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NEWStage 선정작 <아임-언-아티스트> : 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2017. 2. 8. 17:02Review

 

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만리동-예술인주택을 빚진 예술가들 <아임-언-아티스트>

구성/연출_이은서 (NEWStage 선정작)

 

 

글_김유진

 

 

 

 

1. 안 Inside : <아임-언-아티스트>의 형식 구조와 주제

평론가가 아니라 기획자인 내게 연극 비평 의뢰가 들어왔을 때 의아했다. 그 요청의 낯설음은 이 일을 내가 과연 할 수 있는지 따져보기 이전에 호기심을 동하게 하였다. 불나방처럼 요청에 이끌려 1월 17일 오후, 나는 만리동 언덕에 서있었다. 예술인 가이드, 한 무리의 관람객들과 함께 굽이굽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자 거기 예술인협동조합주택 ‘막쿱’ 세 동이 아담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늘로 높이 솟고 있는 아파트 공사현장과 고등학교 사이에 자리한 주택 뒤로 쾌청한 하늘이 활짝 펼쳐진 점이 인상적이었다.

관람객들은 주택 구석구석을 탐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엘리베이터에는 주택 설계회의 일지가 빼곡하게 적힌 일지가 프린트되어 있었고, 공용공간으로 활용되는 옥상에는 서울 멀리 상징적 공간을 볼 수 있는 잠망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계단참마다 자전거가 놓인 자리 근처에 그림이 걸려있고 집집마다 거주 예술인이 속한 장르가 명패 대신 붙어 있었다. 가이드는 주택까지 오르는 길과 주차장에서 주택 건축 과정, 협동조합 경험, 주변 공사로 인한 생활 곤란 등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 중 예술가가 문란하다는 편견으로 고등학교와 갈등이 생겼던 에피소드가 가장 흥미로웠다.

상당히 길었던 극의 전반부, 사람들이 모이고 걷고 자유롭게 구경하는 투어 과정 덕택에 집들이에 초대된 손님이 된 기분이 들었다. 예술이 직업인 이웃의 목소리 좀 들어보자는, 가벼운 호기심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한 호흡. 그 이후 극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얼마나 난해하든, 일단 자리 잡은 이웃의 포지션으로 인해 편안하게 ‘응, 너는 그렇구나.’ 할 수 있는 마음자세가 생겨났다.

 

 

 

 

이렇게 시작된 이웃 예술인의 목소리. 연극은 재밌었다. 아니 그보단, 요즘 보기 드물게 편안한 미덕이 있었다고 할까. 여러 사정 속에 놓인 예술가들이 각자 웅얼거리듯 자신의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관람객에게 말을 걸었다. 인물별 옴니버스가 중첩된 뭉텅이는 예술가의 진정성과 생활의 비루함 사이에서 생성되는 일종의 분열에 관한 것이라 이해했다. 극 중간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이해를 도울 수 있을 듯싶다.

“호박고구마는 호박인가요, 고구마인가요.

주먹밥은 주먹인가요, 밥인가요.

인간쓰레기는 인간인가요, 쓰레기인가요.“

여기에 한 줄 보태 보자면 “생활예술인은 생활인인가요, 예술인인가요.” 쯤 되려나.

연극이 끝나고 나니 왜 이런 요청을 받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연극은 연극의 안팎을 모두 보아야하는 작품으로 극의 내재적 서사 구조와 연출 방식의 분석만으로는 충분한 비평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연극에서 증언되는 예술가의 어려움은 예술가만의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 땅에서 살고 있는 보편적 주체들에게 거의 대부분 해당되는 내용으로 극이 위치한 현실 지평을 액자틀로 삼아 연극의 안팎을 연결해 설명하는 일이 필요해 보였다.

 

 

 

 

2. 밖 Outside : <아임-언-아티스트>가 저격하는 예술과 행정의 현실

근현대산업사회는 전문화·분업화를 통해 생산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욕망의 기획으로 움직인다. 전문화·분업화는 다른 삶의 영역을 배제한 채, 창조성과 쉬지 않는 몰입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지배적 담론 위에서 자아성취와 명예 및 금전 획득을 모두 해결해주는 마법의 카드로 둔갑한다. 때문에 커뮤니티에 헌신하고 돌봄을 행하는 사람들은 전문적 역량에 시간을 투자할 수 없어 자존감의 추락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문제에서 예술이라고 자유로울 리 없다. 생활 영역이란 사적 공간을 분리하여 고뇌하는 관찰자로서 더 깊고 어려운 주제 의식을 파헤치는 예술 작업은 근현대예술가의 숙명 같은 것이다. 삶터가 도구화되는 문제와 프로 예술가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별개의 것일 수 없으며 이 분열의 피로함으로부터 생활 영역을 보호하고 싶은지, 예술가 정체성을 보호하고 싶은지 우왕좌왕하게 된다. 특히, 아이를 낳은 여성예술가는 이 문제를 끌어안고 삶의 근간에 대한 철학적 의문에 빠지지만 좀처럼 희뿌연 기분을 걷어낼 수 없게 된다.

서울시라는 공공 주체가 조성한 만리동 예술인협동조합주택은 예술가들이 느끼는 혼란을 극대화하는 것 같다. 예술가 입장에서는 주택이 살 곳인데, 행정은 관과 협력해 지역을 수호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예술 작업 사례이길 바란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연극에서도 질문된 바, 예술가가 예술 작업을 멈추게 되거나 가족 중 유일한 예술가가 사망하면 그 가족은 그동안 일구어온 삶터인 예술인협동조합주택을 떠나야 하는 것일까?

 

 

 

 

살아갈 집이란 직접 짓고 일구는 공간으로, 여기저기 손때 묻은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누적되어 ‘장소성’을 띄게 된다. 거주 공간, 공간이 위치한 지리, 그 지리 위에 배치된 여러 관계들이 층층이 엮여 삶의 역사가 새겨진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런 장소성을 전문적 생산성으로 대치함으로써 젠트리피케이션 등이 발생한다.

행정은 젠트리피케이션과 마천루로 대변되는 개발 광풍으로부터 지역을 보호할 방법을 탐색하기 위해 일/삶 이분법의 경계를 부수는 전위적 행보를 예술가에게 기대하지만, 경계 위의 인간은 아슬아슬하기 마련이다. 특히, 삶 공간은 일 공간보다 어디 뿌리내리지 못할 때 그 타격이 훨씬 강하고 가족을 이룰 때 그 타격은 곱절이 된다.

이 이슈는 청년의 열정노동 이슈와도 비슷한 지점이 있다. 청년의 열정은 중요하다. 하지만 청년의 열정을 연료로 하여 거대한 구조적 문제를 타개하고자 하는 정책적 기획들은 청년들의 삶을 도구화하고 피폐하게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임-언-아티스트>는 생활의 언어로 보드랍게 써내려간 에세이 같은 느낌을 주지만 정작 현실 개입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드러낸다.

“전세금 인상에 대비해 적금을 들고, 작업하는 시간보다 때로는 돈 버는 시간이 많으며, 연습실보다 놀이터에 있는 시간이 많은” 두 아이의 엄마이며 연출가인 이은서. 이분은 연출의 글에서 서울시가 집을 제공하면서 “공동체에 적합한 사람인지”, “얼마나 예술가인지” 증명하라는 것처럼 은연 중 느꼈다고 적었다. 드라마터그 전강희 역시 “막쿱에서 진행된 많은 행사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피곤하다’”고 느꼈고, “사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일이 과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며 “예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 중에서, 종종 일상적인 삶의 경계로 포획되지 않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3. 안과 바깥의 주어 : 증언의 한계

공연 막바지에 이르면서 나를 포함한 관객 중 일부는 먼지처럼 부유하는 삶에 대해 말하는 등장인물에 동화되어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경력단절을 고민하는 엄마 예술가들과 공동창작으로 시작된 연극, 극의 오프닝에도 투어를 삽입해 삶터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자고 손을 내밀었던 <아임-언-아티스트>는 예술가와 관람객들이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에 공감하게 만듦으로써 연대감을 이루며 끝났다.

그런데 사실 이 연극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 이 이상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임-언-아티스트>는 공연 당일의 시간과 무대 바깥에서 공연을 기획하고, 제작하고, 홍보하고, 무대에 오르는 전 과정이 연극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 이 과정이 마치 신탁을 받은 예정된 길 위에 점점이 고백을 흩뿌리며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공동체의 기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니 더 노골적이자면 2017년 현재 우리 삶에서 누구든 이렇지 않은가?

 

증언이 넘쳐나는 시대다. 동시에 증언으로는 어떤 진실도 분별되지 않는 혼란한 시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형식미학에 있어 과격하게 한 발 더 내디뎠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무엇보다 머무를 집이 사라짐으로써 마음과 삶이 부서지는 문제는 예술가만 겪는 일이 아닌데 연극의 주어가 좀 더 보편 주체이거나 주택 자신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진솔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예술가를 주어로 설정한 방식은 잔잔한 울림을 주었지만, 집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이분법 안에 갇히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필자_김유진

 소개_사회현상, 데이터로 문화 읽는 기획자. 예술로 약간 더 나은 세상을 일굴 수 있다고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