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10. 14:57ㆍReview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 상영작
인형 영화의 거장 '이지 트릉카'의 <한 여름밤의 꿈>
글_ 윤나리
20세기 피그말리온 ‘이지 트릉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이지 트릉카의 [한 여름 밤의 꿈]은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이지 트릉카는 인형 영화의 거장으로 불린다. 그가 선보인 작품들만 살펴봐도 기존의 인형극이라는 차원을 뛰어 넘는 생명력이 엿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그가 창조해내는 아름다운 세계이며 그 안의 피조물들은 스크린을 마주한 관객들과 끊임없이 교감한다. 그의 이력을 살펴볼 때 눈에 띄는 것은 많지만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인형극과 인형 영화라는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인형 영화의 독자적 미학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인형극이 활발히 상연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연출기법을 내세운 체코의 '검은 극장(Black Theatre)'은 여전히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다. 체코는 유명한 인형극으로 손꼽히는 나라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체코와 20년 수교 기념으로 [돈 지오반니] 인형극이 상영되기도 했다. 인형극의 역사를 따져보자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명확히 밝힐 수 있는 뚜렷한 정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로 주술성과 관련된 연극의 형태이거나 각 민족의 문화적 특징을 나타낸다. 20세기 이후에는 현대적 색채를 입힌 인형극이 인형극의 역사를 이어 가고 있다.
인형극이 아닌 인형 영화?
- 뤼미에르 형제, <열차의 도착(1895)> -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의 첫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기차가 달려오는 장면을 영상으로 담아낸 것을 사람들에게 시사했을 때 극장은 놀람과 경악으로 가득 찼다. 일상에서 늘 보던 것이 영상 안에 나타나는 것이 신비하고 놀라우면서도 두려움과 불안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후 기차부터 달리는 말,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영화라는 프레임안에 차례차례 등장하게 되었고, 1900년대 초반 요술을 좋아한 조르주 멜리에스가 만든 ‘트릭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중국이나 일본같은 아시아권에서도 초기 영화사에는 서커스를 소재로 한 영상들이 꽤 있다. 이들은 일상의 소재로 시작해 상상의 소재(마법, 요술)까지도 감각적인 프레임의 세계 속에 펼쳐놓았던 것이다.
인형 영화는 단순히 인형극을 카메라로 담아낸 영화가 아니다. 인형 영화의 인형들을 실제 사람들로 대치시킨다면 우리가 익숙히 보는 영화와 다름없을 정도로 영화의 문법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숏과 숏의 구성, 클로즈업, 롱테이크와 같은 모든 요소들이 인형 영화안에 들어있고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왜 이지 트릉카는 새로운 연출기법이 가미된 인형 영화의 세계를 염원했던 것일까. 왜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닌 인형을 소재로 하여, 인형의 입을 통해, 인형의 눈빛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이지 트릉카, <한 여름밤의 꿈(1997)>
인형극의 인형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무대에 올라간 인형의 배후에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인형의 입으로 전달되는 것들, 보여지는 것들에 한계를 느끼게 되고 그 세계에 완벽히 몰입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인형을 인형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예술이 등장했으니 그것이 19세기의 ‘영화’다. 영화는 영화만의 예술적 온기를 불어넣어 인형을 인형으로 말할 수 있게 하고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이지 트릉카는 애니메이션 요소를 인형극에다 덧붙여 상상의 기표들을 증가시켰다.
영화는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재현하고자하는 세계를 상상의 힘을 빌려 완성시킴으로써 모종의 욕망을 해소시킨다. 초기 영화가 보여준 트릭(trick)들은 화면안에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마법같은 순간으로 자주 그려졌다. 보이지 않는 세계, 현재와 다른 그 세계는 사람들의 또 다른 유토피아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모체같은 것이다.
이지 트릉카가 만든 인형 영화의 미학은 비슷한 데 있는 것이 아닐까. 고대의 예술가들은 플라톤의 동굴 일화에서 비롯되어지는 그림자를 생산해냈다. 실제의 것이 아닌 실제를 모방한 어떤 것. 그들은 실제와 가장 닮아 있을수록 그것들의 예술적 의의를 높게 샀다. 이지 트릉카의 세계는 이와 반대다. 완벽히 현실과는 동떨어진 정신적 영역에서 화려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지는 예술적 세계를 구현한다. 인형극에서 멈추지 않고 그가 열정적으로 만들어낸 스크린 속 인형들은 많은 요구없이 우리를 그들의 세계로 인도한다.
2010 1027-1102 CGV송파
한여름 밤의 꿈 The Midsummer Night's Dream
이지 트릉카 Jiří Trnka Czech / 1959 / 76min / Digibeta / Color / Animation |
헤르미아는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해 연인 라이샌더와 도망자가 된다. 뒤를 쫓는 헤르미아의 약혼자를 피해 동굴로 숨어든 두 사람은 은밀하게 첫날밤을 치른다. 두 사람이 머무는 숲은 숨을 쉬는 것처럼 생생하고 모든 피조물은 생명이 있는 듯 정교하다. 세익스피어의 1594년 작 ‘한 여름 밤의 꿈’을 언급하면서 시작되는 <한 여름 밤의 꿈>은 인형 애니메이션의 시각적 창조력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입증하는 걸작이다.
이지 트릉카는 체코의 애니메이터로서 독창적인 미적감각과 뛰어난 기술적 완성도로 퍼펫 애니메이션의 전설로 불리고 있다. 프라하의 예술공예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 인형극단을 설립했으며, 이차대전 중에는 극단을 닫고 무대디자인과 동화책 삽화가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트릭 브라더”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만들었다. 이지 트릉카는 퍼펫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하지만 셀 애니메이션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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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나리
영화만 줄줄이 볼 수 있는 휴일을 원하면서도 정작 휴일엔 연애와 술과 잠을 즐기고 평일에 바삐 영화에 쫓기는ㅡ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
(자기소개 한 줄에 영화가 몇 번씩이나 들어가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그만큼 영화가 좋은 건지도)
nari.pea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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