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극장은 불타고 있다 #해외편

2019. 3. 6. 07:22Feature

[기획연재] 극장은 불타고 있다 #해외편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을 겁니다


글_박다솔

 

지난 달, 내가 사는 곳에서는 유명 안무가 얀 파브르(Jan Fabre)의 공연 <Attends, attends, attends>이 있었다. 나는 이 공연을 세 달도 더 전에 예매를 할 정도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결국 보러가지 않았다. 작년 말, 얀 파브르와 함께 작업을 해온 스무 명 남짓의 남녀 무용수들이 그를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하며 고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성관계 제안을 수락한 무용수들에게 솔로 공연이나 공연의 주역을 맡기는 등 댓가성 성폭력을 행사해 왔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얀 파브르의 공연을 보러 갈 수는 없었다. 성폭력 가해자인 예술가의 작품을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예술을 지속할 권리와 타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공연은 취소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현재 자신을 향한 고발을 전면 부인하는 중이다. 

BalanceTonPorc_가해자를고발하라_Nouvel Obs


201710월 미국 영화계에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을 고발하는 #MeToo 운동이 시작된 이후, 프랑스에서도 #MeToo와 함께 #BalanceTonPorc(가해자를 고발하라)는 구호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프랑스에서는 가장 먼저 영화계가 반응했다. 프랑스 배우 레아 세이두와 엠마 드 콘이 자신들도 하비 와인스타인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했음을 고백했고, 플로랑스 다렐은 프랑스 영화감독 자크 도르프만에게 성희롱을 당한 바 있다고 밝혔다. 작년, 프랑스 최대 영화축제인 세자르영화제와 칸느영화제에서는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퍼포먼스와 발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에 분노하는 목소리는 곧 이들이 가진 거대한 권력이 정당한 방식으로 취해진 것인지에 대해 묻기 시작했고, 권력이 분배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의도적 혹은 잠재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문화체육부가 2016년에 발표한 프랑스 문화체육부문 남녀평등조사(*)에 따르면, 세자르영화제에서 여성감독이 최고작품상의 후보에 오른 적은 단 2%(2010년부터 2015년 사이)에 불과하며, 칸느영화제의 최고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은 2000년부터 2015년까지 단 한 번도 여성에게 부여된 적이 없다. ‘권위적인’, ‘최고의’, ‘세계적인같은 수식어를 동반하는 상들의 주인은 대체로 남성들이었다. ‘인정은 곧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은 점차 더 큰 권력을 갖기 마련이다. 프랑스의 최대 연극상인 몰리에르상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통계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최고작품상의 후보에 오른 총 29명의 연출가 중 여성은 단 2명뿐이다. 

▲시상식 장면_블랑쉬 가르댕 Blanche Gardin


그러나 작년, 몰리에르상에서 아주 이례적인 수상이 있었다. 몰리에르 희극상이 몰리에르상 설립(1987) 이후 최초로 여성 희극인에게 돌아간 것이다. 이 상을 수상한 배우 블랑쉬 가르댕(Blanche Gardin)은 전년도의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2018년 몰리에르 희극상이 이를 의식해 흑인, 아랍인, 유럽인, 여자를 후보로 지목한 것을 빗대어 몰리에르 긍정적 차별과 희극상이라 풍자했다. 그녀는 수상 소감에서도 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젠장, 저는 알고 있었어요, 제가 이 상을 받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니까요? 당연하죠, 저는 하비 와인스타인의 해에 희극상에 노미네이트된 유일한 여자니까요! 이게 제가 살아온 얘기죠. 상을 받았지만, 이건 아무 가치가 없어요.” 사람들은 웃었고, 그녀도 이내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이것이 농담만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하비 와인스타인의 사건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차별에 대해 분노를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이 영예로운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그녀의 재능에 대한 의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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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프랑스의 극작가·작곡가협회(SACD)(**)여성은 어디에 있는가? - 어느 곳에도 없다!라는 책자를 배포했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공연예술계 각 부문(공연예술 전공자, 공공극장 예술감독 임명, 공공극장 프로그램 구성 등)에서 집계된 남녀 성비만을 표기한 책자이다. 이 책자에 따르면, 공연 예술 전공자는 여성이 52%로 과반이 넘지만 공연예술의 그 어떤 항목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최대 40%를 넘지 않으며, 평균적으로는 25% 정도만을 차지하고 있다. 이 협회는 자신들이 2012년부터 매년 이 수치를 조사해 왔으나, 5년이 흐른 지금에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회의적으로 언급했다. 마크롱 정부가 사회의 성불평등 타파를 위한 대대적인 개혁이 있을 것이라 예고하고 여러 정책들을 시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예술계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공공극장의 프로그램 : 남녀 성별 비율


미투운동이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고도 프랑스 공연예술계에서는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나 변화가 발견되지 않았었지만, 작년 아비뇽 페스티벌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축제의 예술감독 올리비에 피(Olivier Py)가 축제의 중심 테마를 젠더로 결정하면서 젠더 이슈와 관련된 다양한 작품들을 대거 초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페미니즘을 비롯해 LGBTQI 등 다양한 젠더이슈 뿐만 아니라 인종, 종교, 장애 등 다양성을 인정받지 못해 발생되었던 차별이나 불평등에도 주목했다.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난민, 무슬림, 장애 등의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예술가들이 무대에 올랐고, 그에 관한 이야기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와 아비뇽 전체를 뒤덮었다. 이후, 프랑스 공연예술계의 관심 주제는 이러한 다양성다양성에서 비롯된 차별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주 미묘하게, ‘여성의 이야기가 다시 다른이야기들 뒤편으로 숨겨지는 느낌이었다. 

몰리에르 희극상을 받은 블랑쉬 가르댕은 지난 달 초 <여자, 남자가 된다는 것(Etre une femme/un homme)>이란 주제로 짧은 스탠드업 공연을 올렸다. 공연은 이런 대사로 시작된다. , 이 직업 그만두려고요.”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요즘에,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과 다양성을 변호하기 위해서 엄청난 이야기들을 무대 위에 올리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저는 게이나 트랜스젠더가 아니고,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만도 아니고, 다자연애를 하지도 않고, 흑인도 아니고, 심지어, 유대인도 아니거든요.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그냥 41살의 백인 이성애자 여자에요. 어떤 특별한 정체성이 아니라, 그냥, 여자라고요.” 그녀는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지에 대해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또한 모순적이게도 그러한 이유로 여성의 이야기가 다른 특별한이야기들 뒤로 가려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 보편적 존재에 가해지는 다양한 차별들을 풍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신사숙녀그리고 세계의 남은 사람들(Mesdames, messieurs, et le reste du monde)>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와서, 이러한 불편함을 느낀 것은 블랑쉬 가르댕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작년 아비뇽 페스티벌의 공식초청작 중 가장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다름 아닌 무료 렉쳐 공연 <신사, 숙녀, 그리고 세계의 남은 사람들(Mesdames, messieurs, et le reste du monde)>이라는 작품이었다. 연출가 다비드 보베(David Bobée)는 젠더, 인종, -포비아(호모포비아, 제노포비아 등), 종교, 신체의 자유, 다양성 등을 주제로 총 12개의 에피소드를 매일 하나씩 차례로 무대에 올렸다. 그 중, 여섯 번째 에피소드인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없는 첫 번째 몰리에르상(Première Cérémonie des Molières non- raciste et non-genrée)>에 출연한 카롤 티보(Carole Thibaut)는 프랑스 공연예술계에, 몰리에르상에, 그리고 아비뇽 페스티벌에 여성 예술가가 부재하는 상황에 대해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는 수년째 백인에게만 상을 수상하고 있는 몰리에르상을 풍자할 목적으로 기획됐다. 이 가상의 시상식에서 드랙퀸, 아랍어권 배우, 트랜스젠더, 흑인, 동성애자, 그리고 여자가 수상자로 선정되고, 이들이 수상 소감을 밝히는 것으로 상황극이 이어진다. 그 중 여자를 맡은 카롤 티보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 가상의 시상식은 한낮의 소극에 가까웠다. 그녀의 등장으로 소극은 끝이 나고, 자비 없이 잔인한 현실을 비추는 비극이 시작된다. 

카롤 티보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가짜 몰리에르상을 거부했다. 그녀는, 이 가상의 몰리에르상이 위선으로 가득 찬 한낱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이 소극이 자신에겐 더 이상 희극일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 사자후를 토해냈다. 이 시대에 여성 예술가들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여성들이 정당한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는지, 평등을 외치는 이런 축제에서 마저도 왜 여성을 찾아보기 힘든 것인지, 어째서 공공 지원금은 남성 예술가들에게 더 많이 지원되고 있는지 등, 그녀는 자신이 초대받은 이 자리가 얼마나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가감 없이 비난한다. 그리고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얼마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질수록, 드높아질수록, 극과 현실의 세계가 모호해졌고, 종국에는 우리 모두 그녀의 현실 안으로 들어가 있게 되었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의 카롤티보 Carole Thibaut


카롤 티보의 (가상) 몰리에르 시상식 소감을 번역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려 한다. 그녀는 긴 연설을 마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을 겁니다." 우는 아이 달래듯이 만들어진 몇몇 제도나 법안은 효력 없는 글자로만 남게 되었고, 몇몇 사람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랑스러워 한다. 티보는, 더 이상 이 무능한 것들을 믿지 않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녀는 단상에 올라 온 몸에 힘을 주며, 격앙된 목소리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낱낱이 고발한다. 그녀가 말하는 현실이, 단지 그녀만의 현실이거나 프랑스만의 현실이 아님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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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것이 이제는 지겹습니다.

- 카롤 티보(Carole Thibaut)

 제게 몰리에르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도, 이 상이 제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몰리에르상일 겁니다. 재능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재능과 관련된 것은 없습니다. 웃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어 애석하군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종종 사람들이 제게 기대하는 것들 중 하나죠. 사람들은 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녀는 웃겨. 티보는 쉽게 흥분하고, 남녀평등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몇몇 사람들을 박살내버리긴 하지만, 그래도 재밌잖아. 그녀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짓궂은 농담을 하면서 사람들을 자극시켜. 잘 차려 입고, 예의 바른 태도로." 우리는 빠르게 광대 역할에 빠져 듭니다. 왕의 어릿광대. 여기서 말하는 왕이란 다른 곳에서처럼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뜻합니다. 남성중심사회, 이런 종류의 왕은 이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그 역할을 제법 잘해왔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왕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것이 이제는 지겹습니다.

 2년 전, 저는 토마 졸리(Thomas Jolly)(***)의 초대로 아비뇽 페스티벌의 무대에 섰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비뇽의 정원에, 커다란 정원에 세워진 극장, 바로 교황청 안마당의 무대에 섰었습니다. 아비뇽 교황청 안마당은 이 몰리에르 상과도 같습니다. 만약 당신이 여성 예술가라면, 창작 작업을 하는 수많은 여성들 중 한 사람이라면, 이를테면 여성 연출가이거나 여성 기획자라고 할 때, 당신도 잘 알다시피, 교황청 안마당이나 몰리에르 상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교황청 안마당 무대나 몰리에르 시상식에 오르는 젊은 여성 창작자의 자리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젊은 층의 관객이라면, 당신이 있는 그곳이야말로 훌륭한 여성 창작자들을 위한 전용 공간이라 할 수 있겠죠.

 2년 전, 그때 저는 이곳에서, 아비뇽 축제의 공식초청작에 여성작가가 부재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하는 텍스트로 거센 발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올해, 2년 전 저를 이곳에 초대했던 토마는 교황청 안마당에서 연기를 하고 있고, 저는, 이번에는 다비드 보베(David Bobée)(****)의 초대를 받아 다시 한 번 이곳의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 앞에서 여성 창작자들이 오늘날 처한 상황에 대해 재미있고 유쾌하게 비난하려 하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2년 전, 저는 아비뇽 축제 설립 이후 공식 프로그램에서의 여성 창작자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논쟁적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것이 변화할 거란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제 특유의 익살스런 태도로 이곳에 섰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척 즐거워했고, 관객들은 떠들썩했던 축제가 끝나자 제각각 자신의 짐을 들곤 자리를 떠났습니다.

 올해, 2년이 흐른 지금, 아비뇽 축제는, 두 편의 아동청소년극을 제외하고, 9%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과 91%의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공식초청작으로 선정했습니다. 올해 축제의 연극 작품들 중 남성 작가 및 연출가의 작품은 89.4%를 차지하고, 여성 작가 및 연출가의 작품은 10.6%에 불과합니다. 축제 공식 프로그램 중 여성 창작자의 비율은 총 25.4%로 확인 되었습니다. 30분짜리의 짧은 공연을 올리는 무대인 Sujet à Vif를 포함시켰는데도 수치에 전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낭독 공연을 제외하고, 정식 공연들만을 이야기하자면, 올해 아비뇽 축제는 전체 프로그램 중 여성 창작자가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비율로 프로그래밍 되었습니다. 축제 프로그램북만 살펴보더라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난 아침, 이 수치를 계산하면서 프로그램북을 한 번, 두 번, 세 번 거듭 들여다봐야만 했습니다. 이 절망적인 수치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곧, 나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디서든 목소리를 높여왔던 제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계략과 파렴치한 것들과 굴욕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오랜 세월동안 눈이 가려진채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 사실들이 처참하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비뇽 페스티벌(in)의 프로그램북을 앞에 두고 우는 것은, 상당히 수치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여기, 지상 최대의 연극축제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방금 막 이 큰 돌덩어리를 받았습니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즐거움과 명랑함을 갖춰 이 무대에 올라야 했겠지만, 올해, 나는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나를 이곳에 초대한 다비드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젠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열광적인 축제에서 분노를 웃음으로 잘 감춘 예의바른 어릿광대 노릇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했을 몇몇 기자들은 이번 축제를 '페미니스트 축제'라고도 명명했습니다. 완전히 최악이라곤 할 수 없죠. 지금 당장 액상프로방스의 음악 축제를 둘러보기만 하더라도, 음악 분야와 비교했을 때, 연극은 거의 영구적인 여성주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올해, 나는 나의 모든 이성 친구들, 그러니까, 여자 친구들이 많은 남자들이나, 젠더에 대해 묻는 남자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원하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남자들을 위해 친절한 여자 친구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침묵하거나 발언권을 빼앗긴 다수의 여성들이 캄캄한 방 안으로 들어가 앉아 그곳에서 정숙하게, 대부분 백인 남성들에 의해서 정립되고 그려진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지독한 싫증을 느낍니다.

 물론, 인터섹스의 투쟁에 동의합니다.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에 동의합니다.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너무나 어리석고 형편없는 이원론에 반대하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어째서 이 모든 투쟁들이 수세기 동안 남녀평등을 위해 맞서 싸워온 여성들의 투쟁을 빼앗고 무효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도대체 어떻게, 이 투쟁이 다른 투쟁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겁니까? 여성들은 프랑스혁명 때에도, 코뮌시대에도, 인민전선 기간 동안에도, 심지어는 68혁명 때에도 내내 이용당했고, 2018년인 지금, 이곳, 아비뇽 페스티벌마저도 여전히 여성들을 엿 먹이고 있습니다. 이 대단한 축제가 올해 '그리고, 젠더'라는 테마를 주장하고 있는 와중에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된 프로그램들 중 하나엔 이런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공연예술계의 여성들 : 우리는 이 엄청난 자리교체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극우파에 의해서 현재도 꾸준히 전개되고 있는 이 제노포비아같은 컨셉을 굳이 비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바로 우리를 수세기, 수십 년, 수개월에 거쳐 망쳐놓았습니다. 단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나의 몸 구석구석에, 내 머릿속 가장 어둡고 깊숙한 곳에, 우리의 무의식과 잠재의식 안에 깊게 새겨져 우리의 모든 삶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숫자나 통계수치가 아닙니다. 우리가 당해온 굴욕과 직면하고, 백주대낮에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뻔뻔하게 우리를 배제하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시스템과 마주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숫자들을 분석해야만 합니다. 이 숫자들을 통해 현실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또렷이 이해해야만 합니다. 강간당한 뒤 이른 아침에 눈을 떠 자신이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것을 위대한 사랑과 만남이라 믿어왔던 불쌍한 소녀처럼, 바보천치처럼 우는 것을 멈춰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감독인 올리비에 피(Olivier Py)에게 이 돌덩어리나 자갈을 던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오늘날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것일 테고, 그는 지금 끓어오르는 의자 위에 앉아 자신이 만들어낸 열기를 바라보고 있겠죠. 여성들의 세력 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성직자들이 여자들을 불태워 죽이는 일은 예전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단지 이 프로그램만을 문제 삼아 축제의 예술감독을 단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이들의 수치가 국가 평균에서 아주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공공 보조금 전체 예산에서 여성 예술가에게 할당되는 지원금은 단 23%에 불과하고, 특히 무대예술 분야에서는 여성 예술가의 작품 11%만이 무대에 올라 상영됩니다. 이 중 4%에서 12%만이 이 돌덩어리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 몰리에르 상이요. 이건 제가 조사한 정보가 아니라, 정부 스스로 남녀평등에 관해 시행한 조사에서 나타난 수치이고, 이 통계수치들은 HCE 사이트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공연예술계에서 여성 작가는 전체의 약 22%, 남성 연출가는 약 35%(*****)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평등과는 먼 수치라고 확신하지만, 우리가 조금씩 노력하고 있단 것만은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 아비뇽 페스티벌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 , 우리는 이렇게 큰소리로 의견을 낼 수도 있고, 남자나 여자 혹은 그 무리에 섞여 그저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자유도 필요하겠죠. 확실한 건, 당신이 여자의 성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 그게 자연의 제비뽑기에 의해서든(젠장, 운이 없게도, 당신은 질을 가지고 태어났군요) 혹은 선택에 의해서 여자가 되었든지 간에,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강간당하고, 착취당하는 카스트 제도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성별을 부여받는다는 것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육체적 결정론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남성의 음경을 받느냐 혹은 여성의 질을 받느냐에 따라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인지 혹은 지배를 당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는 남근중심주의와 가부장제 같은 작은 왕들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양이 넘치는 사회는 자신들의 개방성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고, 소위 말하는 창작/표현/선택의 자유라 불리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과, 자신들이 전 세계에 교훈을 전하는 위치에 있음에 잔뜩 심취해 있죠.

 남근중심주의와 남성우월사상은 이 나라의 모든 예술적, 문화적, 지적인 것들에겐 치욕과도 같습니다. 이 나라에서, 공공자금의 재분배를 존중하지 않는 모든 기관과 고압적인 태도로 우리를 단지 무대에 올리고 끊임없이 작품을 생산시키기만 하는 장소들, 미술관, 축제의 예술 감독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명예롭지 못한 것입니다. 남성에 의해 일어나는 여성 억압과 인류애적 사고에 반하는 최초의 죄악은 매년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수천 년 동안 모든 곳에서 지속되어온 범죄이고, 유감스럽게도, 신성한 공간인 극장에서마저도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상징하는 이 성스러운 공간에서 말입니다.

 다비드, 나는 이 상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건 상스러운 것들로 가득 찬 커다란 돌덩어리와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통계의 숫자들 외에, 이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굴욕감을 느끼며 울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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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프랑스 문화체육부문 남녀평등조사Observatoire de l'égalité entre femmes et hommes dans la culture et la communication프랑스문화체육부 발행, 2016. 

** Où sont les femmes ? TOUJOURS PAS LA !, 2012-2017년 통계, 극작가·작곡가협회(Société des Auteurs et Compositeurs Dramatiques) 발행.  

***토마 졸리(Thomas Jolly)는 프랑스 태생의 82년생 남성 배우이자 연출가이다. 2018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연극 <티에스테스>를 교황청 안마당에서 공연을 올렸다. 이 공연에서 토마 졸리는 배우와 연출을 겸했다

****다비드 보베(David Bobée)는 프랑스 태생의 78년생 남성 예술가로, 작가, 연극 연출, 무대 디자인, 영화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현재 노르망디 루앙 국립 드라마 센터의 예술감독이며, 2018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젠더이슈에 관한 각기 다른 열 두 개의 에피소드를 매일 정오에 공연하는 연극 연속극 <신사, 숙녀, 그리고 세계의 남은 사람들>의 연출을 맡았다.

***** HCE(Haut Conseil à l'Egalité entre les femmes et les hommes)는 남녀평등에 관한 법률 및 자문을 담당하는 프랑스 국가고등자문회의의 축약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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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자료 인용 출처) 


본문,  여성은 어디에 있는가? - 어느 곳에도 없다!」 /// https://cultureveille.fr/femmes-culture-bilan-sacd 


 

 필자_박다솔

 소개_공연예술에 관한 다양한 글을 씁니다무거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에서는 20185월부터 "극장은 불타고 있다" 는 타이틀 아래, 공연예술 장르와 개별 작품에서 나타나는 성폭력 및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미투(metoo)운동으로 불거진 공연예술계의 한계와 문제점들에 대해 인디언밥은 지속적으로 논의할 예정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극장은, 거리는, 광장은 불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