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2. 23:48ㆍReview
1.
극장 로비에 서서 표를 받는 초라한 휴겐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관객들은 웃고 떠들며 입구로 들어간다. 그리고 공연은 시작된다. 두시간 남짓. 공연이 끝난다. 입구였던 극장 문은 이제 다시 출구가 된다. 관객들은 출구로 나오며 조금씩 달라져 있다. 우울했던 관객들은 즐거워졌고, 즐거웠던 관객들은 진지해졌다. 관객들은 배우들에게 꿈을 허락했고 그들이 보여준 세계에서 진실을 본다. 연극이 끝나면 마치 꿈을 꾼 듯, 극장 문을 나선다. 제목은 어떤 상징일까. 아니 말 그대로 ‘출구’와 ‘입구’ 그대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2.
작품은 노트에 적어놓은 일련의 ‘사실’ 을 읊조리는 극작가(김은석 역)로부터 시작된다. 남아프리카에 공화국이 탄생하고, 이전의 국가는 소멸한다. 그러나 여전히 독재와 반민주적 행태로 점철된 우울한 검은 대륙의 끝. 아프리카인이면서, 백인인 극작가는 자신의 극작 노트를 덮으면서 담담히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자신이 연극의 문을 두드리던 과거의 순간, 그리고 지금 그 기억을 통해 연극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조하는 자신을 돌아본다.
앙드레 휴겐트(이호성 역)라는 배우가 있다. 아마추어로만 이루어져있는 아프리카 극단에서 유일한 프로배우다. 그는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에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를 연기하고 있다. 거만하고 거친 그의 태도로 인해 다른 배우들은 그를 무서워하지만, 늙은 목동역을 맡은 작가는 그가 존경스럽기만 하다. 연극을 이제 막 시작하는 그에게, 휴겐트의 연기는 너무나도 자신만만하며 확신에 차있는 ‘오이디푸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휴겐트는 척박한 연극의 고장인 아프리카에 <오이디푸스>를 올리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답답한 일임을 내뱉으면서, 이제 막 첫 공연을 앞두고 있는 두근거림으로 연습을 시작한다. 오이디푸스의 대사 하나하나를 지적해 주던 작가/목동은 휴겐트/오이디푸스에게 극작가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을 밝히게 된다.
그의 꿈을 단번에 만류하는 휴겐트의 말에는 연극에 대한 고된 세월이 엿보인다. 외롭고, 가난하고, 성공하기 어려운 연극의 길. 장난을 섞은 듯한 그의 말에 작가는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치지만 명배우는 재차 정색하고 말한다. 유머가 아니라 연민일세. 그는 오이디푸스로서 호령한다. 그는 오이디푸스가 눈을 찔러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토로하는 장면을 행함으로써, 연극의 고통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그에게도 연극에 첫 발을 내딛었던 시절이 있었다. 목동역을 하면서 글자 하나하나에 토를 다는 신출내기 작가의 모습을 본 딴 듯한 시절. 피눈물을 쏟아내는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는 중년의 명배우의 모습에, 포부와 자신감으로 가득한 젊은 날의 휴겐트가 겹쳐진다. 그에게도 선생님이 있었다. 유진 마라이스.
유진 마라이스 선생은 휴겐트에게 말했다. 꿈을 꾸는 것은 저주다. 이 운명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연극을 하는 이유다. 휴겐트의 말은 비극적인 장면을 수행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치환되어, 마치 그와 오이디푸스의 동시적 운명처럼 느껴지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힘들게 연극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휴겐트와 테베의 전염병을 막기 위한 고귀한 왕의 사투. 휴겐트는 유진 선생에게서 들었던 말을 전해준다. 관객이 우리에게 꿈을 꾸라고 허락해야만 우리는 연극을 할 수 있다.
3.
시간이 흘렀다.
관객들은 이제 배우에게 쉽게 꿈을 허락하지 않는다.
4.
휴겐트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외롭게 살았다. 무리하게 시도한 연극 때문에 생활은 피폐해지고 가난해졌다. 극장 로비에서 표를 받고 청소를 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에겐 ‘연극’ 이란 화려한 갈채의 입구에서 초라한 손가락질의 출구로 인도된 비참(悲慘)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한 때 명성을 드날렸던 그는 추기경 역할을 통해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다. 그의 공연에 옛 시절 목동 역을 했던 작가가 찾아온다.
휴겐트와 재회한 그는 이제 막 아버지가 될 준비를 하면서, 본인의 병든 아버지를 걱정한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극작가로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기대하면서도 걱정하고, 용기를 내고 싶지만 주저하고 만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폭력과 야만의 시절을 겪고 있고, 이를 목격한 극작가는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싶지만, 식민지의 실상은 제국에서는 그리 흥미롭지 않다. 연극은 흰둥이 연극과 검둥이 연극으로 차별되고, 연극의 오락적 기능은 강해졌지만 사회적 기능은 무력할뿐.
작가의 복잡한 속내를 통해 자신의 옛날 모습을 목격한 휴겐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몇 년 전 아프리카에서 올렸던 <오이디푸스>의 무대에서처럼 자신의 역할을 재연하는 식으로. 이제껏 몸소 행하면서 깨닫게 된 연극의 여정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은 그의 유언이 되었다.
5.
<출구와 입구>의 작가 아돌 푸가드의 외양을 그대로 따온 듯한 모습의 배우 이호성은 테베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덴마크의 햄릿 왕자 그리고 리어왕에서 초라한 추기경까지, 연극 정신을 강조하는 유진 선생과 깜찍한(?) 쟈스민 등 여자 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 해낸다. 그의 연기를 통해 ‘연극’ 안에 또 다른 ‘연극’ 들을 만날 수 있고, 동시에 연극 만들기 과정과 배우의 변신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일 것이다.
새빨간 왕의 망토를 걸치고 두 눈에서 피를 쏟는 오이디푸스의 장엄하고 강렬한 연기에서부터, 내복을 입은 누추한 신부의 몸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무릎 꿇고 걸레질을 하는 신부로의 변신. 그는 단순히 외양의 변화 뿐 만 아니라 - 자만심에서 겸손함으로의 여행이라고 작가에 의해 언급되는 - 내면의 변화를 실감나게 전해준다.
김은석의 연기 앙상블도 2인극의 묘미를 더한다. 다소 고집스러우면서도, 순진한 듯한 ‘작가’ 의 캐릭터는 휴겐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관객이자, 유진 선생의 연극정신을 다시금 이어 받는 제자이면서 동시에, 고된 연극의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된다.
전반부에서 걸걸하고 시원시원했던 휴겐트(이호성)의 화법은 후반부에서 차분하면서 나지막해지는 데, 이에 작가(김은석)는 어눌하면서도 수줍은 듯 했던 ‘말하기’ 의 방식이 점점 강해지고, 체념하는 말투로 응하게 된다. 두 사람의 절묘한 주고받기는 - ‘언어’와 ‘행위’ 로만 이루어진 - 기본적인 극의 표현방식(연기)의 단일함을 극복하고, 시종일관 긴장과 몰입을 유지시켜주었다.
6.
휴겐트는 늙고 약한 추기경을 통해 ‘진짜’로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신과 맞서던 오이디푸스는 무릎을 꿇고 신에게 비는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가장 낮은 모습을 통해 허망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해한다. 그러나 극장 로비에서 그가 배운 것은 그의 말에 의하면 ‘진짜’ 였다. 아무도 맞아주는 사람 없는 집을 떠나 그가 진정으로 발견한 안식처는 30년간 연기했던 ‘극장’ 이었고, 극장에서 살아온 ‘자신’ 이 있었다.
오이디푸스에서 시작된 연극론은 이제 햄릿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그의 연극 인생으로 체험한 햄릿이 된다. 죽는다. 산다. 그뿐이다. 죽는 것, 그것은 영원한 잠. 잠을 자면 꿈도 꿀 것이다. 그런 운명 속에 놓여있는 연극. 선문답 같으면서도 철학적인 연극의 명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외롭고 고달픈 배우 인생에 걸고 보여주는 그 배우의 ‘연기’ 의 진실함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진심을 담은 ‘표현’ 자체가 바로 ‘의미’ 였다.
<출구와 입구>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은 휴겐트가 ‘연기를 해오며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을, 다른 배역(추기경, 햄릿)의 말을 통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기의 말과 감정으로 돌아오며 말하게 되는 메타 드라마적 장면에서다. 그는 작가에게 마지막 무대를 어떻게 연기했는지를 다시 보여주며, 진심어린 연기를 보여준다. 무대 위에 선 인간은 ‘추기경-햄릿-배우’ 로 확장되며 결국 연극적/인위적 행위들과 ‘감정’ 에 빠져 가짜로 연기하는 모습이 아닌, 무대 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휴겐트는 작가에게 당부한다. 너의 연극을 해.
7.
<출구와 입구>는 휴겐트의 자살 소식을 알리는 작가의 나레이션으로 끝난다. 휴겐트는 정지된 채로 술잔을 들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제까지 써왔던 입구가 아닌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간다. 무대는 어두워졌다. 그리고,
박수가 터져나왔다.
무대 위에서 살았던 이호성과 김은석은 아직 역할이 주는 여운에서 가시지 못한 듯 표정이 어두웠다. 배우들은 관객에게 인사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전한다. 외롭고 고되게 이 땅에서, 연극을 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경의의 표시다.
감정에 빠지지 않고, 포기 대신 용기를 말하며, 꿈을 허락하는 한, 그 속에서 진실함을 전달하는 것. 그것은 <출구와 입구>에서 나타난 휴겐트이자 이호성의 모습이었고, 휴겐트를 닮은 작가 아돌 푸가드의 이야기였으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집필한 작가를 대변하는 김은석의 모습이 있었다. 또한 창조와 파괴를 꿈꾸는 연출가의 시도가 있으며, 연극의 사회성, 문학성, 연극성을 의도한 번역가의 바람이 있었다. 우리가 본 것은
아프리카 연극이었다.
2009년 11월11일~11월29일 / 정보소극장
‘과연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연극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공연.
극단 창파가 내놓은 연극 ‘출구와 입구’는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데 연극이 얼마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작가의 자전적인 성찰을 담은 2인극이다.
‘출구와 입구’는 평생을 인간 평등을 위해 헌신한 아돌 푸가드의 최근작으로 작가가 평생을 거쳐 표현하고 있는 주제 의식이 가장 극대화 되면서도 정제 돼 있는 작품이다. 극은 간접적인 서술방식을 선택해 극중극(메타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회와 연극, 인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들을 담백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내는 ‘출구와 입구’는 스테픈 삭스(Stephen Sachs)에 의해 2004년 5월 로스엔젤레스 ‘파운트 극장’(Fount Theatre) 에서 초연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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