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저 - 나는 제자리에 없다

2009. 4. 10. 14:22Review

팟저 - 나는 제자리에 없다
  • 조원석
  • 조회수 429 / 2008.11.05

팟저-“나는 제자리에 없다” - 팟저와의 가상 인터뷰


팟저를 처음 본 곳은 홍대 포스트극장이다. 배우는 일곱 명이다. 일곱 명 모두 팟저다. 동시에 말하고,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표정을 짓고,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물론 다른 대사를 하고,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표정을 짓고, 혼자만 옷을 벗거나, 혼자만 빨간 속옷을 입거나 한다. 그러나 여전히 모두 팟저다.

팟저는 고유명사다. 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 그런데 배우는 일곱이다. 그럼 팟저는 동명이인일까? 이름이 같은 일곱 명의 사람? 아닐 것이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팟저는 분명히 고유명사다.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팟저는 일곱 명의 배우를 가리키는 이름은 아니다. 혹시 일곱 명의 배우가 팟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팟저는 이름이고, 이 이름은 가상의 인물을 가리킨다. 그리고 일곱 명의 배우는 팟저라는 이 가상의 인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이 일곱 명의 배우가 팟저의 다양한 모습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일치하고, 때로는 분열하는 모습.  그렇다면 팟저는 이 공연에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팟저라는 이름과 팟저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연은 퍼즐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팟저는 퍼즐을 맞췄을 때 나타나는 가상의 인물이다. 이 가상의 인물을 가상하고, 가상 인터뷰를 통해 팟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팟저와의 가상 인터뷰


나: 팟저씨. 먼저 자기 소개를 해 주세요.

팟저: 저는 배우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한다면 일곱 명의 배우입니다. 연극과 현실 사이에 있는 배우죠.


나: 배우에게는 연극도 현실의 일부분이 아닐까요?

팟저: 글쎄요. 폭력적이면서도 별 의미가 없는 질문입니다.


나: 폭력적이라뇨?

팟저: 현실의 일부분이 아닌 것이 있을까요? 상상의 친구와 노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그 상상의 친구는 현실 입니다. 현실은 무엇이든지 현실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입니다. 


나: 무엇이든지 현실로 만든다는 말은 현실이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인가요?

팟저: 현실이 아닌 것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하늘이 무너진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 ‘걱정한다.’는 심리가 들어가면 실제로 현실에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미래는 현실이 아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이 현실에 힘을 행사하는 거와 같은 겁니다. 현실은 일종의 감정의 소용돌이 같은 겁니다.


나: 그럼 배우가 연극과 현실 사이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저는 배우가 돈을 많이 벌 수 없는 연극과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떠올렸거든요.

팟저: 제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켰군요. 사이라는 단어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까지의 거리나 공간을 나타날 때도 쓰지만 친구 사이나 스승과 제자 사이처럼 관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연극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극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 있는 겁니다.


나: 그럼 배우가 관계란 건가요?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팟저: 지금 당신과 나는 어떤 관계입니까?


나: 음. 인터뷰를 하고 있죠. 인터뷰를 하고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 까요?

팟저: 맞습니다. 저와 당신 사이에는 인터뷰가 있죠. 인터뷰는 행위입니다. 친구 사이에는 우정이 있죠. 우정은 행위의 표출입니다. 연인 사이에는 사랑이 있죠. 사랑도 행위의 표출 입니다. 배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의 표출입니다. 행위가 뭡니까? 움직임이죠. 배우는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제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 아, 그래서 팟저는 끊임없이 움직임으로 무언가를 표출하는군요. 그런데 팟저가 움직이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움직임을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팟저: 그것은 전쟁과 관계가 있습니다. 전쟁은 이성으로 느끼는 혼돈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혼돈이었습니다. 이성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제시해야 했지만 그러질 못 했습니다. 이성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인간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혼돈을 일으킨 것도 이성이었고, 혼돈이 파괴한 것도 이성입니다. 한마디로 이성에 의한 이성의 파괴가 전쟁이죠. 이성의 자폭과 자살이 곧 전쟁입니다.


나: 이성의 자폭 이후에는 감성만이 남았겠군요.

팟저: 아닙니다. 감성만으로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혼돈만 일으키죠. 새로운 이성이 필요합니다.


나: 새로운 이성이 움직임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팟저: 이성은 처음에는 산 속에 숨은 은자처럼 도시를 관조했습니다. 이제 그 이성을 산 밑으로 끌어내려야 합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움직임입니다. 이성은 명상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통해 완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성이 현실에 스며듭니다. 그래야 연극이 관객으로 스며듭니다. 현실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겁니다.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몸이 다가가야 합니다. 팟저는 이성이 아니라 몸입니다.


나: 그럼 일곱 명이 동시에 같은 대사를 하는 것도, 반복되는 동작을 하는 것도 새로운 이성과 관계가 있겠군요?

팟저: 코러스는 소리의 극대화이고, 같은 동작을 하는 것은 행위의 극대화입니다. 코러스는 점의 형태를 띠고 있고, 행위는 선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소리는 대사를 말합니다. 대사는 언어죠. 언어는 이성의 소리입니다. 하지만 팟저의 대사는 이성의 소리가 아닙니다. 몸의 소리입니다. 일곱 명이 동시에 말하는 코러스를 듣는 순간, 관객은 대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사가 나온 곳을 보게 됩니다. 대사가 가리키는 곳이란 대사의 의미를 말하고 대사가 나온 곳은 일곱 명의 배우를 말합니다. 앞서 언어는 이성의 소리라고 했죠. 코러스는 언어가 몸에서 떠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성이 몸에서 떠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죠. 관객은 대사가 가리키는 의미를 붙잡아 일곱 명의 배우에게로 다시 끌어내립니다. 그리고 궁금해 합니다. 왜? 일곱 명의 배우는 동시에 말하는 걸까? 답은 간단합니다. 배우를 보라는 것입니다. 대사의 의미만 쫓지 말고 배우의 행위를 보라는 것입니다. 같은 대사를 했기 때문에 배우 행위는 같은 움직임을 보입니다. 언어는 멈춰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리나 움직였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일곱 명의 배우들이 내는 목소리는 단순히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가리킵니다. 그 한 점으로 모인 목소리가 팟저입니다. 그리고 목소리에 의지를 담기위해 시도한 것이 동시성입니다. 동시에 한 목소리를 내는 배우들을 보는 순간 관객은 배우들의 노력과 연습을 떠올릴 테니까요. 그리고 목소리에 의지가 있으니까 당연히 행위가 따라 옵니다. 새로운 이성은 이 행위를 반드시 수반해야 합니다.


나: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배우들은 앞 사람이 한 행동을 따라 하고, 같은 자세를 취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의지가 들어간 행동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배우라는 것이 연출자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야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는 없잖아요.

팟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를 봅시다. 정형시든 자유시든 상관은 없습니다. 어쨌든 둘 다 반복을 통해 운율을 형성합니다. 그림이나 음악을 보아도 됩니다. 예술 분야에서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리듬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반복은 지루함과 권태를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죠. 이상하죠. 반복이 주는 두 느낌이 너무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팟저는 반복을 긍정합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30분씩 운동을 하기로 계획을 세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매일 반복된 행위를 하면서 권태를 느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희열을 느낄 겁니다. 자신의 의지를 수반한 반복은 운율이나 리듬처럼 즐거움을 줍니다. 반대로 그 리듬이 깨졌을 때 자신을 자책하기도 합니다. 배우들은 물론 연출자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 간의 약속입니다. 배우들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팟저에서 배우들이 반복된 행위를 보이는 것은 그것이 목소리의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의지가 뭔가요? 의지는 수동이 아니라 능동입니다. 저항이 아니라 공격입니다. 그 공격 대상은 아마도 처음에는 자기 자신이 될 겁니다. 멈춰 있는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의지입니다. 운율이나 리듬이 뭔가요? 그것도 일종의 움직임입니다. 언어나 도형, 음표들이 의지를 가지게 되는 순간입니다. 팟저는 시나 음악에 있는 리듬입니다. 단어나 음표들이 아닌 배우들이 만들어 내는 리듬입니다.


나: 얘기가 길어지니까 혼란이 옵니다. 잠시 정리를 할까요. 팟저는 목소리고, 그 목소리는 동시에 나오기 때문에 점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팟저는 점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이성과 몸의 분리를 방해한다. 방해할 수 있는 이유는 목소리가 의지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팟저는 시나 음악의 리듬이다. 리듬은 반복의 긍정이다.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반복에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맞나요?

팟저: 예.


나: 그럼, 팟저는 일종의 의지 같은 건가요?

팟저: 정확히 얘기하자면 의지를 띤 이성입니다. 여기서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일에 열중 합니다. 반복을 하는 거죠. 그 반복은 쉬지 않고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리든, 작곡을 하든, 글을 쓰든 한 가지 일에 열중 하는 사람을 보면 이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광기를 지닌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광기가 아니라 이성입니다. 지독한 이성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팟저를 본 관객 중에는 팟저에서 광기를 보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 저도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배우들이 동시에 블랙이라고 고함을 지를 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요. 거북하다고 할까? 아니면 폭력적이라고 할까?

팟저: 블랙은 혼돈을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는 전쟁을 가리킵니다. 전쟁은 이성에 의한 폭력입니다.  전쟁을 하기 전에 인간은 논리를 폅니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명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명분이라는 것이 정의롭다는 겁니다. 정의에서 전쟁이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혼란이죠. 차라리 잔인한 광기로 인해 전쟁을 일으켰다면 이해하기가 쉬웠을 겁니다. 그래서 외치는 겁니다. 블랙이라고. 전쟁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 고함입니다. 폭력은 폭력에 대한 저항 역시 폭력적으로 만듭니다. 그것이 전쟁의 무서움입니다. 고함이 폭력적이라고 느낀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저항이 아니라 공격입니다. 저항은 폭력적이지만 공격은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공격의 무기가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나: 공격이 폭력적이 않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어요.

팟저: 바보 이반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이반이 악마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의지였습니다. 악마가 이반의 배앓이를 일으키고 땅을 굳게 만들어 이반의 쟁기질을 막으려 했지만 이반은 묵묵히 쟁기질을 합니다. 이반의 무기는 의지였습니다. 그 의지가 영리한 악마를 물리쳤던 겁니다.


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렵군요. 지금 세상에 바보 이반처럼 산다면 가난을 면치 못할 겁니다.

팟저: 글쎄요. 지금도 가난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보 이반처럼 살아서 가난한 걸까요? 바보 이반은 왕이 되어서도 농사일을 합니다. 여전히 가난하죠. 바보 이반은 농사일을 천직으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천직으로 여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림을 천직으로 여깁니다. 연극을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가난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배당하지는 않습니다. 지배당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모두 왕입니다. 바보 이반은 왕이 됐지만 백성들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영리한 자들은 지배하지 않는 왕인 바보 이반의 곁을 떠납니다. 지배하려는 자는 지배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비굴해지는 자들이 영리한 자들입니다. 영리한 자들은 존경과 부러움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결코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왕은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고귀한 자입니다. 지배당하지도 지배하지도 않는 자가 팟저입니다.


나: 그렇군요.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팟저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아요.

팟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팟저는 제자리에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니까요.


나: 팟저씨. 지금까지 인터뷰 고마웠습니다.

팟저: 어쩌면 저는 팟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 예?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쓰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다. 가상 인터뷰에 얼마나 많은 가상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가상 인터뷰는 어쩌면 핑계다. 팟저에 대한 이해 부족을 가상이라는 말로 감추려는 음모일지도 모른다. 분명 나의 흑심이 있다. 가상이라는 단어를 통해 잘못된 추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음과 동시에 이해 부족이라는 부담을 조금 덜고 싶다는 흑심. 그만큼 팟저는 어려운 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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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주중에는 충북음성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학원 선생.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