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성북동 비둘기 <하녀들 - apply to play>

2015. 12. 31. 21:02Review

 

일상지하에서의 마지막 연극 놀이

극단 성북동 비둘기 <하녀들 - apply to play>

 

글_황지윤

 

굿바이 일상지하

한성대 입구 역에서 내린다는 것이 그만 무심결에 혜화에서 내리고 말았다. 4호선을 타고 연극을 보러 갈 때면 늘 혜화에서 내리던 습관 때문일까. 넋을 놓고 출구를 향해 계단을 한참 오르다 비로소 실수를 자각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지루하여 남은 여정은 버스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성북동으로 향하는 2112번 버스를 꽤 오래 기다렸다. 평일의 이른 저녁 시간대라 사람이 붐빌 만도 한데 동승하는 이가 그리 많지는 않다. 버스 안 역시 비교적 한산하다. 대학로에서 멀어질수록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서서히 바뀐다. 밝고 과밀한 공간에서 밤이 느껴지는 적당히 어둡고 한적한 거리로.

당도한 곳은 대학로의 끝이자 성북동의 초입에 있는 ‘연극실험실 일상지하’이다. 일상지하는 극단 성북동 비둘기가 2010년 둥지를 튼 이래로 이들의 연습실과 공연장으로 그 몫을 톡톡히 다해 왔다. 연출가 김현탁은 이곳에서 <메디아 온 미디어>, <세일즈맨의 죽음>, <하녀들>, <미스 줄리> 등 고전에 기반을 둔 작품을 새로운 감각으로 해체·재탄생시켰다. 그는 일상지하는 물리적으로는 지하(地下) 공간을 지시하지만, 사실은 일상지하(日常之下), 즉 일상의 아래 공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일상지하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연극적 경험으로 관객들의 감각을 파고든다. 지하로 향하는 허름한 계단을 지나 조우하게 되는 공연장은 페인트가 칠해지지 않은 시멘트벽과 기둥이 덩그러니 놓인 날 것의 공간이다. 한쪽 벽면에는 이들이 이전에 공연한 작품의 포스터가 붙어 있기도 하며 연극을 위한 소품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어 공연장이자 동시에 연습실이라는 말이 실감 된다. 객석은 접이식 철제 의자가 전부이며 무대와의 별다른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상지하의 공간적 특수성을 주목해 왔다. 꾸미지 않은 지하실이 부여하는 물리적 빈약함이 연출과 배우들의 움직임, 그리고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 채워지는 과정은 실로 흥미롭다. 하지만 아쉽게도 2015년 12월, 극단 성북동 비둘기는 2011년 초연한 장 주네의 <하녀들 - apply to play> 공연을 끝으로 연극실험실 일상지하를 떠난다. 5년 계약이 끝난 현시점에 오른 세를 감당할 수 없어서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는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의 한 구절이 이들이 처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뛰노는 배우, 변주하는 사물들

막막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거침없는 움직임이 서늘한 지하의 빈 공간을 열기로 가득 메운다. 아니, 어쩌면 이들의 처절함이 연극 <하녀들>의 광기를 보다 돋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몸을 떨고 있는 두 배우의 뒷모습이 눈에 띈다. 입장과 함께 공연이 시작된 터였다. 지하실은 별도의 무대 공간 없이 접이식 철제 의자로 가득 채워져 있다. 관객들은 입장 시 맨 끝 세 줄에만 앉아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관객들은 배우들이 앉은 열 다음부터 차례로 자리를 채워나간다. 관객들이 모두 착석하자 출입구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두 배우의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된다.

김현탁 연출의 <하녀들>은 기본적으로 원작의 설정을 따른다. 쏠랑쥬(조서희 분)와 끌레르(이송희 분)는 마담(김미옥 분)이 집을 비운 사이 기괴한 연극을 펼쳐 보인다. 끌레르는 마담 역을 맡고 쏠랑쥬는 끌레르로 분하여 가학과 피학의 놀이를 즐긴다. 마담을 연기하는 끌레르는 하녀들에게서 풍기는 악취와 더러움을 경멸한다. 그녀의 대사에 따르면 하녀들은 “방과 복도를 흘러다니는 악취”이며 밤마다 우유 배달부에게 몸을 내어 주는 여자들이다. 마담으로 분한 끌레르가 하녀들에게 퍼붓는 욕설은 마담을 향한 본인의 혐오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하는 혐오이다.

마담이 뱉어내는 경멸적인 언사 앞에서 끌레르 역을 맡은 쏠랑쥬는 두려움에 떨며 과장된 몸짓으로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그녀는 허리를 굽히며 “마담은 착해요.” 혹은 “마담은 아름다워요.” 등의 대사를 읊기도 하고, 마담으로 분한 끌레르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저희는 마담을 증오해요.”와 같은 말을 내뱉으며 양 극단을 오가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도마조히즘적인 극 중 극은 마담에게 느끼는 뿌리 깊은 혐오감, 질시, 부러움, 욕망인 동시에 강한 자기혐오이자 자조가 뒤엉킨,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뒤틀린 자학의 한 양상이다.

본 공연의 가장 특징적인 점을 꼽자면 바로 사물의 활용을 들 수 있다. 몇 되지 않는 사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극을 다채롭게 구성한다. 이는 쏠랑쥬와 끌레르가 펼치는 극 중 극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마이크는 남근 상징이 되어 쏠랑쥬를 위협하기도 하고, 마담의 성기가 되어 두 자매의 외설을 형상화하기도, 태동 소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가끔은 스피커와 함께 그저 주의를 환기하기 위한 소음으로 사용될 때도 있다. 열과 행에 맞춰 배열되어 있던 간이 의자들은 배우들이 뛰놀기 시작하면서 접힌 채로 지하실 벽면 곳곳에 켜켜이 쌓인다. 의자는 활용 방식에 따라 새로운 오브제로 재탄생한다. 의자들은 보름달이 뜬 전나무 아래에서 토막 나는 마담의 신체, 어린 시절 뛰놀던 돌다리, 도피를 위한 기차 등으로 자유롭게 그 모습을 달리한다.

 

 

Apply to Play and to Reality

쏠랑쥬와 끌레르의 연극이 한창 물이 오를 때 즈음, 객석에서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얼마나 한참 벨 소리가 울렸는지 공연장에 미묘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다. 이때 객석에 앉은 누군가가 기어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응, 공연 보던 중이야.” 전화를 받은 중년 여성은 곧이어 객석에서 일어나 지하실 한가운데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의자를 보고 두 하녀를 꾸짖는다. “어머 얘, 너희들 지금, 뭐하니?”

마담의 등장은 강렬하다. 어딘지 모르게 격앙된, 젠체하는 고상한 말투로 대사를 쏟아 내며 공간을 누빈다. 한참 이곳저곳을 활보하던 마담은 하녀가 마련해 준 자리에 앉아 연극실험실 일상지하를 소개하는 글을 읽기 시작한다. 마담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다’는 대목에서 본인과 관객을 가리키며 “우리는 없다?”하고 큰 소리로 되물으며 놀란 표정을 짓기도 하고, ‘천장에 그 흔한 조명 기구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딱해 하기도 한다. 일상지하는 지하의 소극장이 아닌 ‘그냥 지하실’이라는 표현에서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려 버린다. 그녀의 웃음은 연민 섞인 조롱이다.

김현탁 연출의 <하녀들>은 ‘apply to play’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김현탁은 무수히 많은 극 중 극으로 이루어진 원작에 착안하여 <하녀들>을 일종의 메타 연극으로 탈바꿈시켰다. 마담 역할에 지나치게 심취한 끌레르에게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그만 니 자신으로 돌아오라고 조언하는 쏠랑쥬의 대사는 예사롭지 않다. 확성기를 들고 지하실을 누비며 하녀들의 동선을 지시하고 끌레르의 연기를 지도하는 마담의 모습은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극적 프레임(diegesis)을 노골적으로 환기하는 거대한 바(bar)의 활용은 또 어떠한가?

마담과 하녀들의 관계를 주류 연극과 비주류 연극, 혹은 드라마 연극과 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긴장 관계로 본 비평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마담과 하녀들의 갈등이 평론가와 배우의 관계 또는 이론과 공연 현장의 불균형한 힘의 구도를 연상시키는 메타 연극이라는 지적 역시 연극을 모티프로 재탄생한 김현탁 연출의 <하녀들>을 보다 풍부하게 만드는 비평이다.(***) 하지만 2015년 겨울의 <하녀들>은 2011년의 <하녀들>과 조금은 다를 것만 같다. 일상지하를 떠나야만 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지하실로 끌어 내려진 <하녀들>이 보여 준 광기는 과거에 비해 조금은 더 처참하고 절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연 말미에 이들이 노래한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떠밀리듯 오를 수밖에 없는 이들의 현실적 상황을 환기한다. 모든 반짝이는 것이 금이고 자본인, 이들이 마주해야 하는 ‘지상’이 물론 천국은 아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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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본 매체에서 다룬 공간 리뷰를 참조하길. 일상지하(日常地下), 일상지하(日常之下) - 극단 성북동비둘기 http://indienbob.tistory.com/575 

**김기란. 고전 희곡의 각색, 타협하거나 차별화 하거나 두 편의 《하녀들》. 연극평론 63호 (2011년 겨울)

***백로라. 이 시대 ‘하녀들’의 잔혹한 유희 《김현탁의 하녀들》. 공연과리뷰 75호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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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성북동비둘기

  필자_황지윤

 소개_연극을 보러 다니는 철학도입니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