유하기 위해 연극을 택했다. 연극을 택한 사유가 사유하기 위해서란 말이다. 단순히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만 끝나는 사유가 아니라, 또는 논리와 이성의 끝을 보기 위한 사유가 아니라, 타인과 한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생기는 감각적인 경험을 통한 사유를, 연극을 통해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이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연극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술자리 안주거리로 이야기 하거나, 혹은 신문기사에 나온 설문조사를 통해서 규정짓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하다. 그렇다고 보람도 없다. 그 자체가 소모적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무대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것을 관객과 함께 공유하는 힘은 배우-창작자 자신뿐만 아니라, 관객 스스로에게도 좋은 자극제이자 치유제로 작용하게 된다. 스스로 ‘말할 줄 아는 것’의 힘은 얼마나 강력한가. 게다가 평일 낮의 공연이라니, 동종업계의 사람에게 그리고 창작자 자신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선물해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 날 전해진 파동이 아직도 내 몸과 맘을 흔들고 있다. 

 

 

*사진제공_서울 프린지 네트워크 

 

 필자_이은서

 소개_연극 연출을 하고 있고,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