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이 된 여자-유압진동기

2009. 4. 10. 14:26Review

인형이 된 여자-유압진동기
  • 조원석
  • 조회수 402 / 2008.11.26

정금형씨의 연출, ‘유압진동기’는 아리송하다. 연극인지 다큐멘터리인지, 우연인지 의도인지 모호하다.

 정금형씨는 과거 자신이 했던 공연들의 영상을 보여준다.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연 영상 사이에 자신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 끼어들어 이야기의 구조를 튼튼히 해준다. 이 일상을 담은 영상에는 의도된 영상도 의도하지 않은 영상도 있다. 해변의 굴삭기와 누워있는 여인의 모래조각과 그 해변에서 모래조각처럼 누드로 눕는 정금형씨의 모습은 의도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굴삭기 운전기능사 자격증을 따내는 과정을 담은 영상과 자신이 했던 공연의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이다. 굴삭기 면허증을 따기 위해 ‘유압진동기’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유압진동기’를 위해 굴삭기 면허증을 따기로 계획했을 것이다. 이것은 연극이 현실에 영향을 준 경우다. 반면에 기존 공연의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은 ‘유압진동기’를 염두에 두고 찍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유압진동기’에 필요한 장면을 고르고 골랐을 것이다. 이것은 연극이 연극에게 영향을 준 경우다. ‘유압진동기’에는 연극과 현실이 섞여있다. 단순히 혼합물이 아니라 경계 지을 수 없는 화합물이다. 정금형씨에게는 연극이 현실이고, 현실이 연극이다.


 이 모호한 경계는 ‘자웅동체’를 꿈꾼다는 정금형씨의 말 앞에서 분명해진다. 모호한 경계가 분명해진다는 것은 모호함을 떨쳐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모호함을 지닌 채, 더 단단히 굳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자웅동체’가 무언가? 암컷과 수컷의 양쪽 기능을 가진 몸을 말한다. 그럼 암컷인가? 수컷인가? 경계가 모호하다. 만일 ‘자웅동체’라는 말이 없었다면 어떻게 불러야 했을까? 돌연변이? 하나의 종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돌연변이가 될 수 없다.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 그것이 ‘자웅동체’라는 이름이다. 정금형씨의 자웅동체는 단순히 생식기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일관되게 흐르는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모호함을 그대로 지닌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함과 악함 사이에, 정직과 거짓사이에, 게으름과 근면한 사이에, 가치 있음과 가치 없음 사이에서 자신이 모호하다고 탓하고 있지는 않은가? 선함과 악함 사이에는 시대의 가치가 개입되기도 하고, 정직과 거짓 사이에는 하얀 거짓말이 있기도 하고, 게으름과 근면 사이에는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있고, 가치 있음과 가치 없음 사이에는 개인의 취향이 있기도 하다. 왜 선택을 강요받아야 할까? 둘 중에 하나, 셋 중에 하나. 이런 선택은 싫다. 돌연변이를 선택하고 싶고, 돌연변이에 이름을 붙이고 싶다. 모호한 자신에게 이름 붙이기. 그것이 ‘자웅동체’가 아닐까? 과거와 현재에 일관되게 흐르는 모호함. 그 모호함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인다면 그 모호함에서 모호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정금형씨의 ‘자웅동체’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보자.


정금형씨는 배우이면서 연출자다. 배우의 위치와 연출자의 위치가 일치한다. 배우이면서 연출자인 정금형씨가 혼자 무대에 오른다. 정확히 얘기하면 혼자는 아니다. 무대에는 언제나 인형이 있다. 이 인형에게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정금형씨는 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포기한다. 때로는 자신의 몸 전체를 인형에게 주기도 한다. 자신의 다리가 인형의 팔이 되고, 팔이 인형의 다리가 된다. 사물이 인형이 되기도 하는데 이때도 역시 그 사물을 인형처럼 움직이기 위해 신체의 일부분은 인형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사물은 인간을 닮고 싶어 하고, 인간은 사물을 닮고 싶어 한다.

몸 전체를 파란 천으로 덮고 그 위에 배를 올려놓은 정금형씨는 바다가 된다. 이 장면은 처음부분에 등장하는데 자신과 바다를 일치시키고 있다. 아마 바다가 정금형씨의 여성性을 상징한다고 본다면 배 인형은 남성性을 상징 한다고 볼 수 있다. 관객은 바다의 움직임이 아니라 배의 움직임을 본다. 움직이는 것은 바다인데 그 파란천이 바다처럼 보이는 까닭은 배의 움직임 때문이다. 배 인형의 움직임이 그럴 듯해야 비로소 파란천이 바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다에 배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배에 바다가 붙어 있는 꼴이다. 이 상태에서 여성성의 오르가슴은 없다. 오르가슴이 없다는 것은 성적쾌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말한다. 삶의 허기, 이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한다. 여성성에서 결핍된 것은 남성성이다. 이 남성성을 안에서 찾는 것이 ‘자웅동체’이다.


정금형씨는 ‘자웅동체’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분리하는 과정을 거쳐 다시 하나로 잇는다. 두 동강이 난 인형의 모습이 잠시 스쳐 지나가고, 이어서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 인형이 되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인형은 목이 가늘고 길며 몸짓은 격렬하고 능동적이다. 여기서 인형은 남성성을 상징 한다. 수동적인 여성성의 일부분이 점차 능동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 능동성은 능동성이 가진 그 힘으로 인해 점점 더 커진다. 여기에 현실이 개입된다. 굴삭기 면허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세 번의 시도 끝에 면허증을 따내는 정금형씨가 웃는다. 정금형씨는 이 거대한 인형을 끌고 바다로 간다. 해변에는 굴삭기의 크기에 맞는 거대한 모래여인인형이 누워있다. 굴삭기는 머리에 유압브레이커(속칭 뿌레카)를 달고 있다. 이 유압브레이커는 거대한 송곳처럼 생겼는데 주로 콘크리트나 바위를 진동으로 분쇄하는 기계이다. 그 모양이 수컷의 생식기를 연상시킨다. 아니 연상하게끔 유도한다. 거대한 모래여인인형을 애무하기 시작하는 굴삭기는 모래여인인형을 결국 산산이 부서뜨리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간다. 굴삭기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자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바다다. 바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도 있다. 굴삭기는 더 커져서 하늘이 되고, 모래여인인형은 더 커져서 바다가 되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하다. 경계가 모호한 것은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바다처럼 다르지만 닮아있는 것들 때문에 모호함을 느낀다면 모호하더라도 닮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닮음. 그것이 자기 동일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인형은 인간과 닮았다는 이유로 생명을 지닌 것처럼 느끼게 된다. 죽은 사물에 생명을 주는 일은 인류의 기원과 같이 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내세사상일 것이다. 죽음이 삶과 닮아있다는 생각. 죽음을 인형을 통해 생명으로 만드는 은유의 역사가 ‘유압진동기’에도 흐르고 있었다.

보충설명

* 작 품-유압진동기(정금형 구성/연출)
* 일 시-2008년 11월 14일,15일
* 장 소-다원예술매개공간,pPoPkki
* 서울변방연극제 참가작

필자소개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주중에는 충북음성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학원 선생.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