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3. 16:02ㆍReview
<조난 프리타>
그들이 말하지 '못' 하는 것들
정말 아찔했다. 영화 상영은 7시였다. 일찍 홍대에 도착하면 따뜻한 아메리카노도 한잔 마셔가며 영화와 공연을 보러온 사람들도 둘러보고, 일찍 도착한 밴드가 있으면 기웃거려도 볼 작정이었다. 여유 있게 나와 지하철을 탔다. 사당역에서 신촌방향의 지하철을 탔(다고 생각 했)던 나는 고개를 들어보니 잠실이었다. 노선을 보면 알겠지만 완전 반대방향으로 간 거다. 시간은 6시 20분. 내려서 고민하는 시간만 없었더라도 제 시간이 간신히 도착했겠다. 다시 지하철을 탔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오고 아이팟에서 그린데이의 21st break down이 나오고 있다. 세기의 멸망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대충 시간을 짐작해보니 7시 10분정도에 도착할 것 같았다. 얼마 전 다녀온 영화제에서 상영시간에 1분이라도 늦으면 들어갈 수조차 없는 규정이 맴돌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아이팟에 담아왔던 미드를 봤다. 그러지 않으면 가는 동안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미드에서는 유토피아에 관한 대화가 나왔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아름다운 꿈같은 곳이고 다른 하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한창 그 말을 곱씹어보다 홍대입구역에 도착했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7시 11분쯤 도착했었나? 다행히 내가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나니 영화가 시작한다. 그렇게 이와부치 히로키의 <조난 프리타>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말하려는 것들
영화 속 인물은 이와부치 히로키. 그는 이 영화의 감독이기도 하다. 캐논공장의 파견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보면 되겠다. 그는 먹고 자는 일 외에는 거의 할 수 있는 게 없는 집에서 주중에는 잉크 뚜껑작업을 하고 주말이면 도쿄로 나가 다른 일용직을 찾는다. 우연히 거리노동자, 즉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노동자들의 집회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TV에 출연하기도 한다. TV에 비쳐진 그는 세상에 내버려진 비정규직 노동자, 프리+아르바이트족의 합성어인 프리타족의 한 명일뿐이다. 아, 더 분명한 말이 있을 듯하다. 그는 세상의 패배자다. 그리고 패배자 중 암울하기 그지없는 일부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소통방식이었다. 차근차근 사건들을 기록해가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감독의 눈에 비춰진 세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중심엔 감독 이와부치가 있다. 아침에 사정없이 울리는 알람소리에 일어나 TV를 보며 밥을 먹는 모습과 자전거 페달을 밟고 일터로 달리는 모습, 빵을 한입 베어 물고 지하철에서 나레이션을 뱉는 모습 모두 감독 스스로가 담아냈다. 이와부치는 이야기를 새로이 구성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의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없어 보이는 프리타족, 정규직이 돼서 보너스를 받아보고 싶고 주말에 도쿄에 나가 잘 곳이 없어 고민하는, 내일까지 2000엔으로 버텨야하는 고단한 삶을 카메라를 응시하며, 카메라에 다소 피곤한 목소리를 얹으며 기록한다. 하지만 그가 각각의 방송사에 출연하게 되면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난다. 그를 소개하는 방송사들은 보기 좋게, 아니 분류하기 좋게 그를 패배자,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로 소개한다.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취재하는 매스컴의 기자들은 일본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프리타족의 증가를 문제시하면서 자연스레 실패자, 패배자로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자연스레 이와부치의 시각을 다시 상기하게 됐다. 그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프리타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방송에 비친 그의 모습은 마치 범죄자처럼 고백하는 음성 변조에 돈이 없어 국수를 끓여먹는 모습까지 모자이크 처리를 한 채 나오고 있다. 매스컴은 그의 인생의 굴레를 보다 더 절망적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도 없게끔 만들고 있다. 매스컴과의 인터뷰는 그를 패배자의 자리에 더 확고히 위치시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와부치가 일이 하고 싶다고 갈망하는 목소리와 매스컴의 보도에서 흘러나오는 인터뷰어의 정갈한 목소리는 극명한 차이를 빚으며 대비되고 있었다. 우린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할까? 그들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들
<조난 프리타>를 검색하다 본 몇몇의 리뷰 중 대부분이 프리타족-그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에 비춰진 프리타족의 모습은 꿈이 없고, 현실을 간신히 유지해나가며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갈수록 더 많은 프리타족을 낳는 환경만의 문제일까?
영화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나는 이 의견에 일정부분 동의하게 됐다. 이와부치와 매스컴의 대비되는 목소리는 조금 더 흐릿해져만 갔다. 한 대상을 두고 나뉘던 견해들은 파편화되어 갔다. 이와부치는 확실히 영화후반부 힘을 잃고 있었다. 그 순간 바로 이 부분들이 프리타족의 현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하던 나는 더 자신 없어 졌다. 그들에게 당장 10만장의 이력서를 쓰고 NHK의 승리자 대열에 합승하라는 게 아니다. 그들 자신의 인생에서 잊지 말아야할 것이 분명히 존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이루고자하는 꿈이 있어야하며, 끝까지 지켜야 한다.
영화 속 NHK의 기자와의 인터뷰는 처절하다. 기자의 얼굴과 함께 영화의 아래쪽에는 승리자라는 수식어가 적힌다. 승리자인 기자는 어렵고 삶이 고단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따내며 사람들의 불행으로 먹고사는 이 직업이 힘들어 가끔은 그만두고 싶다 고백한다. 그때 이와부치의 목소리가 덧붙여진다. 어라. 정말? 어째서? 말도 안된다는 그의 생뚱맞은 목소리. 비유를 하자면 커피를 팔 수 있는 5평의 가게라도 얻고 싶어 하는 아니 조그마한 간이대라도 얻고 싶은 사람에게 10개의 체인점을 가진 커피전문점 사장이 힘들다고 엄살 피우는 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부치가 지리멸렬한 인생의 굴레에 벗어나고 싶은 것과 NHK기자가 가끔 일에 회의감을 느낀다는 것은 절대 같은 위치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느 수준이 더 낮고 높고의 문제가 아니라, 직렬이 아닌 병렬의 선택과 단계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는 거다. 매스컴이 프리타족을 인생의 패배자로 치부했다고 하여 그들이 진정 패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프리타족의 안일한 생활에 익숙해져 갈수록 그들은 패배자의 모습에 닮아가는 그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지 '못'하는 것들
그들이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조난 프리타>를 써내려 가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는 꽤 시니컬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프리타족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라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대변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다. 영화 속 매스컴의 날이 선 시선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들의 삶을 대변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목소리에 빠져들고 영화의 시선과 일치될 때 나는 끊임없이 이와부치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도쿄를 동경한다 말하고, 똑똑한 오랑우탄도 할 수 있는 잉크 뚜껑 덮는 일을 한다고 말할 때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가 외로운 도쿄의 정거장에 서 있고, 비를 맞으며 잘 곳을 찾는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들은 어쩌면 나조차도 말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토피아의 두 가지 의미 중 그들이 찾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내가 그곳에 서있는 것일지도.
영화만 줄줄이 볼 수 있는 휴일을 원하면서도 정작 휴일엔 연애와 술과 잠을 즐기고 평일에 바삐 영화에 쫓기는ㅡ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
(자기 소개 한줄에 영화가 몇번씩이나 들어가는거에 희열을 느낀다. 그만큼 영화가 좋은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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