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9. 11:07ㆍReview
한국마임, 꾸준히 그리고 새롭게
어느덧 21회다. 매년 대학로에서 마임을 위한 무대를 만들겠다고 시작한 행사를 이제까지 이어온 한국마임협의회의 뚝심이 느껴진다. 작년 춘천마임축제가 20년을 맞았던 해에 특별한 무대가 있었는데, 한국마임의 초창기부터 활동한 다섯 명이 자신의 초기작을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그들은 공연이 끝나고 인사를 하면서 인상 깊은 세레모니를 선사했다. 다섯 명이 하나씩 씨를 심어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모습을 소박한 움직임으로 보여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마임이었고, 초창기엔 마임을 하던 그들도 이렇게 마임이 성장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마임’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잘 알지는 못해도 스쳐지나가며 본 적은 있고, 공연을 본다하는 관객은 ‘판토마임’이든 ‘무언극’이든 ‘넌버벌 씨어터’든 자신에게 익숙한 말로 마임을 설명할 수 있는 정도다. 한국마임은 성장했고, 잎을 틔웠으며, 꽃을 피웠다. 그리고 이제 열매를 맺을 시기에 있다.
그렇게 한국의 마임을 키워온 가장 큰 힘이 바로 이 ‘한국마임’이 아닌가 싶다. ‘한국마임’은 한국마임협의회가 매년 신작이나 그해에 발표한 작품을 공연하여 한국마임의 현재를 보여주는 자리이다. 사람들이 마임을 모를 때도 잘 알게 된 지금에도 ‘한국마임’은 늘 그대로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다. 1년에 한번 회원들이 모여 공연을 한다는 것,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변함없이 약속을 지켜온 한국마임협의회의 성실함이 하나의 씨가 되고 단비가 되어준 것이 아닐지.
‘한국마임’의 첫날,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마임’엔 마니아가 존재한다. 대단한 홍보도 없이 작은 극장에서 소소하게 이루어지는 공연임에도 언제나 일정 이상의 관객이 찾아온다. 내가 11월 초가 되면 자연스럽게 한국마임을 떠올리듯이, 그들도 코끝에 스치는 찬바람에 말없는 움직임이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고재경, 이경렬, 노영아, 양미숙 <고도를 생각하며>
특별히 첫날 공연에 기대가 많았는데, 그것은 <고도를 생각하며> 때문이었다. 각자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공연자 넷이 한자리에 모여 신작을 선보인다니 그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웃음과 울음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고재경, 얼굴에 익살이 떠나지 않는 이경렬, 늘 독특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노영아, 여성적이고 세밀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양미숙... 개성이 뚜렷한 공연자들이 어떤 공연을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고재경, 이경렬, 노영아, 양미숙 <고도를 생각하며>
지친 듯 넋을 놓은 듯 등을 마주대고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두 남자, 그들 사이로 검은 존재가 흰 존재를 끌고 지나간다. 검고 하얀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두 남자는 그 존재로 인해 놀림을 당하고, 용기를 얻고, 욕망을 가지다가, 앞으로 나갔다가 제자리에 주저앉기도 하면서 엎치락 뒤치락 거린다. 그것은 마치 운명이라는 존재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농락당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연상케했다. 이내 두 남자와 두 존재는 정신없이 같은 공간을 재빠르게 움직인다. 그들은 앞만 보고 나아가며 부딪칠 듯 스쳐지나고 부딪쳐도 지나친 채 작은 공간을 뱅뱅 돈다. 숙련된 공연자들의 재빠른 움직임이 돋보이면서도 운명이라는 존재조차도 함께 뒤섞이며 혼돈에 빠져드는 상태가 보였다. 답답하고도 좁은 시간 속에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기에 숨이 막히는 일상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처음, 두 남자는 무엇에 홀렸다가 넋이 나간 듯이 등을 마주대고 앉아버리고 그 사이를 흰 존재가 검은 존재를 끌고 지나간다.
두 남자는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이었을까, 검고 흰 존재는 운명의 모습이었을까 혹은 죽음과 삶을 보여주려 한 것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마임은 그저 움직임만 보여주고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마임이 좋다.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주고 스스로 생각하는 중에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게 한다.
‘고도를 생각하며’는 실력 있는 공연자들다운 움직임을 보여주었지만, 아직 완성된 작품이라고 보기엔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전체적인 스토리의 밸런스도 맞지 않는 느낌이었고, 서로 호흡도 완벽하게 맞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각자 공연을 하는 중에 함께 모이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신작을 만들어 무대에서 선보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공연을 하게 만든 힘은 아마 ‘한국마임’이었을 것이다. 한국마임협의회 회원들이 모여 함께 만드는 자리이기에, 그렇게 특별한 공연을 선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동안 ‘한국마임’이 해온 역할이자, 한국의 마임을 키워온 힘이다.
‘한국마임’은 한국의 마임을 알리는 공연이자, 한국에서 마임을 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자신의 정체되지 않게 하려는 움직임이고, 마임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데 모이는 시간이다. 이제 만 20년을 넘어서는 때에, 꾸준히 약속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더욱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자리이기를 기대한다. 가장 먼저 새 작품을 선보이고 가장 좋은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 ‘한국마임’이길 바라본다.
2009 한국마임 (2009 Korea Mime Festival)
2009년 11월 3일(화) ~ 11월 15일(일) / 블랙박스씨어터
한국마임은 마임의 창작 활성화와 교류의 장으로 마임의 현 흐름과 경향을 보여주는 2009 한국마임은 2주간 20편의 작품을 선보이며 풍성한 마임의 향연을 펼친다.
http://www.komime.nethttp://blog.naver.com/komime2009
공연을 좋아하고, 예술을 좋아하고, 그래서 늘 그 근처에서 어정거리며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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