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31. 18:30ㆍReview
<제 6회 여성연출가전: New War, 전쟁이다>
인형의 집
"노라의 분노가 현대적 의미를 지니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글ㅣ 홍은지
1.
아주 오래전, 처음으로 ‘인형의 집’ 희곡을 접했을 때가 떠오른다.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희곡 읽기를 했던 것 같은데, 엄청나게 지루하고 따분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근대 연극
의 태동이네,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넘어가는 기점이네, 하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한
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주인공 노라가 가정주부에서 어떻게 한 순간 각성된 여
전사로 변화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물은 일관성이 없거나 감정 과잉으로 보였고
대사들은 웅변이나 선언 같아서 중간 중간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지
금 생각해보면 20세기 말 나의 입장에서 그것을 드라마로 읽어내려 했던 것 같다. 감정
이입을 해야 하는데 희곡 속 인물들은 현실적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전혀 몰입이 되지
않으니 그 시간이 괴롭기만 했다. ‘인형의 집’이 현재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엇갈림은
대체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표상이 아니라 사실로 보아지는 것.
2.
1879년 입센이 ‘인형의 집’을 출판하자 3개월 만에 3판이 나올 정도의 판매부수를 기록
했고 초연 이후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물의를 일으키며 그 해 겨울 스톡홀름의 모든 공
적 모임에서는 ‘인형의 집’이 언급되지 않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극의 마지막 노라가 집
을 나갈 때 문을 닫는 ‘쾅’하는 소리는 유럽사회에 ‘폭탄’ 떨어지는 소리로 작용했다는 말
이 전설처럼 전하듯, 사상가 입센은 근대정신을 통해 ‘결혼 생활’을 바라본 최초의 실험
으로 당대에 도발과 파격을 감행했던가 보다. 현재 최고의 남녀평등 복지국가를 자랑하
는 북유럽의 상황이 왠지 이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면 비약일까. 어쩐지 그 이후 개
인적 경험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담론을 사회적 합의로 이끌어 내었고, 지금은 둘째 아
이를 낳고 출산유급휴가를 받은 울리카씨, ‘너희 나라였으면 아이 낳을 엄두도 못 냈을
것’이라는 인터뷰를 하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으로 이어진다. 이 대목에서 1950년대, 정
비석 작가의 자유부인이 외설시비에 오르면서 동시에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이
야기가 떠오른다. 그런데 대체 어떤 지반이 달라서일까. 이것도 내가 희곡을 표상이 아
닌 사실로 받아들여 감정이입하고 말았던 것과 같은 맥락인가. 그래서 다시 한번 인물들
을 눈 여겨 보기로 했다.
3.
희곡에는 두 쌍의 남녀가 등장한다. 먼저, 노라와 헬머.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라는 세 아이를 둔 헌신적인 가정주부로서 사랑받는 아내가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출발한다. 그런데 노라에게 감추어 둔 비밀, 즉 고리대금업자로부
터 돈을 빌리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서류에 위서한 사실 때문에 그녀의 안락
해 보이는 삶은 위기를 맞는다. - 이것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병든 남편을 해외요양 시키기 위해 빚을 진 것이었다. 돈을 갚기 위해 이리저리 조금씩 돈을 빼돌리다보니 결
국 그녀의 인생은 거짓과 변명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감추려 하지만 이 사실이 남편 헬머에게 알려지자 남편은 노라의 위선때문
에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며 격노한다. 다음 순간 문제의 계약서가 그들의 손에 전달되고 사건이 해결되었지만 노라는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간다. 노라는 권위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고 헬머는 타인의 시선, 체면으로 인생을 쌓아 올렸지만 떠나려는 노
라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그들과 대칭을 이루는 또 한 쌍의 남녀가 있다. 노라의 오랜 친구 미망인 린넨 부인과 고
리대금업자이자 은행원인 크로그쉬타. 둘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혹은 쫓겨나지 않기 위
해 노라를 통해 은행장 헬머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하고자 하는데, 여자는 설득과 부탁을 통해, 남자는 협박과 위협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한다. 린넨부인은 가난과 고된 삶
으로부터 인생을 배웠다며 노라에게 일종의 멘토 역할을 한다. 그녀의 지론은 숨기지 말
고 드러내라는 것, 잔꾀를 쓰지 말고 정면으로 승부하라는 것이다. 결국 일 자리를 얻게
된 린넨 부인은 해고된 크로그쉬타와 오래전 연인 관계였던 것을 이용해 노라의 일을 중
재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면서 그와의 인간적인 관계 회복에도 성공한다. 그녀는 '파선당
해 송판 한 장에 의지해 있다'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난파당한 조난자끼리 손을 잡자'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연대를 제안한다. 그에 대한 남자의 반응은, '나도 이제 남들에게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더. 그는 노라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그들 곁에서 친구로 지내
왔다. 그(순수한 사랑)는 곧 죽을 운명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과 열정이 많은 아버
지가 저지른 방탕의 대가로 상속 받은 병균 때문이다. (낭만적 비극성이 느껴지는 이 인
물은 입센의 다음 작품 ‘유령’으로 이어진다.) 말없이 노라를 사랑해온 그들의 오랜 친구
는 다음 번 무도회에 보이지 않게 하는 모자를 쓰고 나타나겠다고 말하고 사라진다.
이 인물들은 가정이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작은 단위로서 기능하게 되는 한 끊
임없이 되풀이 될 문제들을 보여준다. 사랑이 개인들 사이에 놓인 송판이라면 체면은 사
회에 떠 있을 수 있게 하는 송판이다. 가정은 이 둘을 가능하게 해주는 한편, 가정을 잃
은 자는 난파당한 조난자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런 인식이 지속되는 한, 단지 노라뿐 아
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는 ‘인형의 집’ 안에서 역할극을 해야 하는 인형들이라는 것을 말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과적으로 그들은 안락하고 유쾌한 가정을 위해 각자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안에 놓이게 된다.
4.
그런데 무대화가 유려하면 할수록 약간 싱거운 드라마로 받아들여지는 이 희곡의 폭발력은 어디에서 감지되어야 할까.
이 공연은 가장무도회를 컨셉으로 한 프롤로그 장면을 제외하면 춤추는 듯한 동선을 위
해 안무가 가미된 것을 포함하여 대체로 안전한 드라마적 감상을 유지하게 해준다. 인물
들 각자가 이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는 장점을 지니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적 인물 구축과 내용적 접근으로 근대적 인간으로 넘어서려
는 노라의 각성이 의미를 갖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낭만주의의 혈통을 이어 받아 휴머니
즘의 정점이라 할 근대성에 뿌리를 둔 이 희곡의 핵심은 이러한 노라의 각성에 있으며,
우리의 모습을 확인하는 일상의 단면이라는 시각에서의 접근은 내면의 전쟁을 감각적
일치감으로 중화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 8년 동안 단 한 번도 심각하게 서로 의논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서 아이를 셋
이나 낳은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고 싶다며 응축된 분노를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노
라의 변신(정말 헐크처럼 말이다), 그 노라의 분노가 현대적 의미를 지니려면 어떤 모습
이어야 할지 궁금하기만 하다.
연극연출가. 공연창작집단 <은빛창고>
그 동안 주로는 공연 문화 영역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 함께 해 왔다. 이것저것 관심이 많고 다소 산만해서 여러 종류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게 즐거운데, 아무래도 소심한 몽상가인거 같다.
여성연출가전은?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맞는 '여성연출가전'은 매년 다른 하나의 주제로 만나는 연극축제다.
<제6회 여성연출가전>은 ‘전쟁’이 주제다.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국가간의 전쟁, 부조리한 사회 체제와의 전쟁, 개인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나 자신과의 전쟁 등 이념의 대립에서부터 일상의 소소한 전쟁까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연출가들의 섬세한 시선을 만날수 있다.
[공식블로그 바로가기]
첫 번째 작품 : 극단 시공 <인형의 집>
작 : 헨리 입센
연 출 : 백순원
출 연 : 정주란, 이정국, 한경희, 이성일, 도원욱
날 짜 : 2010년 5월 18일 (화) - 5월 26일 (수)
장 소 : 키 작은 소나무
Next) 제 6회 여성연출가전 두 번째 작품: 공연집단 우리동네 <사랑찾기, 칠천만분의 일>
작, 연출 : 정혜경
날 짜 : 2010년 5월 28일 (금) - 6월 6일 (일)
장 소 : 키 작은 소나무
정혜경 연출이 직접 쓴 ‘사랑 찾기, 칠천만분의 일’은, 남북한 연방제 통일 원년을 배
경으로 남북한 남녀의 사랑 찾기 과정을 통해 통일 후 겪게 될 문화적 이질성을 사람
과 사람을 껴안는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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