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2. 14:59ㆍReview
제 4회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 <Sin by Silence> (Anita Klaus, 2009)
“이것은, 그 질문들에 하나씩 답해보려는 우리의 시도이다.”
글_ 요끌로딘
Silence is a killer. 이 말이 가지는 무게감에 대해 몇 번이고 되뇌고 나서야 우리는 이 작품에 대해서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Pass it on! (이야기하세요!)’이라는 메시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감옥과 사회를 대비시키는 대신 오히려 한 가정, 그리고 그 가정을 지원하고 규제하는 사회의 시스템이 얼마나 감옥과도 같은지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사회에 내재된 폭력적인 권력구조에 대해서 두려움 없이 접근한다. 이 작품은 결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는 개개인의 여성들의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으며, 제도적, 사회통념적, 내면화된 권력구조, 즉 법망 ‘안’의 비정상성에 대한 질문을 통해 풍성한 논의를 열어놓는다.
Sin by Silence
*
우선 다큐멘터리가 자유롭게 시점을 바꾸어가면서 여성수감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여기에 그들이 갇혀있으며 뚫고 나와야 할 ‘구조’가 떠내려가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이 영화의 큰 얼개를 어떤 방향에서 추려내느냐에 따라서 이 영화에서 뻗어나올 수 있는 생각의 범위와 방향은 크게 달라지리라.
감독은 글렌다–그녀는 별거 중이던 남편을 쇼핑몰 지하주차장에서 차로 치어 숨지게 한 혐의로 1급 살인, 종신형을 언도 받아 복역 중이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글렌다의 모습, 그녀는 ‘무엇이 잘못되었을까’라 묻는데, 이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지만 동시에 관객들이 던져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글렌다를 비롯하여 교도소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여성 수감자들의 모임에 대한 뉴스 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의 초점은 그들의 ‘성취’에 있지 않다. 외면적인 성취, 그들이 주지사에게 편지를 쓰고 결국 재심을 받게 되었다는 ‘결과’에 머무르지 않으며, 글렌다, 브렌다, 로즈마리, 버질… 이러한 특정한 개인들의 서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선 이 재소자들이 교도소에서 만든 모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처음으로 흑막 앞에 선 로즈마리는 “난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면서 도망치듯이 화면을 벗어난다. 그들에게 ‘스스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가지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가는 이 짤막한 장면을 통해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간다. 침묵을 깬 이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sympathy(공감)’, 그리고 ‘sisterhood(‘자매애’라는 어쩐지 불만스러운 역어를 사용하기로 한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관객들에게 촉구한다. 그 공감 속으로 발을 디뎌보라고.
어느 날 내가 이 그룹에 왔을 때, 글렌다가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근데 나와 너무나 흡사한 거에요. 그녀는 아내였고, 아이가 세 명 있었고, 개를 길렀고..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나의 것과 똑같았어요. 그것은 우리가 사실 서로의 파트너였고, 자매와 같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어요. 이 그룹에 와서 이런 일을 겪은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뻐요.
*
이들은 이 공감대 위에서, 자신들의 고통을 ‘일반화’하기 시작한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고통의 언어를 타인과의 공감 속에서 소통 가능한 방식으로 바꾸는 것. 여기에서부터 이들의 문제가 서서히 우리에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흑막 앞에 선 버질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financially and psychologically)”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남편에게 의존적일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을 한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끈 부분은 “심리적으로” 어떤 이유에서, 자신을 감금하고 폭력을 가하는 이 상황을 깨고 나오기 어려운 것이라고 보는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 그것은 이 작품의 중요한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한 인간으로서의 실존적 고독, 그리고 어떤 공동체에 속하고자 하는 욕구가 우선 떠오른다. 또한 아이들의 문제-이것을 ‘모성’이라는 측면으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가 있다. 가정의 영역에서 아이들을 부양할 책임이 거의 전적으로 어머니 쪽에 머물러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이러한 가정의 영역 밖으로 강제적으로 밀려나게 되었을 때 우리 사회가 부모 중 쉽사리 어느 쪽을 공격하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양육의 문제는 분명히 모성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직간접적으로 가정 내에서의 여성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기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의존하는 상황-단순히 가부장의 특권을 휘두르는 것을 넘어-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버질은 다시 솔직 담백한 어조로 자신의 보스나 친구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못하는 남편이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설명한다. 그가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남편이 찾을 수 있는 가장 약한 존재이기 때문.
영화에서 언급되는 이별폭력의 문제 역시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 심지어 연인의 관계에서도, 한쪽의 의지와 고지를 가지고 이 관계가 깨질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주저 없이 폭력을 휘두른다. 그들은 이 상황에서 마치 탈옥하는 죄수를 단죄하는 간수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 피해여성들의 상황은 바로 감옥과도 같다.
브렌다가 다시 한 번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아이들을 홀로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하는 것이 흥미롭다. 레너드 박사는 단호하게 말한다. “처음에는 그런 상태가 되면 난 떠날거라고, 그리고 처음부터 그런 관계에 종속되지 않을거라 생각했죠. 그것은 저의 무지였습니다.”
*
이 여성재소자들의 살인이 도무지 자신을 끼워 맞출 수 없는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행위임을 인정하는가의 문제는 곧 이들이 자신의 행위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임을 인정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살인을 ‘우발적인 감정의 폭발’이라는, 심리적이고 일시적인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이 문제를 일면적으로 보는 것임은 글렌다의 예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재판을 그리는 시퀀스는 신문 활자 등을 통해서 “not unpredictable(예측 불가능하지 않았다)”라거나 “의식적이었다(she was conscious)”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노출시킨다.
이것이 시스템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의 문제는, 이들의 행위가 ‘정당방위’임을 인정하느냐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전문가들은 “피학대 여성증후군” -주기적이고 지속적으로 폭력을 당해온 여성이 가지는 주관적인 두려움, 폭력에 의한 결과를 예견하는 데에서 오는 공포심- 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려 하는 시도를 위법성 조각사유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는 이 영화가 우리 사회의 문맥에서 매우 중요하다.
FIWOM 일간 소식지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시피, 한국에서는 가정폭력에 의해 일어난 살인사건에서 (여성인) 가해자가 정당방위를 인정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간에 등장한 두 명의 경찰 공무원들처럼, 그들에게 살인은 다만 “감정의 폭발이요, 참을 수 있는 것”이며, 그들은 이 상황으로부터 충분히 ‘탈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만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가졌던 느낌이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틀렸다- 시스템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낙관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그것에 대한 비판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살인이란 어떤 돌발상황에 불과하며, 그렇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 ‘아이들을 생각하라’는 지극히 공공위생적인 답변을 내놓을 따름이다. 그들이 피해자들에게 강요하는 침묵 역시, killer다.
미국 개봉 당시 포스터. “감옥이 인생의 사랑보다 안전하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결국 ‘감옥의 안과 밖’이라는 ‘정치적’인 대비 –우리의 시스템이 안정적이고 정의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감옥에 갇혀있는 저 여인들이야말로, 이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가장 중요한 방증이다.
이들이 주지사에게 편지를 쓰고 공청회가 열리고 재심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매끄럽지만, 동시에 지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이들에게 있어 시스템은, 그 안에서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믿는 바와 같이 –그런 이들은 다른 이들도 그렇게 느끼기를 바란다- 효율적으로 매끄럽게 돌아가는 것이 전혀 아니다. 브렌다 등 여성 재소자들이 ‘law and process(법과 재판)’이 자신들을 범죄자로 만들었다고 단언하는 부분을 보라. 글렌다에게 1급 살인이라는 판결을 내린 배심원 중 하나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frustrated(좌절감을 느낀다)”고 토로하는 장면은 어떤가. 이것은 제도의 실패에 대한, 매우 솔직한 정서적 반응이다.
이들이 결국 재심을 받게 되는 부분은 어떤 면에서 법의 주요 원칙 중 하나인 ‘불소급의 원칙’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제도가 스스로의 미비함을 인지한 이후에도 그것을 되돌려놓을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거꾸로 보면, 이 상황은 법이라는 시스템의 안정성을 지탱하기 위하여 불소급의 원칙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정의의 원칙을 선택하느냐의 질문, 양자 사이의 윤리적 선택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분명한 것은, 불소급의 원칙을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앞세울 경우, 우리 사회가 가지는 지성의 미비함이 결국 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짐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브렌다의 선고공판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녀는 22년을 복역한 끝에 이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모든 이들의 삶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지만 결국 시스템은 이 앞에서 다만 어깨를 으쓱하며 ‘할 수 없지’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영화는 끝났고, 우리의 대답도 여기에서 마치지만, 우리가 답하려 한 질문은 계속해서 남으리라. 그러니, 계속해서 의문하고 답변하자.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
제 4회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
가정폭력 가해자를 끝내 살해하고만 여성들. 그 후, 그녀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집보다 감옥이 더 안전했던 여성들, 그리고 이제는 '가정폭력 없는 세상'이라는 꿈이 실현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여성들.
철창의 안과 밖으로 깊게 울리는 그녀들의 외침을 담은 다큐멘터리.
Sacramento Film & Music Festival (2009), 최고 다큐멘터리 부문 관객상 수상작
제 4회 여성인권영화제
2010 1006-1009 씨네코드 선재
주최_ 한국여성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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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요끌라+끌로딘=요끌로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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