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31. 00:02ㆍReview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극단 연우무대 2010년 신작
<핼리혜성>
글│삐삐롱스타킹
소극장 공연을 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공연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것은 더 백만년 만이다.
게다가 연우무대의 공연은 처음이다. 극단에 대한 이해도 별로 없는 내가 리뷰를 써도 되는가는 모르겠지만, 한편 무슨 상관이랴. 무대와 배우, 관객이 만나는 순간! 일단 우리는 2010년 7월 22일 8시, 대학로 아르떼 지하 소극장에서 만나버렸는데.
연우무대의 2010년 신작 ‘핼리혜성’. 일단 문을 연 순간 원형 무대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조명이 비추니 수몰 댐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느낌을 시작 전부터 담아내는구나. 감탄. 물이 있으니 좋다. 그나저나 어쩌실려구. 무대는 물이고 한 면과 귀퉁이를 빼고는 관객들이 차곡차곡 앉아있는데.
물이 물로 보이지 않았는지 좌석을 찾던 관객 한분이 그만, 첨벙! 예의바른 분들이라 웃음을 참으며 서로 고개를 숙인다. 당신과 나 모두 공범이구랴.
죽은 혁준의 동생 혁택과 딸 명주가 고향마을이 수몰된 댐에 등장하였다. 요정 같은 코러스가 매미소리 새와 바람 소리를 목소리로 들려준다. 인적 드문 댐이나 강에 서면 들리는 소리. 올봄에 무주의 용담댐에서 보았던 풍경과 닮았다. 거기도 68개의 마을이 묻힌 어마어마한 규모의 댐인데 얼마나 많은 추억이 사장되었을까 마음이 알싸했다.
용모양의 댐을 바라보며 “댐 만드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하던데 나는 모르것다.” 동행한 시인의 말과 대답없이 바라보던 내 모습, 주변의 소리들이 무대위 댐에 오버랩되었다.
물
예술이나 심리치료에서 흔히 물은 근원으로의 회귀, 태아를 보호하는 양수, 원형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핼리혜성’에서 인공 댐이지만 댐이 되기 전의 마을은 물이 흐르는 강이 있었다. 아이들이 물고기도 잡고 놀이도 하던 강가의 마을은 폭발음과 함께 조금씩 사라진다. 다시 물이 그곳을 가득 채운다. 핼리혜성이 지나가는 걸 보려고 기다리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떠난 사람들은 하나둘 해체를 겪는다. 죽은 이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원형의 그곳에 서서 기억을 되살린다. 그들의 고향을 복원한 댐에 둘러앉은 관객은 배우들의 움직임이 빚는 물방울을 맞으며 함께 여행을 떠난다.
가족
혁택과 명주가 고향이 수몰된 댐에 온 이유는 혁택의 형이자 명주의 아버지인 혁준의 죽음 때문이다. 평범한 시골의 좋은 동네 ‘형’인 혁준은 성공을 위해 상경한다. 국내 기업들이 동남아시아,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90년대 중반 산업화의 과정에서 혁준의 사업도 무너졌다. 착하고 의협심 강하던 동네 골목대장 혁준은 꿈과 자존심, 사람에 대한 예의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작은 시골 마을의 순진무구한 사내는 한 번에 무너져 내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나. 이 질문은 고약하다. 사람은 누구나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고, 지독하게 변할 수 있다.
예전의 그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의 변한 모습을 견뎌내기는 더 어렵고, 외면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는 더욱 악독하게 패악을 부린다. 보상받을 길이 없으니 말이다.
외면하는 혁준, 망가진 아들을 보며 애통해 하는 말기 암 환자인 어머니, 어린 딸 명주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버렸다.
가족은 해체되었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법처럼 한번쯤은 다시 서로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가족은 아무리 피해도 따라다니는 그림자이며 보기 싫어도 눈앞에 나타나는 나의 거울이 아니던가.
혁준의 회귀는 하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했다. 어릴 때 엄마의 무릎에 누워 같이 부르던 노래 김소월 시인의 시에 노래를 붙인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코러스
팜플렛에 코러스라고 적혀 있어서, 음악의 코러스를 뜻하는 걸까 아니면 그리스극 중의 모든 상황과 설명, 미래에 대한 암시를 알려주는 코러스를 빌려온 것일까 궁금했다. ‘핼리혜성’에서는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해내었다고.
4명의 코러스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물가의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었고, 과거속의 인물들이 되어 극의 배경과 이야기를 전달한다. 눈으로 본 것들이 세월과 더불어 변해갈 때 눈을 감으면 소리는 여전히 그때 그곳으로 데려간다. 아마 극을 만든 사람이 오감으로, 온몸에 마을과 댐건설 과정, 고향에 대한 기억을 기록해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섬세함과 조그맣고 예쁜, 반짝거리는 것, 소중하다.
두 가지만!
가족이 해체되고 10년여가 지나 딸이 몸을 버려가면서 일하는 것을 혁준이 알게 되었다. 그것을 막지 못한 아버지로서의 절망과 죽음. 아무래도 아쉽다. 혁택, 명주와 혁준의 화해를 하기위해서는 결정적인 사건이 필요했을 것. 그렇다 해도 모든 가족으로부터 외면, 어머니의 죽음, 무력한 중년의 자아, 딸과의 관계개선조차 실패한 아버지가 찾아가는 원형의 장소로서 고향이 수장된 댐. 이정도로만 설명해도 아마 관객은 충분히 납득하지 않았을까. 관객이 자신의 가족사를 연상하여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연출가와 극작가들이여, 관객이 그대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느낄 것이라고 믿어주시길. 관객이 상상할 여유, 여백을 관객에게 허락해주시길.
“지나간 것들은 돌아보면 왜 그런지 눈이 부셔.” 형을 저버린 동생이 분노와 연민을 다시 경험하고 난 뒤 조카인 명주에게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상처를 잊어버리라고, 누구나 다 아프다고 한다. 그렇지만 충분히 아파하고 난 뒤에야 좋았던 일이 의식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 순간이 바로 치유의 순간이고 진정한 애도의 순간이다. 가족의 해체와 죽음을 겪은 사람의 상처가 진정한 애도가 되려면 고통의 시간이 더디고도 아프다 못해 무뎌지기도 한다. 혁택의 절규로만 명주의 차가운 외면으로만 그 고통을 표현하기에는 좀 허기가 진다. 곰삭아서 복합적인 감정을 보고 싶다. 절망과 분노, 체념, 시간이 흘러 무뎌짐이 뒤섞인. 그렇다. 좋은 극을 선물한 연출가에게 미안하지만, 관객은 이렇게 욕심이 많고 100% 만족할 줄 모른다. 그래서 다음 연극을 기다린다.
연출에 대한 기대
과거와 현재의 화해를 다룬 ‘핼리혜성’은 소극장 한중간에 댐을 만든 실험적인 소극장 연극임에도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야기 역시 어느 가족과 고향, 기억, 추억을 담고 있어 관객의 마음을 자극한다. 이런 모든 요소를 얘기 속에 자연스럽게 담은 연출이 빛난다. 섬세한 코러스의 연주라던가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난 반가웠다. 요즘 여기저기서 무너지고 다치고 사라지고. 악다구니를 써대며 싸워야 하는 날들이 많다. 가끔은 한 호흡 쉬면서 사라지는 것들에게 ‘안녕? 힘들지? 내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나봐. 너도 잘 가고 남은 나도 잘 살게.’라고 잘 보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연출에서 똑같은 마음을 엿보았는데, 맞나.
2009년 창단한 ‘극단 해인’의 대표인 젊은 연출가 이양구. 극단 해인의 다른 작품을 잠깐 검색해 봤더니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억을 더듬는 극을 만들고 있었다. ‘핼리혜성’에서 보여준 별처럼 빛나는 감수성을 어떻게 다른 이야기에서 보여줄까 좀 궁금해진다.
극단 연우무대 핼리혜성
공연기간 2010년 7월 16일(금)~ 7월 23일(금)
공연장소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작/연 출 이양구
극단 연우무대 홈페이지 www.iyeonwoo.co.kr
혁택과 명주는 삼촌과 조카. 두 사람은 죽은 혁준(혁택의 형, 명주의 아버지)의 기억을 찾아 지금은 수몰된 고향 마을을 여행한다. 이 귀향의 여정에서 혁택은 명주에게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을 들려준다. 어린 시절 혁준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소년 가장이 되어 서울로 일하러 떠났다. 자라서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다. 그 무렵 어린 명주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이혼까지했다. 혁준은 죽기 전에 성인이 된 명주를 찾아왔지만 명주는 아버지를 외면했다. 두 사람은 죽은 혁준의 삶을 추억해 가는 여정에서, 살아온 시간은 무척 아픈 것이었지만, 아름다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필자소개
삐삐롱스타킹
이것저것 재미난 걸 하지만 딱히 뭘 한다고 말하긴 어렵네요.
제가 뭘 하는 사람일까요.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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