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4. 14:28ㆍReview
모두의 공포, 모두를 위한 동화
제 4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앵그리 맨>
글_요끌로딘
폭력적인 가부장의 상태를 ‘앵그리 맨’이라는 외부자를 끌여들여 설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를 잠시 동안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려 놓았다. 주인공 보이의 상상 - 아빠가 앵그리맨이라는 인물을 내놓을 때면 끔찍한 악마로 변한다는 - 은 또한 어린 시절의 나의 상상이기도 했기에.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가해함, 그리고 그 앞에서의 무력함을 기억하면서 나는 몸서리쳤다. 약 2분에 걸쳐, 아빠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보이가 쫓기듯이 방으로 들어가서 공포에 떠는 장면이 이러한 두려움을 표현적으로 포착한다. 상영이 끝나고,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의 대화도 담배연기마냥 우리 자신의 트라우마를 한동안 맴돌았다.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필체에 그 상처의 구체성이 결코 묻혀버리지 않았다는 점은 이 영화의 미적 성취라고 할 것이다.
“I have to be quiet..”
작품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가정 폭력의 양상, 그것이 아이(집안의 약자)에게 어떤 심리적 상처를 남기는가의 문제의 너머를 생각해보자. 우선 ‘이야기하라’는 메시지,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왕(즉 국가 시스템)이 집(사적 공간)에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왕’이라는 거대한 ‘남자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점의 불편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은 시스템에 대한 지나친 낙관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결국 이 모든 것이 폭력의 ‘비정상성’만을 강조하는 가운데 가정 내 폭력과 여기에 대한 대응의 문제를 결국 ‘정상성으로 회복시키는 과정’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도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아빠의 폭력적 성향을 ‘앵그리 맨’이라는 분리된 인물을 상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약간은 다른 관점이 필요하게 된다. 우선 이러한 진단은 가정 폭력의 원인을 단일한 대상(그러나 전혀 구체적인 형상은 아니기에, 그 해결책 또한 결코 구체적이지 않다.)으로 설정하고 그것이 ‘교정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둔다.
공간적으로 보면 보이가 강아지, 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pass it on(이야기하라)”의 ‘깨달음’을 얻는 곳. 그 공간을 만들어낸 상상력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다. 비록 그 분노와 폭력의 근원을 구조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여기에 맞서서 그것을 밖에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게다가 그것을 시스템에 대한 지나친 낙관으로 축소시켜 버리기에는 그것이 아이들 –물론 이 작품이 반드시 아이들만을 관객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경험을 나누어줄 용기를 가졌던 아이들을 위하여”라는 엔딩 크레딧에서의 헌사를 볼 때 아이들이 중요한 청자인 것도 분명하다- 에게 주는 긍정적인 효과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폭력은 결코 일상적이어서는 안 되며,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역시 아님을 이 영화는 감동적으로 일깨워준다.
“Pass it on!”
이 영화가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선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부분을 결코 동화적인 상상력에 함몰되게 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빠가 국왕과 함께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아빠를 찾아온 보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엄마가 왔으니 나는 이제 가봐야 해요”라고 말하는 결말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난다.
두려워하는 보이를 엄마가 달래며 “아빠는 기계도 잘 고치시고, 컴퓨터도 잘 하시잖니..”라고 속삭이는 부분은, 폭력의 희생자들이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경제적, 정신적 굴레 앞에 굴복하고 심지어 이를 내면화하는 구조에 얽매이게 되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폭력이 벌어진 다음 날 아빠는 보이와 엄마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지만 보이는 그 선물 앞에서 결코 즐거울 수 없다. 가부장이 내리는 물질적 시혜는 폭력과 억압의 구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그 집을 뛰어나와서야 비로소 숨을 돌리고 낯선 ‘나의 집’에 대해서 고찰하게 된다.
보이의 편지를 받은 국왕은 아빠를 데리고 자신의 궁전으로 간다. 이 장면이 다소 허탈한 동화적 결론으로 빠져버린 것이 아닌지, 즉 왕이 비현실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아닌지 의심하기 전에 이 사건이 전개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선 ‘앵그리 맨’이 외부자라는 사실은 아빠의 폭력에 그 어떠한 알리바이도 제공하지 못한다. 아빠는 즉시 가정의 밖으로 나와서 이를 ‘교정’해야 한다. 그 교정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별개로, 그를 ‘격리’한다는 것은 가정폭력이 일어난 이상, 이른바 ‘정상가족’의 테두리는 더 이상 유효할 수 없음을 가장 간명하게 보여준다.
앵그리맨과 아빠 사이를 무 자르듯 단순하게 분리할 수 없기에, 아빠는 앵그리 맨이 저지른 폭력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한 정상가정의 틀에서 폭력을 재생산하는 것으로부터 강제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결국 영화는 ‘격리’가 단순히 재교육을 위한 임시적 방편이 아니며, 그 폭력적 구조를 깨뜨리는 과정에서 불가피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폭력의 악순환이 벌어지는 가정은 시스템의 개입을 통해서 해체될 수도 있다고 하는 이 결론은 우리의 상황에 대입했을 때에 –그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필치에 속아서는 안 된다! - 놀랄 만큼 급진적이다.
결국 <앵그리 맨>은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가정폭력의 양상과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정폭력의 재생산을 막기 위해서 그 가정의 해체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세대를 위한 동화’다. 가장 깊고 두려운 공포까지 가감 없이 그려낼 뿐만 아니라, 그 공포의 구조적인 원인과 해결책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결코 사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놀랄 만큼 단순하고 강력하다. 이 영화가 던져 놓은 화두가 이후 여성인권영화제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스스로의 반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도입부(incipit)’의 역할을 하였음을 고백하며 글을 마친다.
앵그리맨 Angry man (2009, 아니타 킬리 Anita Killi)
제 4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보이가 보는 아빠는 두가지 모습이다.
자상하고 따뜻한 아빠와 불같이 화내며 폭력적으로 변하는 앵그리맨 아빠.
보이와 엄마는 언제 화낼지 모르는 아빠가 무서워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또다시 앵그리맨으로 변해 키우던 금붕어가 죽고, 보이는 노르웨이 국왕에게 편지를 쓴다.
제 4회 여성인권영화제
2010 1006-1009 씨네코드 선재
주최_ 한국여성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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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요끌라+끌로딘=요끌로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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