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28. 02:53ㆍReview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overtones, 당신은 어때?>
산다는 건 선택의 연속, 이라고들 말한다. 살고 있다면 누구나 체감하는 말이다. 오늘 하루 만도 얼마나 많은 선택을 했는가. 인생의 방향이 걸린 선택에서부터 사소하게는 지하철을 타고 갈지 버스를 타고 갈지 하는 문제까지. 나 역시 방금 ‘사소한 문제의 예’로 식사 정하는 일을 쓸까 교통수단 이용하는 것을 쓸까 고민했다. 물론 글이야 쓰고 지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다만.
여하튼 일상을 잘게 부순다면 선택 아닌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다보면 누구나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선택의 문제를 맞는다. 밥 먹는 일이야 잠깐 후회하고 말지만 내가 어떤 직업을 선택 하느냐는 몇 배나 더 강하고 오래 지속될 후회를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선택 앞에서 나는 어떤가. 먼저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큰 고민 없이 끌리는 대로 선택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믿기 위해 더 노력한다. 섣부르다고도 하지만 나는 ‘끌리는 것’에 이미 내가 충분히 들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체득된 내 감각, 시각, 직관을 믿고 끌리는 걸 선택해버린다. 아무리 짧은 고민 후의 선택에도 ‘내’가 충분히 들어가 있으니까.
아. 누가 그걸 몰라서 머리 아프게 고민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안다.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있다는 걸. 선택은 항상 현실(그래그거, 우리모두다아는현실)을 고려하면서 해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하나 더 말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건 어떻게든 후회할 거라는 사실. 위로해보자면, 다만 덜 후회할 수 있는 선택만 할 수 있을 뿐. 특히 ‘지금 여기의 나’가 덜 후회할 선택을 할 수 있을 뿐. 덜 후회한다는 것도 ‘겨우’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거다. 어쨌든 어떻게든 후회할 거라는 이런 믿음이 나를 더 ‘하고싶은걸’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오히려 재고 따지지 않도록 하니 말이다.
내 얘기가 너무 길어졌지만, 어쨌든 이 모두는 연극 <overtones, 당신은 어때?>을 보며 든 생각이다. <overtones, 당신은 어때?>엔 두 주인공 헤리엇과 마가렛이 나온다. 둘은 결혼 문제 앞에서 각자 어떤 선택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둘이 다시 만난다. 하지만 지금 그녀들의 마음 상태는 엉망이다. 예전에 자신들이 선택하면서 묻어버린 또 다른 욕망이 이제야 자신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헤리엇과 마가렛이 고민하는 문제는 선명하다. 한 명은 돈을 선택했고 한 명은 사랑을 선택했다. 도덕적인 가치의 도식에 따라 본다면? 돈보다 사랑.
하지만 연극에서는 이들이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인물에게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냐 돈이냐가 중요하진 않다는 거다. 헤리엇은 돈을 선택해서 결혼했지만 아직 옛사랑을 잊지 못 한다. 그 옛사랑과 결혼한 마가렛은 사랑을 선택했지만 그 남편은 지금 폐인이 된 상태다. 만약 둘이 결혼 당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이런 불행한 마음상태를 맞지 않았을까? 물론 아니라고 본다. 누구나 칭얼대는 자아 하나쯤은 마음속에 안고 살지 않는가. 누구는 달래지 못해 쩔쩔매고 또 누구는 그냥 모른척하고 생활하면서.
이 연극은 내게 경고나 충고가 아닌 공감과 이해를 준다. 두 여자가 후회하면서 새 삶을 시작하는 모습이 아니라, 겨우 불행을 감추며 살던 각자가 어떤 계기로 불안이 팍 하고 터지는 순간만을 포착해서 드러낸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이 연극은 뭔가 시작할 듯 하면서 끝이 나지만 그게 결코 미적지근하거나 찜찜함을 주진 않는다.
돈이 아닌 사랑이란 선택에 박수를 주는 게 아니라 좀 더 업그레이드된 주제로 따지자면, 외면한 욕망과 마주하고 새 삶을 시작한다든가 하는 교훈 같은 거 말고, 어떤 선택이든 후회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는 거, 그걸 말하는 것 같다. 누구나 사랑받지 못해 칭얼거리는 자아 하나쯤은 마음 안에 품고 산다.
무엇보다 난 짧은 런닝타임에 인간 보편에 대한 이해를 반짝하고 드러낸 것이 좋았다. 어쩌면 너무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구체적인 두 인물의 문제를 일반로 만들어 공감을 이끌어냈다. 분명 무대 위에 구체적인 캐릭터가 서 있는데도 그 인물이 살아있으면서 또 지워져서는 내가 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게 성공한 것은 미니멀한 연출장치도 한 몫 한 것 같다.
원래대로라면 마가렛과 그녀의 자아 셋, 헤리엇과 그녀의 자아 셋, 해서 8명 배우가 연기해야한다. 하지만 4명이 모두 처리한다. 헤리엇의 또 다른 자아들 중 한 명이 마가렛 역의 배우이고 마가렛의 또 다른 자아 중 한 명은 헤리엇이다. 물론 아무래도 추측하건데 인원부족이었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겹치기 역할을 맡는 건 마가렛과 헤리엇이 결코 분리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효과를 준다. 둘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르게 살았지만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난다. 비록 둘은 서로를 미워하고 있지만 이미 같은 아픔을 가진 자들이다. 둘이 결코 다른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또 둘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연출을 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눈에 띄었던 것은 ‘유치’한 장치다. 유치하다는 말에 갇히지 말자. 난 오히려 이 점이 연극의 재미였다고 본다. 진지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말 안 듣는 자아를 불러내서 토끼뜀을 시킨다거나 마가렛과 헤리엇의 기 싸움을 보석 튕기기로 표현한다든가 마가렛과 헤리엇의 자아들이 분무기로 쏘고 신문지를 구겨 집어 던지며 싸우는 장면 말이다. 풋, 하고 웃음 나오는 유치한 장면인데 그게 되려 직설적이고 복잡하지 않아서 좋다. 진지한 주인공들의 태도와 유치한 싸움이 서로 미끄러지면서 우리 생의 문제들을 지나치게 무겁지 않도록 만들어 주기도 한다.
연극은 끝난다. 이제야 본론이 시작될 듯 하면서 그냥 끝나버린다. 마가렛과 헤리엇이 이제 진짜 대판 싸울 듯한 기세를 취한 자세를 한 상태에서. 그런데 말이다. 앞으로 둘이 실컷 싸우기야 하겠지만 그 이후에 둘은 짠하게 친구가 될 것만 같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overtones(연극에서, 대사나 해설을 할 때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뒤쪽에서 들려주는 음악이나 음향)가 들린다. “당신은 어때?” 물론 괜찮기도 하고 괜찮지 않기도 하지. 대학 졸업반인 나는 취업은 제치고 우연찮게 나에게 생긴 기회를 좇으려 한다. 선택은 했는데 사실 확신은 없다. 분명 난 어떤 다른 욕망을 억압하면서 이 선택을 한 거니까.
그 수가 얼마나 될 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나 말이다. 어떤 자아는 웅크리고 울고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자아는 빠득빠득 나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일 텐데 내가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대 위 헤리엇과 마가렛처럼 어느 날 불현 듯 내 또 다른 욕망이 나를 괴롭힐 것이다. 아마 먹고 사는 게 힘들어지면 지금 내 선택을 후회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미리 마음먹고 나면 또 편해지는 게 마음이니 가볍다 싶지만 이게 세상사는 법 아니겠나 싶다.
연극 45min 8.15(토)-16(일) 17:00 소극장 예
원작 Alice Gerstenberg | 연출 문미영
헤리엇은 오래 전 친구였던 마가렛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마가렛이 오기 전 또 다른 자신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헤리엇에게 자신이 진짜이고, 헤리엇은 껍질에 불과하며, 죤과 결혼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감을 헤리엇에게 퍼붓는다. 반면 마가렛과 또 다른 그녀 메기는 현실의 고단함과 죤과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헤리엇에게 찾아가게 되는데….
2001년 창단된 극단 청맥은 당시 뮤지컬과 코미디가 주종을 이루고 있던 한국연극현실을 비판하고 정극의 중요성을 외치며 한국연극 발전에 작은 힘이 되기 위해 모였다.
http://club.cyworld.com/overt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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