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9. 16:21ㆍReview
철없는 예술, 철든 예술 (2)
캉캉거리며 바삐 돌아가는 공장 기계
흥얼흥얼 취기 오른 아저씨의 몸짓
어슬렁어슬렁 골목을 누비는 고양이
문래동에서 만난 예술에는 동네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경계를 넘어 서로 어우러진 공간에서 두 번째 리뷰, 시작! (너무 오래 묵혔다는...죄송합니다.)
덜 추웠다. 개막식 때 폭풍기운 담고 있던 찬바람이, 두 번째 찾아간 날에는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해가 짧아진 요즘, 금세 어둠에 물드는 저녁의 문래동 철공장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 3회 물레아트페스티벌’ 공연 전 모습은 묘한 잿빛을 띄고 있다. 낯이 익는 이부터 동네 주민 포스의, 외람되지만 이 축제와 연결고리를 찾기 힘든 아저씨까지. 7PM(?), 마법에 걸릴 문래동 철공장 거리에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즐길 거리 많은 프라이데잇 나잇! 이 음습한 철공장 거리에 몰려 온 관객들을 존경합니다.)
그래도 어딘지 휑하고 쓸쓸한 공간을 따스하게 채우는 연결고리가 있다면 단연 이 사람을 꼽겠다. 물레아트페스티벌 사회자님. 어딘지 어눌한 느낌이지만 참으로 웃음 가득한 얼굴과 멘트로 안내하였다. ‘아름다운 몸짓’이라는 황홀한 표현으로 아티스트와 관객을 이끄는 그를 감히 축제의 명물이라 말하고 싶다.
Et Aussi Dance (에오시 무용단)의 “QUATRO ”
10월 23일 금요일 공연은 특별기획 <한·일 우정의 예술 교류>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첫 작품은 개막제 때 온앤오프무용단이 선보였던 공간에서 이뤄졌다. 다국적 팀으로 구성된 에오시 무용단의 작품 ‘Quatro'. (인터넷 검색하니 포르투갈어로 숫자 4를 의미한다고 한다.) 멀리서 소타고 피리 부는 아이, 아니 봉고차 타고 반도네온 연주자 키미요 오가와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플라멩코 스타일 물씬 풍기는 이국의 여성 무용수 등장. 그리고 태극권 동작을 취하는 듯한 남자 무용수 등장. 그리고 소리 나는 모든 것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즉흥 연주가 등장. 그들은 계속 ’증식‘했다. 1,2,3,4. 아, 그래서 작품명이 'Quatro'인 것일까?
기묘한 새소리와 함께 듀엣으로 추는 두 무용수의 춤사위는 무언가를 찾아 안에서 밖으로, 주변을 천천히 훑는가 싶다가 격렬해지고, 이내 한국어로 음악가 사토 유키에가 ’고향‘에 관한 노래를 부르자 애틋한 표정과 몸짓으로 끝맺었다. (중간 즈음에 취기 오른 아저씨가 1차원 음주가무와 함께 난입해서 적잖이 놀랐으나, 살며시 끌어내어 양해를 구하기만 할 뿐, 크게 제재하지 않는 스탭들 때문에 더욱 놀랐다.) 아무튼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나는 멍해 있었는데, 그것은 ’정신의 이동‘ 탓이었다. 모두의 ’고향‘으로 통할 어떤 근원적인, 원초적인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간 그런 기분이었다. 약 30분 동안, 철공장 거리는 마음보다 더 깊은 어딘가의 자연의 실루엣에 젖어 있었다. 영혼이었을까.
문재선 (SORO Performance Unit)의 "서쪽 (West Ward)"
몽글몽글해진 마음은 곧 갈기갈기 찢겨졌다. SORO팀의 ‘서쪽’이란 작품이 관객들의 움직이는 퍼포먼스와 함께 다른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한 쌍의 아티스트. 여자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나무판 위에서 기하학적인 몸짓을, 남자는 커다란 철판으로 가장 소름끼치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격렬해질수록, 나무판이 무심히 흩어지고 철판은 끔찍하게 절규했다. 전 공연에서 느꼈던 아늑함은 이내 고속도로에 내팽겨진 채 매우 불안한 야생동물의 심정으로 변해있었다. 철공장의 기계들이 내는 노랫가락처럼 들리는 철판을 붙들고, 남자는 천천히 여자에게로 향했다. 철판을 버리고 그녀의 나무판을 집어 함께 ‘빠져들기’위해. 내리찍고, 흩어지고. 그들이 동화되었음을 암시하듯 커다란 필라멘트 전구에 불이 들어오지만, 희미했다. 그녀를 지나 멀리서 나무판을 들고 한 발로 뛰던 남자의 퍼포먼스가 머리 깊숙이 박혀버렸다. 이 작품에서 서로 다른 타자들의, 그리고 익명성이 따르는 현대(구체적으로는 도시)인들의 불통을 읽어냈는데, 다양하게 해석해보는 게 좋겠다. 빛과 사물, 퍼포먼스와 사운드가 어우러져 짧은 시간을 ‘뒤흔든’ SORO팀. -차갑고, 무겁다.- 철공장 태생의 예술가로 기억하고 싶은 팀.
키미요 오가와의 단독 반도네온 연주가 이어졌다. 그녀의 연주에서는 P파가 보인다. 부드럽게 능선을 그리다가도 어느 순간, 가파른 산을 넘나드는 선율에 그만 나도 모르게 녹음 버튼을 눌렀다. 덕분에 이 리뷰를 쓰면서도 여러 차례 감상 중. (들려 줄 수는 있으나 줄 수는 없음~) 음악계의 ‘산악인’이란 별칭을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키미요 오가와는 선율의 높낮이를 마음대로 조정하며 잘 타는 베테랑이다.
Mushimaru Fujieda의 "부토춤"
그리고, 귀신을 봤다! 또 다시 친근한 사회자를 따라 관객의 ‘움직이는 퍼포먼스’로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인간의 느낌이 사라진 인간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시마루 후지에다. 부토춤의 대가라고 한다. 부토(舞踏)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 전통예술인 '가부키', '노'와 서양의 현대무용이 결합하여 탄생한 예술이다. 현재는 현대무용을 이끄는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어렴풋이나마 이론으로 알고 있던 부토춤이 대한민국 서울의 한 오래된 철공장 골목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그의 뒤로 분주히 짐을 나르는 지게차, 길게 늘어진 하품을 하며 기웃거리는 젖소무늬 고양이가 동네 터줏대감 마냥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아티스트와 일상의 것들의 경계선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그의 움직임은, 움직이고 있는 건가 의심될 정도로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아주 느린, 슬로우 모션 버튼을 눌려 있는 것인가!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다 보면, 그래도 조금씩 관객 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 와중에 배경음악이 나오는데, 엉? 우리나라 가요였다. 분명히 송창식의 고래사냥이었다. 수많은 물음표가 튀어 나왔다. 부토춤은 허무의 세계를 그리는, 죽음의 춤이라는데 이 곡은 당시 젊은이들의 사회를 향한 저항정신과 희망을 갈구하는 가장 뜨거운 삶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던가. 무시마루 후지에다는, 그런데, 무언가 으쌰으쌰하는 그런 동작이 아니라 아주 고통스러운 몸짓으로 표현해 내고 있었는데 죽음의 끝에서 표현해내니 그것이 오히려 더욱 절실하게 갈구하는, 어떤 결연에 찬 의지를 느꼈다.
‘동창이 밝았느냐’에서 ‘라벨의 볼레로’, ‘아침이슬’로 이어지면서 그의 부토춤은 다양한 세계를 넘나들었다. 죽음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모습부터 다가오는 죽음에 몸부림치기, 죽음을 맞이하면서 가만히 뒤돌아 자신을 가만히 감싸 안던 무시마루 후지에다의 부토춤에는 죽음 그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일상적이지 않은, 낯설고 해괴한 모습으로 표현한 ‘인생’에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영역(부토)에서 바라 본 성찰의 기록이었다. 터져 나오는 박수에 덩달아 손뼉으로 화답하면서도, 어쩐지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정훈의 "거미"
이어진 공연은 이정훈의 마임극 ‘거미’였다. 사실 마임이라기 보다는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무대공간을 채우고 있는 오브제들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자기가 친 거미줄에 목을 매어 죽은 거미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 작품은, 자신 외의 영역과 섞이면서 자기 존재를 되찾기 위한 처절하고도 슬픈 몸짓 (몸부림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을 그림자와 붉은 줄로 공간을 휘감은 거미줄 오브제가 관객의 상상을 압도하였다. 웨에엥, 음성으로 내는 사이렌이 울려퍼졌다. 거미형태의 그림자가 스크린 뒤에 등장하고 이내 여행가방과 방독면을 쓴 마임이스트 이정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미가 원하는 것은 먹이이나, 항상 원하는 것만 걸리는 것은 아니다. 깨끗이 줄을 청소하고 기다렸다가 걸려든 것을 먹는데 그는 무척 괴로워했다. (실제로 햄버거와 콜라를 먹다 뱉어내었다.) 점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자 (인간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에 의해 공간을 잃고, 원치 않는 먹이들이 걸려들고, 끝내 마지막에는 사람을 (지인으로 추정되는 느낌의 관객)을 잡기에 이른다. 그림자마임을 보였던 스크린에는 전쟁과 기근의 폐해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흘러나왔다. 방독면까지 쓰고 등장했던 그 또한 반나체로 자신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들을 잃고 멍하니 서서 갓잡은 먹이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거미가 인간이 된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면 거미가 된 인간의 꿈일까? 세상의 부조리에 농락당한 인간의 이야기에 긴 여운이 남았다.
합동공연 - 무용수 : DAKEI (butoh),Aya ,Itagami Asuka
뮤지션 : Nobunaga Ken, Sott Jordan, 佐藤行衛(사토 유키에)
드디어 마지막 공연! 공연 장소들의 중앙 부분에 나를 가장 고뇌하게 만들었던 세 명의 무용수가 등장했다. 아티스트들의 합동공연인데, 즉흥연주와 무용으로 이뤄졌다. 흰 분칠을 한 걸 보니 세 무용수 또한 부토춤을 출 요량이었다. 공연을 보다 종종 메모를 하곤 했는데, 이 공연만큼은 아무 것도 적지 못 했다. 그저 소리와 몸짓을 보고 떠올렸던 동사들을 정리해보면 ,
『찾다→방황하다→좌절하다→떠나다→헤메이다→멈추다』
즉흥예술은 사실 딱히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럴싸한 답(해석)을 붙이면 그런대로 있어 보이는 작품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나는 즉흥공연의 감상 대해서는 그냥 열어놓는다. 본 그대로의 기억을 내 안에 잘 쌓아두면 그만이다. 사람은, 예술가는, 항상 무언가를 찾는 존재이다. 단순한 기본욕구 이상의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저마다 다르나 ‘찾는다.’는 행위 자체는 가장 빛나고 뜨거운 동일한 형태일 것이다. 우리는 그저 예술가들이 찾는 것을 표현하는 절실함의 순간에 같이 공명하면 된다. 사실 이 작품은 낯선 몸짓과 소리로 인해 쉬이 읽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누구보다 진지했고,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고양이가 길게 울음소리를 뽑아냈다.
한국과 일본의 아티스트. 같은 채널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달랐다. 아티스트에게 국경은 무의미하다지만, 이 날 만난 예술가들만으로 살펴본다면 한국 예술가들은 어딘지 싸늘하고 묵직했으며, 일본 예술가들은 끈적이고 가벼웠다. 홈그라운드여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 예술가들이 좀 더 철공장의 공간에 어울리는 공연을 선보였다. 그러나 찡한 감상이 오래 남은 것은 일본의 부토춤이었다. (그 춤은, 인간을 잘 아는 귀신의 춤이었다! 하하하)
참 어수선한 날이었다. 한 쪽에서는 스탭들이 함께 먹기 위해 굽는 파전 냄새가 거른 저녁을 상기시켜 모든 소화기관을 요동시켰고, 철공장과 아저씨들, 지나다니는 차들이 공연장을 위협하였다. 그래도 공연은 한 번의 멈춤 없이 스트레이트로 진행되었다. 거리공연은 ‘안락함’ 대신 ‘어울림’과 친한 것이니까. 공연의 방해요소마저 존중하며 포용하는 물레아트페스티벌에서 만난 거리예술의 두 번째 매력은 바로 일상 공간과의 ‘어울림’이었다. (첫 번째 매력은 지난 리뷰에서 ‘절실함(존재감)’이라 밝힌 바 있다.)
어느 덧 한 주가 훌쩍 지났고, 곧 축제의 마지막 주가 다가온다. 그 때에는 어떠한, 거리공연의 매력 키워드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인가? 철공장 사이로 뻥 뚫린 골목 곳곳에서 인간 냄새, 쇠 냄새, 철없는 그리고 철든 예술냄새 섞인 뜨끈뜨끈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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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고양이와 초코우유, 통기타, 온갖 기묘한 것에 꽂힌 글제조견습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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