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6월 레터] 여름에 본 영화


여름에 본 영화

 

6월 중 열흘가량 열린 상하이국제영화제에 가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상하이 곳곳 수십 군데의 극장에서 여러 국가에서 온, 신인부터 중견 감독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만든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저는 총 네 곳의 극장에서 <기능하지 못하는 고양이> <XOXO카프카> <낸시> <라스트 홀드!> <이누야시키><미지와의 조우> 4K 리마스터링 이렇게 여섯 편을 보았어요. 직접 예매하기도 하고 현장에서 표를 사기도 하고, 친구가 예매했다가 가지 못하게 되어 넘겨준 표를 받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여성 감독의 신작 세 편, 일본 영화 두 편, 기존작 리마스터링 상영 한 편을 보게 되었지요.

 

<기능하지 못하는 고양이>는 전통적인 형식의 중매결혼으로 인해 독일로 이주하게 된 이란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영화는 언어의 장벽, 문화의 차이, (가깝고 먼) 관계의 부재로 인해 흔들리고 충돌하는 인물을 가까이서 보여줍니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처음으로 수영장에 가고, 디스코장에 가고, 서툰 독일어를 연습하는 주인공 미나를 따라갑니다. 남성 캐릭터 역시 명확한 성격을 부여받기 때문에 그 입장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갈등의 순간 남성 캐릭터의 입장에서 상황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일 수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XOXO카프카>는 카프카의 <변신> 공연을 준비하던 중 그레고르 잠자 역을 맡은 배우에게 일어난 사건과 그를 추적하는 극단 동료의 이야기가 덩굴처럼 엉켜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모든 장면이 이 극단 동료 여성 '펑리(펑리수 할 때의 바로 그, 파인애플)'의 목소리로 서술된다는 점입니다. 플래시백이라지만 거의 동시 또는 아주 가까운 미래를 술회하는 펑리의 목소리는 이야기의 핵을 두 명의 여자 캐릭터로 옮겨 놓습니다. 핵심 사건의 주체도, 두 명의 여자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대상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은 남성이기 때문에 벡델 테스트는 통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남성 캐릭터를 주인공이라고 말하기란 어렵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두 여자이기 때문에요.

 

<낸시>는 자신의 출생에 비밀이 있다고 추측하고 친부모(로 추정되는 이들)를 찾아가는 '낸시'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든 연극이든, 서사가 있는 작품을 볼 때 열린 결말이나 공개되지 않은 디테일을 두고 '정해두지 않았다, 관객의 판단에 맡긴다'고 말하는 게 썩 좋은 답변이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관객한테 알려주지 않을 수는 있어도 본인은 확신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하지 않겠나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낸시>는 독특한데, 열린 결말임에도 애초에 감독의 의도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마저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서도 그것이 아쉽거나 황당한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하다'는 느낌을 주어버리는 겁니다. 장면과 장면 틈새에 심어둔 감정으로 그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 마지막 장면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니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스트 홀드>는 대학교 암벽등반 동아리의 오합지졸 신입부원들과 암벽등반을 인생에 비유하는 동아리 회장의 우정과 성장을 다룬 청춘코미디로, 실은 이런 이야기는 상상 가능하더라도 언제나 재미있기 마련이라 주로 부천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를 상영하면 꼭 가서 보고는 했습니다. 개중에서도 <라스트 홀드>는 희한하리만치 '주인공'에게 집중하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만들어내는 이입의 정도와 속도감을 무시할 수 없을 테고 그래서 저 또한 신나게 보기는 했습니다만, 이 주인공들의 세계에 여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이할 정도였습니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주요 등장인물의 전 여자친구 단 한 명이 이름을 갖고 잠시 언급될 뿐입니다. 쟈니즈 소속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그만큼 각자 다른 매력과 특징을 가진 남자 캐릭터들에 몰두하면서 아예 여자가 부재하는 세계를 만들어 버립니다. 이 상상 속의 '소년' 세계에서 값진 감정은 모두 남성집단 사이에서만 공유될 뿐이고, 이름이나마 붙여진 단 한 명의 여자 캐릭터는 등장인물이 '뺏긴' 옛 여자친구지만 그가 '진정한 즐거움'을 알게 되자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존재로 묘사될 뿐입니다. 웃으며 영화를 보고 나와서 걷는 길에 곰곰, 앞으로도 내가 이런 영화를 보면서 전처럼 웃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평범한 중년 남성이 놀라운 우연으로 기계인간으로 개조당해 벌어지는 이야기 <이누야시키>는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이입하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이유로 '코너에 몰린 중년 남성 가장'의 이미지를 사용하며 시작합니다. 이 역시 너무 손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작 만화에서는 '선함'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캐릭터를 프리즘 삼아 악한 것, 옳은 것, 공정한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여기서는 신이 되고 싶어하는 자와 그를 막는 자라는 구도에 중점을 두고, 나머지 인물들은 원작보다 훨씬 무력하고 옅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특히 두 명의 핵심적인 여자 캐릭터는 완전히 무능해지고 말았습니다. 긴 원작이 있을 때 윤색 과정에서 선택과 집중은 피치 못할 일이겠지만, 긴 이야기를 짧게 만들 때 가장 먼저 생략하거나 축소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유심히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어요.

<미지와의 조우>를 보면서는 내내 '보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놀랍게 끌리는 무언가를 맞닥뜨린, 그래서 그걸 계속 보고 싶고, 추적하고 싶고, 그냥 흘긋이나 대강이 아니라 아주 자세히 관찰하고 싶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은 영화를 향한 마음과도 너무 닮은 것만 같아서, 이 영화가 막 개봉했을 때 처음 보았을 사람들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힌 사람이 해내는 재현과 탐색이란 무엇인지요. <미지와의 조우>라는 제목이 참 멋지다고도 생각했습니다. '미지'라는 단어도 '조우'라는 단어도 정말 근사합니다. 번역된 제목에서 멋을 느끼는 것도 즐겁지요.


 


이러쿵저러쿵해도 영화는 모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가장 아쉬운 건 '여기가 축제'라는 걸 보여주는 표지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상영작을 본 극장에서 특별히 영화제 프로그램북이나 기념품 등을 찾아볼 수 없어 상영 전 트레일러에 등장하는 대광명극장에 가보았습니다. 포토월과 상영작 포스터를 부착한 가벽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외에 영화제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을 마주치거나 영화제 부스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개막식이 열린 상하이대극장에도 가 보았지만 시상식 리허설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요. 가보지 못한 극장 여러 곳에 접하지 못한 축제의 흔적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입니다. 새로운 영화를 보고 같은 것을 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신이 나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왠지 '축제 같지 않다'는 시무룩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축제를 축제로 만드는 건 뭘까 생각했습니다. 무슨무슨 축제라고 이름 붙은 행사는 점점 많아져만 가는데, 축제가 뭔지는 자꾸만 헷갈려요. '뭐든 축제가 될 수 있다!' 같은 말은, 사실이기야 하겠지만 하나마나한 소리 아니겠어요.

 

7월에는 더 먼 데까지 다른 영화제를 보러 가려고 합니다. 영화제의 공식 SNS에 올라오는 자원활동가들의 사전 감상을 들여다보면서 궁금증을 키우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어떤 기분을 느끼고 오게 될지 궁금합니다. 여름 바깥의 세계로 사람을 데려가는 영화 때문에 여름이 기다려진다는 것, 웃기지만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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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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