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엄마의 육아일기] 주야연출, 나모엄마와의 인터뷰 - 2

예술가 엄마의 육아일기 2부

뛰다가 나무를 만나기까지

 

말_이주야(공연창작집단 뛰다 연출, 나모엄마)

정리_정진삼, 리경(인디언밥 편집자)

 

▲ 화천의 하늘 (사진=jin3)

 

과중한 업무로 쓰러지다

이주야 연출님은 화천에 오기 전까지 쉼없이 일하셨어요. 뛰다가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왜 이렇게 일이 많았던 건가요?

우리 팀은 제작 까지 같이 하니까 휴일이 별로 없어요. 9시에 출근해서 공연 없으면 6시까지는 배우 훈련을 하지요. 배우 훈련은 일상이고, 공연이 있으면 비상이고 (웃음) 게다가 순회공연이다, 교육사업이다... 우리가 다른 데에도 관심이 많으니까.

팀을 운영해야 하는 일들도 만만치 않아요. 우리팀이 월급을 받거든요. 우리가 공연 페이를 받은 것을 모아서 n분의 1로 나눠요. 그래서 받은 것을 월급에 맞춰 나누는 거죠. (웃음) 장부처리를 월급에 맞춰서 바꾸어야 하고... 또, 뛰다는 4대보험을 시작했어요. 얼마 받지 못하더라도 우리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권리를 보장 받자, 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자, 이렇게 생각해서요 (웃음) 이것에 대한 업무도 꽤 많아요.

뛰다의 사람들은 할 게 많은 거 같아요. 장면도 만들어야 하고,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한 기획도 생각해야 하고. 특히 연출이 더더욱 바빴을 거 같습니다.

일이 연출에게만 집중되지는 않았어요. 물론 일이 많기는 않지만... (웃음) 한명 연출할 때 한명은 무대감독하고, 사람이 없으면 미술감독하고, 의상도 하고, 조명도 하고... 그런데 일 많은 이야기를 왜 이렇게 하고 있죠? (웃음)

궁금한 건 뛰다가 일이 많았던 시기, 그 와중에 이주야 연출님이 쓰러졌잖아요. 그 때가 화천의 이주를 준비하던 때 였고... 그 과정을 이야기해주세요.

작품 만드는 일, 공연 다니는 일이 우리의 쉼 없는 일이었죠. 공연 다니는 일 또한 대학로 공연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은 순회공연도 있고... 또 교육사업도 찾고.. 그런 많은 일들을 감당하다 보니까 과로가 누적된 거죠.

 

▲ 뛰다<엘리스 프로젝트>(2009) (사진, 이주야 제공)

 

 <앨리스 프로젝트> 공연이 끝나고 쓰러지셨다구요.

<앨리스 프로젝트> 할 때, 뛰다와 같이하던 무대와 의상과 조명하는 친구들이 1년 쉬었으면 좋겠다, 말했어요. 그럼 너희들은 좀 쉬어, 내가 할게. 이렇게 말했어요... 요섭이 형이 연출을 하고, 나머지 제작을 제가 했어요. 의상에 미정이라는 친구가 도와주고... 가면, 조명, 무대, 인형을 제가 다 도맡아서 한 거지요. 그런데 <앨리스 프로젝트> 는 물량을 쏟아붓는 연극이었어요. 맨날 밤새서 만들고 그랬죠. 노동집약적인 연극에, 물질집약적인 연극이었죠.

배우들도 연습 끝나고 도와주고 그랬죠. 분배해서 서로 일을 나누고. 하지만 그렇게 일을 하고 나니까 속으로는 데미지를 크게 입었나 봐요. 나도 몰랐는데, 작품이 끝나고, 새 작품 준비하려고 있었는데, 다음날 못 일어나겠는 거에요. 단순히 감기인줄 알았는데.... 그 뒤로 쭈욱 못 일어난 거죠. (웃음)

제 주변에 과로를 일삼는 예술가들이 있어요. 폭주하는 기관차 같아요. 아무도 제동을 걸지 못해요. 이탈하기 전까지는.

그럴 때 일수록 몸을 챙겨야 하는데... 몸 챙기는 게 뭐냐면 먹는 것을 잘 먹어야 해요.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고. 그런데 연극하는 사람들은 그거 안하잖아요. (웃음) 점점 악화일로를 겪게 되는 지름길이죠.

내 경우에는 어떻게 되었냐면, 몸이 각성상태에 빠져서 잠을 안자도 일을 빠릿빠릿 하게 할수 있는 상태가 유지되는 거에요. 병원에 검사를 하러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설명을 해주시는데요. 우리 몸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교감신경은 공격에 대해서 몸이 긴장상태로 있는 거고, 부교감신경은 몸을 이완 상태로 두어서 릴렉스시켜주는 건데요. 보통은 50:50, 하지만 현대인은 스트레스가 많아서 텐션이 60, 릴렉스가 40 이래요. 근데 저는 98:2 가 나온 거에요. (모두놀람) 의사선생님이 왜 이러고 살았냐고... 이상이 있는 건지 저도 몰랐죠. (웃음) 한 번에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계속 몸에 쌓이게 된 거죠. 무서운 건 내가 내 몸과 내 맘을 자각하지 못하면, 치명적인 결과가 오더라구요. 바로 볼 수 없게 만들어요. 작품도, 자기상태도... 오로지 일만 보게 되는 거에요.

뛰다의 책임감, 부담감 때문도 있었을 것 같네요.

뛰다는 다들 자기 책임감을 갖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것보다는... 지금 생각하면 오지랖? 나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했거든요. 근데 3년 동안 나 없는데도 잘되더라구요 (웃음) 허술하게 보이면 허술해 보이는 대로, 그렇게 잘 굴러가더라구요.

욕심이었죠. 내가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안하면 안될 거 같고, 해내려면 어느정도까지는 해내야 하고 딱 깔끔하게 마무리되어야 하는... (웃음) 미적인 것과 그 성취감이 만났을 때 그 쾌감있잖아요. 그걸 너무 부린거지... 근데 그게 잘하는 건 줄 알고... 그게 필요할 때가 있고, 놔둘 때가 있고... 모르겠으면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봐야할 때가 있어야 하는데, 마음으로 보고 그걸 채워가는 게 아니라 일단 만들어놓고 보자, 하고 생각했던 거죠.

한편으로는 열정이랑 성취욕, 목표의식 같은 것이 뛰다를 굴러가게 한 거잖아요.

나는 누구나 욕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배우욕심, 연출은 연출 욕심, 팀이 잘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어야 하죠. 그러나 그게 서로 보듬는 욕심일지, 탐욕일지 그 과정은 따져봐야 해요. 결국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면 탐욕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몸이든 맘이든. 그 기준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겠지요.

물론 뭔가를 하고 있는 중간에서는 발견하기 힘들 수 있어요. 평소에 노력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아주 어려운 일이에요. 만약에 나도 계속 건강했다면 그런 생각을 못했겠죠.

내가 뭐하고 있지? 내가 왜 하고 있지? 내 몸과 마음은 뭘 원하지? 그래서 내가 마음 안 아프고 몸 안 아프고 할수 있는 정도를 잘 아는 것! 잘 아는 것이 중요해요. 하루 이틀하고 일이년하고 말게 아니라면... 과감하게 선택해야해요. 선택의 기준은 뭐가 나를 기쁘게 하는가, 뭐가 내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가, 현실적으로 나를 살아갈 수 있는 게 뭔가, 예를 들면 돈도 필요하거든요. 그게 내가 지금 궁핍한데 그 상태로 나를 방치하는 건 그게 해가 되는 거거든요. 나를 잘 살게 하는 그런 선택들을 해야되요. 꼭! 안 그러면 짧게 밖에 못해요. 젊을 때 달릴 수 있겠죠, 폭주 기관차처럼. 하지만 그렇게 끝이에요. 길게 오래 봐야해요.

 

 

▲ 화천 예술텃밭의 허수아비 이정표, 이주야 연출이 손수만든 팻말 (사진=jin3)

 

엄마와 시간을 보내다

연출님은 화천으로 이주하기 이전까지의 경력이 더 많고, 더 활동적이었어요. 뛰다가 화천으로 이주할 동안 이주야 연출님은 요양(?)을 하셨지요. 그 시기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가장 큰 일을 했죠. 내 인생에서 가장 큰일.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낳았으니까. 그리고 인간 이주야가 성장을 했어요. (웃음) 20년 만에 처음 엄마와 시간을 보냈어요. 어릴 때도 엄마가 일을 해서 떨어져 지냈거든요. 독립한 이후에 이렇게 오래 나의 엄마와 나의 자매와 시간을 보낸 게 처음이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게 일종의 (엄마가 될) 준비였죠. 몸 정화하고, 잘 챙겨먹고, 마음 쉬고, 엄마와 대화를 하고...

엄마와 시간을 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엄마가 젊을 때 저를 낳으셨어요.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내 나이로 치면 나는 고3이었죠. 내가 고3 때 서울로 와버렸지요. 그때 헤어진 거죠. 이후로 집에 내려가는 일은 1년에 한두번? 나는 경제적으로도 독립 하겠다 선언하고 그랬고... 그러다가 몸져 누워서 할 수 없게 된 상황이 온 거죠. 그래서 병수발을 엄마와 (결혼한) 동생이 돌아가며 들었죠.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지했던 거고.

나 혼자 잘살 수 있어. 혹은 나는 잘사니까 가족도 잘살겠지, 잘살다가 어쩌다 해후만 하면 돼, 그리 생각했던 게...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거죠. 물론 처음부터 좋지는 않았구요.(웃음) 따로 살았던 세월이 기니까... 맨날 전화로만 마주하다가, 실제도 같이 지내니까... 다른 점들이 많이 보였죠. 낯설었죠. 처음에는 어색했어요. 그렇잖아요. 고등학교 때 집을 나와서 독립적으로 살았는데, 지금 이 나이에 엄마가 해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 (웃음)

아들의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엄마를 보면, 엄마는 위대한 존재인거 같아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헌신적으로 잘해주잖아요. (웃음)

맞아요. 나는 너무 어릴 때부터 엄마랑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절대로 기대면 안 된다, 그런 생각으로 서울로 학교를 선택한 거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을 졸업을 한 거고... 연극원 간다는 말도 절대 안하고, 돈 벌어서 등록금내고, 입학하고, 성적표가 집으로 가서 부모님이 알게 된 거고... (웃음) 나중에 말씀 드렸죠. 그럼 동의를 해주시고 그러셨는데... 나중에 그런데 몸이 아프고 엄마와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아, 기대도 되는 거구나, 기대도 되는데 혼자 잘난 척 한 거구나... 그런 반성이 들었죠.

기억해보면, 애를 낳는 순간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옆에서 “애를 낳는 건 누구나 다 힘든거야, 지금 이순간이 지나면 너는 엄마가 되어있을 거야” 진통하는 내내 귓속말로 전해주셨어요.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눈물이 그렇게 나더라구요.

내 평생 보내지 못한 시간을 3년 동안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았고, 내가 왜 엄마를 존경할 수밖에 없고, 어떻게 엄마가 나의 영원한 빽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된 시간이에요. 지난 삶들을, 머리로만 알던 삶들이, 엄마의 모습이 내 마음에 쿡 박혔어요. 나모의 첫 웃음소리가 내 가슴에 박혔듯이.... 그렇게 내 마음에 쿡 박혔어요.

 

▲ 화천 예술텃밭의 허수아비 이정표, 이주야 연출이 손수만든 팻말 (사진=jin3)

 

딸은 엄마가 되다

요양이 끝나고 복귀할 줄 알았던 이주야 연출님은 한해를 더 쉬게 되었습니다. 바로 아기가 생겼기 때문인데요. 그 이야기를 해주세요.

원래 결혼할 때부터 아기를 갖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결혼한 지 10년이 넘으면서 아기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죠. 아기는 자기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힘들어도 즐겁게 살고 있지만, 아이한테는 우리가 갖는 어려움과 힘듦을 전해줄 수는 없기에 아기를 갖지 말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아픈 몸이 나아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하니까 몸이 엄마가 될 준비가 되었나 봐요. 사실 임신했을 때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하나 망설였어요. 왜냐면, 너무 부끄럽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고 그랬죠. 엄마로서는 늦은 나이이니까. 다들 화천으로 이주해서 정신없었던 상황이기도 했고.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뛰다의 식구들이 너무 좋아해주었어요.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했어요. 그래서 나모는 뛰다의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년간의 요양이 끝나고 다시 1년간의 임신이 시작되었죠.(웃음) 저의 엄마아빠, 부모님이 매우 좋아하셨죠. 손주는 못 보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임신했다고 하니까 (웃음) 그전까지 불효를 나모로 인해서 한 번에 해결했어요.

출산 준비 과정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저는 임신하고 나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임신에 관한 책, 출산에 관한 책을 쌓아놓고 읽었죠. 원래 그런 책은 전혀 읽지 않았는데... 임신하고 나서는 엄마의 몸과 아이의 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저는 출산에 대한 준비를 했던 거 같았어요. 내 몸의 변화를 머리로 이해하면서 몸으로 느낀 거죠. 저는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임신한 엄마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몸이 변화하고 아픔이 오면, 그 이유를 알고 아픈 게 더 낫다는 거에요. 임신과정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어요.

출산일이 다되어서 병실에 있는데,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는 거에요. 정말 상상할수도 없는 아픔이 온 거죠. 눈물이 흐르는데 그 아주 다행스럽게도 내가 기다리던 대기실이 창문이 바로 있었어요. 눈물이 흐르고 밖을 보는데 꽃잎들이 5월인데 바람에 날리고 누가 그러면서 아픈 와중에도 밖에 꽃잎이 날린다고 누군가에게 얘기하면 연극한다고 저것이 또 꾸며서 얘기한다고 얘기하겠지.(웃음) 별별 생각을 다했죠. 꽃잎 날리는 모습에 우리 나모는 이리 아름다운 날 오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게 고통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분만은 순탄하게 되었나요?

진통이 늦게 시작돼서 사람들이 나를 쳐다도 안 보고 있었는데. 내가 먼저 아기 머리가 보인 거에요.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요섭이 형(남편)은 잠시 밥 먹으러 나가고. (웃음) 애가 나오려고 하니까 사람들도 너무 놀란 거에요. 서너 시간밖에 진통을 안했는데 애가 나오려고 하니까 서둘러 가족 분만실로 들어갔죠. 그러고 있는데 형(남편)이 들어왔더라구요. 가족분만실 들어가면 다들 사진 찍을 거라고 큰 카메라를 준비하고 그랬더든요. (웃음) 하나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셋팅도 못하고 결국 아이폰으로 찍었죠. (웃음)

내가, “아, 그래 지금 나무가 나오려하고 있어.” 이게 느껴져요. 마치 내가 힘주는 거 빼곤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몸이 힘주고 싶어져요. 근데 그 때 확 힘주면 안 되고 아이랑 같이 힘줘야 하는데, 옆에서 같이 힘주는 그걸 하래요. 그래서 했지요. 되게 아파요. 근데 그 시간이 오래되면 난산이 되거든요. 두 시간이면 난산이에요. 한 시간도 힘들고... 근데 나는 다행히 여섯 번 힘주고 애를 낳았어요.

와, 축복받으셨네요.

더 길었으면 내가 산모로 치면 나이도 많으니까, 체력도 안 되고 위험할 수도 있었겠죠. 다행인 게 들어간 지 10분 만에 애를 낳았어요. (웃음) 그래서 사진도 아이폰으로 찍을 수밖에... (웃음) 호흡을 여섯 번 했는데 아기가 빠져나오는 느낌이 나는 거에요. 그래서 호흡을 했더니 나모가 나왔어요. 형이 탯줄을 잘랐거든요. 원래 그런 거 무서워해서 덜덜 떨면서 탯줄 자르고 아이를 데리고 오는데, 그 아이가 빛이 나더라구요.

피 다 묻어있고 눈도 못 뜨고 이렇게 부어있고 이런 애가 뭐가 예쁘겠어요. 그런데 빛이 나요. 형(남편)은 진짜 눈물이 없는 사람이에요. 평생에 몇 번 안 운 사람인데... 막 울면서 이렇게 안고 오는데요, 빛이 나는 어떤 아이가 나한테 미소를 짓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미소 짓지 않거든요. (웃음) 어떤 아이라도 나오는 순간만큼은 후광이 있을 거 같아요. 와서 젖을 빨리게 하는 그 순간에 빛이 나는데, 내 눈에는 눈물이 계속 흐르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아기와 아기가 내 가슴에 내 젖을 먹을 때 그 감촉. 이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같은 그런 순간이었어요. 남자는 절대로 가 볼 수 없는 영역이네요. (한숨, 웃음) 

 

▲ 화천 예술텃밭의 카페에서 인터뷰하는 주야연출/나모엄마 (사진=mij)

 

뛰다가 쉬다가 나무를 만나기까지

아기의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어요?

나모가 나무의 고어에요. 뜻이 나무인거에요. 그래서 성은 이미 정해놨었어요. 형 성이랑 내 성이랑 합치면 배+이. 배이나모. 근데 배이로 하기로 하고 배이에 어울릴만한 이름을 찾는데... (옆에서) 배이글, 배이지, 배이비 (웃음) 물, 나무, 강, 하늘 어쨌든 이런 자연 이름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나모가 생긴 것도 한창 화천에 와서 강을 바라보고 있을 때 생긴 거였고. 그래서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다른 거창한 거보다, 나무가 남들한테 강요하지 않아도 자기의 아름다움과 자기의 것들을 나눠 줄 수 있는, 또 나눔을 강요하지 않는. 있는 존재만으로 힘이 될 수 있는 게 나무다, 그래서 나무라는 이름을 선택하게 되었죠. 그런데 아기는 딸 인거죠? (웃음) 네. 나무를 하려다가 나모라고 했어요. 배씨가 이름짓기가 힘들어요.(웃음) 배나무 얼마나 웃겨요.

이름을 신청하는데 재밌는 사연이 있다고 들었어요.

‘배이나모’ 라는 이름을 군청에 신청하는데 세 번 퇴짜 맞았어요. 나는 양성 쓰는게 합법화된 줄 알았어요. 그 때 한창 그런 얘기가 있어가지고요. 아직 안 됐더라구요. 그래서 배 이나모로 해야 한다는 거에요. 언젠가 나중에 양성사용이 합법화 될 거라고 믿고 올리자고 했죠. 두 번째 갔는데 또 안 된다는 거에요. 왜 안되냐고 했더니 ‘이’ 는 한자고 ‘나모’ 는 한글이잖아요. 성을 빼고, 이름에 한자랑 한글이 같이 있으면 안된대요.

정말 말도 안되네요. 아이의 이름을 부모가 짓겠다고 하는데 (울상)

그래서 그날 내 일기에 뭐라 적었냐면, “이 땅에 내가 생명을 낳았고, 이 생명을 등록하라해서 등록을 하러 왔는데... 이렇게 규제가 많아서 어떻게 아이를 낳겠나. 나는 단지 이 아이를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서 키우고 싶을 따름인데 규격에 안 맞는다고 안된다고 하니 이를 어찌할까.”

결국은 너무 화가 나서 하지 말까 하다가, ‘아니다. 그렇게 뜻을 꺽으면 안 된다’ 해서 그럼 나모에 한자에 붙이자. 나중에 한글이라 하고. 필요에 의해서... 마치 이두처럼. 근데 또 퇴짜 맞았어요. 나무 ‘모(栂)’ 자가 사람 인명에는 쓰지 않는 한자래요. 이번엔 그 쪽도 너무 미안해하는 거예요. 여기 면사무소가 되게 친절해요. 사람이 없으니까 출생신고 하러 오면 좋아하고. 결국은 ‘모’ 를 무슨 자를 썼냐면 ‘아무개 모(某)’ 를 썼어요. 김모씨, 모모씨 할때 그런 자에요. (모두 웃음)

그런데, 그 모씨를 붙이면서 인연이라고 생각한 게, 뛰다의 작품 중에서 <고슬고슬> 이란 작품이 있어요. <고슬고슬> 의 주인공이 소녀인데 그 이름이 아무개에요. 되게 씩씩하고 단순한 친구에요. 그걸 생각한 다음에, ‘아, 아름다운 아무개? 씩씩한 아무개 마냥, 단순하게 잘 살아준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배이나모가 되었답니다.

 

▲ 배요섭+이주야 연출가 부부의 아이, 배이나모 (사진 이주야 제공)

 

나모는 잘 자라고 있나요? 나모가 14개월이 되었지요. 말을 잘 듣는 아이인가요?

말을 잘 듣고 안 듣고, 보다는 내가 그 존재랑 어떻게 지내는가의 경우에요. 뱃속에 있을때 와는 또 다른 문제더라구요. 뱃속에 있을 때가 좋아요. 어쨌든 내 몸에 있는 거니까. ‘나오면 고생이야’ 라고 어른들이 말을 많이 하더라구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뱃속에 있을 때는 내가 책읽을 때와 몸을 움직일 때 함께 했지요. 충만감이 있어요. 이 아이와 함께 보내는 그런 느낌들이 있었는데, 애가 밖으로 나와서는 좀 다른 거예요. 낯선 존재가 내 옆에 있어요.

신기한 게도 엄마들이 그런 얘기를 좀 공통적으로 하세요. 아이가 낯설다는 말.

뱃속에 있을 때랑 또 다른 느낌이지요. 한 존재가 딱 있어요. 내 옆에. 근데 이제 앞으로 내 옆에 항상 있을 존재에요. 모르죠. 딱 누구처럼 20년만 같이 있을지 (웃음) 그 존재가 떡하니 있는데 낯설기도 하면서 이게 도대체 뭘까? 이 존재가 뭘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되게 낯설었어요. 안 그럴 줄 알았거든요. 남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존재가 떡하니 있으니까 난 어떻게 만나야할까. 이제 막 폐로 호흡하는 것을 알게된 존재인데. 이 인간세계에 적응 할 수 있는 건 ‘호흡’ 밖에 없는데..

아이에 대한 관찰 때문인가요? 관찰을 통해 엄마의 아이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건가요?

관찰이라면 관찰이고,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나모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배워요. 나는 너무 이미 세상의 감각에 익숙해져 버렸잖아요. 내가 살아온 사회. 그 조직에 이미 길들여져 있는거죠. 책을 통해 알게 된 건데, 얼마 안된 아기는 눈이 안보이고 후각, 후각보다 더 강한 건 촉각을 통해 느낀대요. 어떤 생명이 온전한 그 상태로 있었다가, 막상 나와 보니 이 세계는 갑자기 너무 밝은 곳이고 이상한 세계잖아요. 얘가 인지하는 건 다른 방식이고. 하는 말도 다른 거고, 우는 게 아니라 말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기가 뭐라고 하는 데 내가 이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떤 감각으로 들어야 할까? 삼십구년을 살면서 굳어진 내 감각과는 다르게 얘는 전혀 다른 감각을 가진 존재인데... 그러면서 얘는 어떤 생각을 할까? 너는 지금 어떤 걸 느끼고 있니? 내가 평생 생각도 못했고, 맞닥뜨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런 세계를 저에게 경험시켜 줬어요.

초반에는 나모를 하늘아기라고 불렀어요. 얘가 아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하늘 아기구나 하면서요. 근육도 컨트롤 못하고 꼬물꼬물거려요. 애들은 움직이는 게 신경들이 다 연결이 안되어 있으니까, 전달이 안되니까 다 각각이 움직이는 거에요. 살아있는 거에요. 명령하는 게 아니니까. 100일 이후부터는 조금씩 세상을 알게 되고, 팔도 움직여보고, 뒤집기도 하고, 그러면서 하늘아기의 표정들은 없어지는 것 같아요. 다 까먹어요. 눈이 또렷또렷해지고 점점 이 세상 아기가 되어가는 거죠. 나모는 이제 돌이 지났죠. 작년 10월 달에 혼자놀다가 문 열고 기어나와 “엄마” 그러더라구요.

점점 자라는걸 보니 대견하고 그래요. 한여름에 쑥쑥크는 풀 처럼 커요. 신기해요. 만감이 교차하면서 아이를 보게 되고. 나모를 보고, 나모한테 배우고, 나모와 잘 소통하기 위해서 잘 지내기 위해서 노력을 해요. 지난 시간은 그렇게 지내온 1년 4개월이었던 같아요. 

 

▲ 화천 예술텃밭의 연습실 안 연출실 (사진=jin3)

 

엄마와 예술가, 만남을 모색하기

어느덧 시간은 3년이 흘렀습니다. 연출가 이주야에게는 어쩌면 공백기일수도 있겠지요.

제가 나모를 데리고 복직을 했어요. 뛰다의 아이들이 많은데, 아이를 키우는 방식들이 좀 달라요. 다 집에 상황에 따라 다 다르기도 하고... 아기를 데리고 복직을 한 것은 제가 첫 케이스에요. 제가 이걸 잘 실현을 해서 성공을 해야 혜진연출가(주황이 엄마), 그 다음 아이를 가진 친구들도 이어받을 수 있겠죠. 뛰다에서 이 방법이 가능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리고 예술가인 엄마한테도 또 그 아이한테도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좀 두고 봐야 할 거 같아요.

원래 아기일때는 엄마와 아이를 분리시키면 안된다고 들었어요.

나모는 6개월부터 연습실에 놀러와서 연극하는 것을 보고 자랐어요. 같이 노래도 부르고 (웃음) 어렸을 때부터 자극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의 삶이고, 나모를 들여다 보는 삶이기 때문에 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 그랬죠.

내 작업의 영역이 달라져요. 내가 나모를 데리고 예전처럼 연출을 하거나, 조명을 달러 다닐 수는 없지요 (웃음) 내가 했던 일의 대부분이 그것들인데... 그런 고민들이 있죠. 그럼 내가 뭘 하지? 그러면 내가 연출가 이주야인가? 그럼 뛰다에서는 뭐가 필요하지? 나와 나모는 뛰다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지? 이런 고민들이지요.

이제 실험 단계에요. 나모를 데리고 내가 복직을 하고, 살아 남을 것인가, 뛰다와 함께 뛰다 속에서 나모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그리하여 우리 삶이 연극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일터와 가정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녹아들 수 있는가, 녹아들어 있는데 또 너무 구분되지 않고 있으면 그것도 안 되잖아요. 공존하면서 육아는 육아대로, 일은 일답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죠.

엄마와 예술가가 함께 존재하기. 뛰다의 프론티어 정신이 또 한번 발휘되는 것 같아요.

내가 아니면 누가 이걸 시도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잘났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게 좀 힘든 일이에요. 뛰다에 일이 되게 많거든요.(웃음) 그리고 그런 영역을 찾으려면, 일이 뭐가 비어있는지, 또 어떤 일이 개인에게도 만족감을 주는지 좀 봐야 되는 거고.

엄마가 되어서 고민하는 예술가들한테는 이러한 엄마-예술가로서 공존하는 경우가 성공하든 혹은 생각보다 만만찮은 일로 느껴지든, 어떤 제시점을 줄 수 있는 사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엄마-예술가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한쪽을 포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안고 가야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좋은 것도 있고... 한편으로는 지금 마음이 고생을 하고 있어요. 욕심을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사실 일이 또 다시 이렇게 진행되면서 내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보이니까 그게 좀 속상한 거지요. 예전 같으면 막 단시간에 끝냈을 일들이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리는 일로 변한 것이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들이 달라지니까 다른 영역에서 내가 했던 일 만큼의 충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

이런 게 이제 내가 찾아야 하는 부분이면서 내가 나를 좀 다스려야 하는 상황이고요. 물론 나모와 복직을 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팀은 활력소가 된다는 거에요. 점심시간에 나모가 와서 배우들하고 있으면, 지친 배우들도 힘을 내요. 아기들이 있으면 공기가 따스해지잖아요. 그런 것들이 좀 서로를 더 배려하게 해준다고나 할까.

말로만 같이 사는 사회가 아니라, 말로만 책임져야 되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예술과 아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같이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생각들. 어리지만 지금 같이하는 뛰다의 신입단원들도 이런 상황을 몸소 체험하고, 깊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이와 함게 복직한 것이 장단점이 있지요. 바라기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잘 찾아서 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구요. (웃음) 사실 아이랑 같이 출근하는 것 만으로도 엄청나게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와서 보니까 또 나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이더라구요. 예를 들어서 뛰다의 공간이 정리가 잘 안되어 있었어요. 나는 내 일터가 지저분하거나, 정신없는 거 되게 싫어하거든요.(웃음) 그래서 한달간은 나모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 모든 공간을 다 정리했어요. 때마침 예술텃밭축제랑 연관이 되어서 잘 됐지요. 공간 정리를 다 하면서, 삼년동안 쌓여있던 인형들, 오브제들 정리를 하고. 보관하기 힘들어진 애들(인형들)을 태울까 하다가, 인형들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거기에 이름표를 달아주었어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있는 친구가 주인공을 했던 ‘진둥이’ 라는 친구거든요 우리 전통극에 나오는 단순하면서 힘있는 친구에요. 새로이 쓰임새를 받은 모든 애들의 이름을 붙여주고, 그들과 함께할 우리의 가면들을 다 달아주는 일을 했지요.

 

▲이주야+배요섭 연출 부부는 임신기간 동안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업을 했다. 하루하루 누군가가 그림을 그리면, 거기에 글을 달아주는 방식이었다. 출산 이후 잠시 그쳤던 이 그림일기를 다시 시간내서 시작하려고 한다. (사진, 이주야 제공)

 

어떻게 보면 지금은 작게 보이는 예술들이 결국에는 제일 커지는 것 같아요. 변방에 있던 예술이 언젠가 중심에 서고. 엄마-예술의 가능성이 지금은 작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믿는 것 중에 또 하나는 ‘길은 길을 부른다는 것’. 그리고 ‘인연은 인연을 만든다는 것’ 될 수 있으면 좋은 인연들, 될 수 있으면 힘든 길이라고 생각되지만, 나한테 만족을 주는 길. 그런 길을 선택하세요. 힘든데 만족도 안돼, 그럼 뭐하러 해요. 그럼 가다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동안은 나도 내가 힘든데 만족도 안되는 생활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더라구요. 아프기 전에 쾌감이 있었지만 그게 진짜 쾌감인 줄 알고, 충족감인줄 알고. (웃음) 내려놓기, 이런 말이 있지요. 남들이 진지하게 하는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요. 놓아버리는 순간에 보이는 게 또 따로 있습니다.

요즘 젊은 창작자들의 딜레마가, “행복하려고 연극했는데, 연극하니까 안 행복하다” 에요. 제 주변에는 다들 이런 상황에 처한 것 같아요.

근데 그건 저희 때도 있었어요. 사실 연극이라는 게 다른 예술과 다르게 사람과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 연극이잖아요. 처음엔 그게 좋아서 시작을 했는데, 다른 것들은 혼자 해결하면 되지만, 사람이 만난 관계들을 조율을 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에서 항상 줄다리기를 해야하고, 그 안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잖아요. 인간사는 것과 너무 닮아있어요. 그래서 연극은 재미있지만 그래서 많이 힘이 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하려면 꿈을 꾸어야 되요. 좋은 꿈을.(웃음) 그리고 없는데 찾지 말고, 내 마음에 있는 걸 찾으면 됩니다.

 

▲ 이주야(좌엄마), 배요섭(우아빠), 배이나모(아래딸) 가족사진

 

 

 예술가 엄마 이주야는

 2001년, 뜻 맞는 이들과 함께 "뛰다"를 만들다.

 "뛰다"에서 연출로 활동하다가 2010년 잠시 휴직하다.

 2011년 나모를 낳고서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다.

 2012년 나모와 함께 "뛰다"에 복귀하여 다시 출발선에 서다.

 상자 속 한여름 밤의 꿈 (2001-2003),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 (2002- 2009),또채비 놀음놀이(2003-2005), 그림자 그림자 (2006) 연출하다. 앨리스 프로젝트(2009)의 가면,인형,무대,조명을 맡다. 제13회 서울어린이연극상 연출상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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