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0. 15:05ㆍReview
열린 공간 속 열린 음률의 합, <잠비나이>
'서사(敍事)가 아닌 서경(敍京)의 사운드'
글_나도원
사진_삐삐롱스타킹
의자들은 중앙의 무대를 사면에서 바라보았다. 선물상자를 평면 위에 펼쳐놓은 듯한 구조는 연주를 사려 깊게 감싸는 조명과 함께 고도의 집중을 유도했다. 관찰은 곧 경청이 되었고, 음악은 놓이는 장소와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조각상과 회화의 전시효과처럼 의자를 차지한 허파와 공간의 공기에 더욱 잘 흡수되었다. 저마다 악기와 음향이펙트를 펼쳐놓고 앉은 세 남녀는 각각 정면과 측면 그리고 후면을 관객에게 보여주었으며, 이는 묘하게도 자신들이 지닌 다면성을 다시 입체로 일으켜 세우는 효과를 가져왔다. 물론 그 직전까지 어떤 이는 하나의 의심과 하나의 기대를 품고 앉아 있었다.
서울프린지네트워크와 두산아트센터가 공동 기획한 ‘프로젝트 빅보이’에 선정된 잠비나이는 세 축의 합(合)이다. 장르의 크로스오버라기보다는 영역의 크로스오버를 당차게 감행해온 것으로 보이는 심은용(거문고)과 김보미(해금, 실로폰, 트라이앵글)가 두 축이다. 그리고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한 포스트 하드코어 밴드 49몰핀즈(49Morphines)의 구성원으로 익히 알려진 이일우가 기타와 피리, 실로폰을 들고 세 번째 축을 채운다. 49몰핀즈는 현대국악 작곡가 원일이 오래 전에 발표한 ‘달빛춤’을 10분이 넘는 장중한 연주곡인 ‘The Moonlight Dance’로 재탄생시킨 바 있다. 국악을 전공한 멤버들이 모인 록 밴드가 창작국악을 실험적이고 강렬한 연주곡으로 (회고가 아니라) 회생시킨 특별한 사례였다.
이러한 조합의 실체를 실황으로 확인하기 전에 몇 가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부정적인 경우만 말하면 크게 둘이다. 나름의 경력을 가진 이들이 참 재미없는 절충점으로 타협하는 것이 하나다. 실험을 위한 실험에 몰두하며 서로 경쟁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의심, 혹은 우려의 정체는 전위적인 음악을 하(는 것으로 스스로 의식하)는 이들이 예술가연하지 않을까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이와 동시에 인디레이블 GMC 레코드를 통하여 발표한 앨범만으론 전모를 알려주지 않았던 잠비나이가 현장에서 드러낼 진면목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반복 루프로 채색된 배경을 두고 악기들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손끝에서 손끝으로’는 음반과 명백히 다른 풍경을 그렸다. 기호 같은 선율은 신호로 기능했고, 레코딩 버전으론 수긍하기 힘들었던 앰비언트를 정말로 구현했다. 대부분의 악기가 가지고 있는 타악기의 속성과 돌발성이 강조된 ‘나부락’은 만질 수 있는 미술처럼 재질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 거문고와 어쿠스틱 기타가 만들어낸 메탈 리프의 질박한 질주는 넉 대의 첼로로 메탈리카(Metallica)를 연주했던 핀란드의 아포칼립티카(Apocalyptica)와 비교해도 될만한 순간을 선물했다.
악기, 그러니까 재료의 가능성이 새로운 의미가 되는지 여부는 기교의 극한에 대한 실험이 아니라 담아내는 내용과 바라보는 지향에 의하여 결정된다. 개방성을 운운하며 집에서 방문을 없애버리겠다는 식의 관념이 실연을 앞서버리는 몰골은 보기에 안쓰럽다. 하나의 곡조차 이루지 못하는 실험은 태반이 자위나 자학에 머물고 만다. 다른 한편, 스타일리스트 타입 음악가들의 손에 공통으로 들려지는 딜레마는 형식이 이야기, 즉 내용과 감성을 잠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잠비나이엔 구조물을 세울 줄 아는 송라이터의 존재감이 확연했다.
그 증거물 하나는 코드 구성음으로 이루어진 간소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나무의 대화’가 보여준 내용과 형식의 조화이다. 2000년대의 중요한 음악경향이자 다른 장르에 광범위하게 파급된 포스트 록의 형식이 “성미산 개발 반대투쟁의 과정에서 부상당한 분과 주민들에게 바친다”로 시작하는 ‘말’과 조응했다. 대지를 향한 사상과 명상성은 포스트 록의 중요한 매력이기도 하다. 또한 음반에 수록되지는 않았으나 이 날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미로’ 역시 송라이팅과 구성의 중요성을 잘 드러냈다. 아울러 잠비나이의 곡들을 음반에 함께 담은 장본인인 조상현이 직접 만진 사운드도 이들의 연주와 곡이 효과적으로 도드라지게 했다.
꿈을 영상 대신 서사로 기억하는 수고는 썩 가치 있는 수고가 아니다. 서사(敍事)가 아니라 서경(敍京)의 사운드를 펼쳐놓은 잠비나이 또한 주지가 아니라 인상의 영역에 있다. 그렇다고 장르, 혹은 규정이 불필요하다는 생각이야말로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청자의 의미부여와 창작자의 도주는 숙명적이지만 관점에 따라 시선이 결정되고, 때론 시야가 더욱 넓어진다. 그조차 거부하면 어딘가로 흘러들어가 자칫 무화(無化=無花)에 그칠 수 있다. ‘나무의 대화’와 ‘미로’에서 60분이 넘는 곡인 ‘Light of Day, Day of Darkness’를 발표했던 노르웨이의 그린 카네이션(Green Carnation)의 선율을 떠올리는 건 괜한 소일거리만은 아니다.
우리는 크로스오버라는 단어가 얼마나 처참하게 훼손되었는지 알고 있다. 대중성 강박과 연주의 기능화의 결과인 국악의 라운지 음악화가 초래한 앙상함을 보아왔다. 국악과 퓨전의 관점으로는 놓칠 게 더 많은 잠비나이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하려던 참이 아니다. 목적인지 과정인지 더 지켜봐야겠지만 잠비나이는 세계음악과 한국음악의 문맥을 절로 연결시켰고, 재즈와 프로그레시브 그리고 포스트 록에 닿는 곳까지 나아갔다. 이렇게 캐릭터를 유지한 채 대립요소들을 한 흐름 안에 합(合)한 젊은 음악인들은 자기 이야기를 감추는 대신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선사한다. 이미 의심은 해소되었고 기대는 충족되었다.
프린지와 두산이 찾은 차세대 예술가 발굴육성 프로젝트
PROJECT BIG BOY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첫번째 Big Boy 0918-0919 솔로드럼아티스트 양태석
두번째 Big Boy 0925-1003 플레이위드 <인디아 블로그>
세번째 Big Boy 1007-1009 잠비나이
프로젝트 빅보이 블로그 바로가기
필자소개
나도원
잠을 좋아하는 음악평론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100beat’ 편집위원이다. 과거 ‘가슴’ 편집인, ‘보다’ 기획위원, ‘컬처뉴스’ 음악전문기자로 일했고, 광명음악밸리축제(2005-2006)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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