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4. 11:46ㆍReview
코끼리, 나무, 바퀴벌레, 인간, 인디스트
서울프린지페스티벌
극단 '위드오즈' <숙희씨네 코끼리>
글_ 정진삼
1. 코끼리
어느 날 스승님이 말했다.
“상상이라는 말이 있다. 생각할 상(想) 자에 형상 상(像)자. 뒷 글자는 코끼리 상(象)자에 사람(人)이 더해진 것이다. 예전에는 코끼리를 보는 일이 흔치 않았다. 보지 못한 코끼리의 모양을 생각해서 그리는 것. 이것이 상상이다.”
2. 나무
음악극이란다. 라디오 디제이 씨코드와 지코드가 ‘바퀴벌레’ 와 연애하게 된 청취자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공연의 시작을 알린다. 기타, 건반, 타악으로 단촐하게 짜여진 밴드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무대가 밝아지면 문에 들이찬 거대한 나무가 중심에 서 있다. 가져갈 짐은 싸고, 놓고갈 짐은 남겨진다. 숙희씨네 이사가는 날, 코끼리는 간데없고 나무를 가져가냐 말것이냐를 두고 가족들끼리 티격태격 다툼이 벌어진다. 쉴새없이 자기 사연을 폭발적으로 쏟아내는 할아버지, 부인을 사랑하지 않았다(?)던 아버지, 리스트와 테이프를 들고 다니며 짐 챙기느라 분주한 양복희, 보석함을 찾느라 정신없는 양숙희, 그리고 늦게 들어온 주제에 만화책 보기에 여념이 없는 양봉희. 콩가루 집안의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였다. 이들은 서로 다른 패턴의 줄무늬 의상을 입고 나와서는 쓸데없는 행동과,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을 섞는다. 뭔가 심상찮다. 이사가는 극적인 상황과 나무의 처리문제로 인한 부조리한 상황이 서로 얽히면서 <숙희씨네 코끼리>는 코믹 음악극으로 관객들을 휘어잡는다.
올리브유를 바르면 나무가 빠진다고 나무에 기름을 칠하고, 왜 값비싼 올리브유를 낭비하냐고 화를 내고,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패배자적인 감정에 빠져서 소리를 지르고, 노인은 울음을 터뜨리고, 늦게 온 장남의 가방에선 도끼가 튀어나온다. 황당한 사연들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과도한 감정이 난입하고, 생뚱맞은 오브제가 시치미를 떼고 어울린다. 예를들어 큰언니 복희는 시종일관 이사갈 때 쓰는 유리 박스 테이프를 가지고 다니는데, 찍찍거리는 소리와 어울려 묘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비논리의 향연, 부조리한 일상, 무리수(?)로 보이는 드라마. 허나 내러티브의 억지스러움은 점차 내적인 논리를 구축해간다. 이사 가는 상황에 놓인 인물들은 정신없는 등퇴장과 함께, 강박과 혼란을 타당하게 제시하고, ‘짐’을 싸면서 추억에 젖어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나, 스스로를 ‘잉여’ 혹은 ‘짐짝’ 으로 이해하는 인물들의 모습도 그럴 법하다. 게다가 집을 비우고 나서 발견하게 된, 공동거주자였던 - 나무와 바퀴벌레의 이야기들도 나름의 개연성을 갖는다. 사건 혹은 인간 중심의 드라마가 밀려나면, 소소하지만 일상적인 부조리가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올리브유를 눈에 맞은 아버지는 눈이 멀었다며, 세상이 캄캄해졌다며 일갈하지만, 실상 무대는 ‘암전’ 이었고, 가족들은 ‘정전’ 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정말 세상이 뒤집혔다. 관객으로써 어이 없는 상황이 한두번이 아닌지라, 관객들은 슬슬 적응하기 시작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대놓고 즐긴 관객들이 태반이었다.
3. 바퀴벌레
무대의 중심엔 나무대신 높은 곳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바퀴도사가 있다. 벌레인데도 나름 귀엽다. 게다가 세상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현명함까지. 식구들을 잃어버린 숙희씨 일당들은 바퀴도사를 거치며 가족의 행방을 알려고 애쓰지만, 이별과 상봉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헤프닝’ 처럼 끊임없이 짝을 바꿔 이어진다. 잠이 들면 바퀴벌레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들은 잠을 자고, 꿈속에선 가상의 화목한 공동체를 구현한다. 그러고 보니 <숙희씨네 코끼리>는 음악극을 표방했지만, 실상은 가족 드라마의 조건을 갖추었다. 물론 ‘눈물’을 빼고 ‘웃음’ 이 들이찬 역설적 드라마다. 이들은 신파극을 흉내내며, 기존의 혈연제일주의 가족극을 조롱한다. ‘음악’ 은 이러한 ‘탈의미화’ 의 장난스런 잔치에 이미지를 구체화해주는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숙희씨네 코끼리>는 인간이 느닷없이 벌레로 변한다는 설정에서 카프카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다른 점은 ‘벌레’ 를 혐오대상으로 규정하는 ‘인간’ 의 어리석음을 놀리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들의 환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꿈’ 재현을 통해 보여준다. 일인분도 못하는 봉희는 부자가 되어 ‘봉희송’을 부르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추앙을 받는다. 꿈속에서 복희가 사랑했던 남자는 할아버지역을 했던 배우가 1인2역을 연기한다. 이에 복희는 천연덕스럽게 “우리 할아버지랑 똑같이 생겼어요. 이름도 똑같아요” 하며, 연극적 규칙 자체를 비틀어버린다. 이와 중첩되어 숙희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는 추억의 장면은 사랑하지 않았다던 인물의 전사(前史)와는 다르게 애틋하게 전개된다. 웃음과 애수가 교차되는 두 커플의 장면은 시각적 층위를 두고 절묘하게 배치된 희극적 명장면이었다. 이러한 ‘중첩’ 의 효과는 마지막 장면에서 일관되게 지속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반전을 연출한다. 복희의 꿈속에서 등장한 엄마가 복희에게 건네주는 보석상자는 복희의 가방 속에서 진짜 보석상자와 도플갱어를 이루는 것. 별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 듯 <숙희씨네 코끼리>는 ‘꿈속의 꿈’, ‘연극속의 연극’이라는 독특한 구조의 미학을 달성해냈다.
4. 인간
<숙희씨네 코끼리>는 제목과는 다르게 코끼리는 없다. 그 빈자리엔 나무와 바퀴벌레가 자리하는가 싶더니, 무대는 지상과 지하가 자리를 바꾸고, 인간은 바퀴벌레로 변신한다. 가족들끼리 헤어지고, 만났는데, 울음과 신파가 들어와야 할 장소에 실소와 폭소가 들이찼다. 이 연극세계에서 인물, 사건, 공간이 고정된 의미를 거두고 미끄러진다. 대단한줄 알았는데 별거 없고, 장난스런 척하지만 진지함의 메시지가 있다. 가족이 제일이라는 환상, 인간이 제일이라는 환상, 연극이 제일이라는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관객들은 유쾌한 물음표를 가지고 그 다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조롱과 거리두기가 지속되어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다. 작품이 담고 있는 ‘인간중심에 대한 회의와 반성’ 이 그들이 보여준 능청스런 연기나 생뚱맞은 오브제 사용 등의 표현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배우들이 풀어 쓴 독창적이고 낯선 언어는 충분히 현대 관객들에게 어필했다. 심지어 그들은 공연 중에 무대를 돌아다니다가 관객인 ‘우리’를 발견하고 이렇게 묻고 답한다. “이 사람들은 누구지?” “오고 싶어 온 사람들이지!” 오, 맙소사, 우리까지 놀려먹다니.
축제가 끝나던 날, CYC5층 극장에서 상연된 극단 위드오즈의 <숙희씨네 코끼리>는 상자 맨 아래서 발견한 보석과도 같은 공연이었다. 흐뭇하게 아듀! 프린지.
5. 인디스트
어느 날 인디스트가 물었다.
“축제가 끝났는데 내일 나도 모르게 홍대오면 어떡하죠?”
여름은 갔고, 방학은 끝났다. 연극도 끝이다. 반팔티는 곱게 접어 서랍장에 넣어야 한다. 꿈같은 축제가 막을 내렸고, 일상의 공포가 엄습해온다. 이러나저러나 프린지는 내년에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허무할 줄 알았더라면, 애초부터 마음 주지 말 것을...
공허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축제에도 기웃거리는 것? 열심히 사는 것? 어쩌면 정신을 차리지 않고 홍대에 와서 추억을 되새기는 것도 방법이겠다. 내년에 벌어질 축제를 미리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환상의 기획. 축제 무대에 자신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가상의 연극. 끊임없이 안주하지 않고 미끄러져 놀이가 되는 일상의 전복. 축제의 일상화? 일상의 축제화!! 이러나저러나 예술은 얘기하는 것보다는 직접 하는 게 낫다. 세상이 험악하게 변하면 예술은 즐겁게 변하면 된다. 무대 뒤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했던 인디스트가 내년에는 어떻게 변해갈까? 올해 프린지네 [인디스트] 가 프린지네 [ ] 가 되는 축제라면? 상상은 계속된다! 연극만세.
2010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작
0827-0828 가톨릭청년회관 5층 니콜라오 홀
가족들은 지금, 어떤 문제와 직면해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족 간의 신경전이 극에 치닫는 순간, 미스테리한 불청객이 집을 찾아온다. 가족들은 달갑지 않은 불청객을 집에서 내보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은 불청객의 인도에 따라 환상세계로 넘어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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