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로젝트 잠상 <사라지는 사물들> 잠상, 상상, 단상, 관객, 묵시록

2013. 7. 31. 14:19Review

 

제 15회 서울변방연극제 리뷰

잠상, 상상, 단상, 관객, 묵시록

프로젝트 잠상 <사라지는 사물들>

 

 

글_정진삼

 

1.

소멸은 소외의 다음 단계다. 프로젝트 잠상은, 인간의 소외된 흔적인 '사물' 을 통해 소멸의 단계를 재현해 낸다. 그리고 이들은 ‘슬프다’ 고 말하는 이주민/원주민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리하여 사랑했던 자취를 상실한 시인의 넋두리는 이렇게 바뀐다. 슬프다 / 내가 살아왔던 자리마다 / 모두 폐허다.

올해 서울 변방연극제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추적하고, 사건일지를 뒤적여 ‘예술’에 ‘사실’을 접목시킨다. 그리하여 변방연극제의 참여예술가인 잠상은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 - 미니멀하고, 마이크로한 관찰법으로 폭주했던 근대화의 자취를 되살핀다. 그들이 눈여겨본 것은 민주화/산업화의 결과로써 탄생한 도시의 이면에서 사라져간 사물들이다. 

 

 

2.

전시/공연은 아르코미술관 스페이스 필룩스에서 열렸다. 그간 잠상이 해왔던 거리의 작업과는 사뭇 다른 느낌. 화이트박스의 깔끔함이 전시된 오브제들에게 엄숙함을 요청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각각의 면에는 그간의 도시내시경 시리즈가 전시되고 있다. 중앙에는 세 개의 구역들이 차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위쪽 구역의 테이블에는 비죽 솟은 나무와 이를 덮은 모래가 있다. 중앙 구역에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매개된 사물들이 도르레에 지탱하여 사방으로 산포되어 있다. 쓸모를 다하여 버려진 일상의 사물들, 이를테면 벽시계, 저울, 라디오, 판넬, 분무기 등등. 아래쪽 구역에는 잠상과 함께 동행해온 '문' 들이 차곡차곡 개어져 쌓여져 있다. 축제의 거리에서 세워져 있던 문(門)들이 일제히 누워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공연을 앞두고 잠이 든 배우들 같은 느낌이랄까.

각 편에 자리한 빼곡한 글자의 종이들, 영상과 더불어 헤드폰 사이로 소곤거리는 사연들은 도시민의 이야기를 말한다. 질문은 소거되어 있으나, 텍스트와 사운드를 통해 잠상이 물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설명하는 이들의 말 속에선 어쩔수 없었다는 체념과 잘될 줄 알았다는 낙관이 교차한다. 신기하게도 강제적으로 도시를 계획하고 개발을 수행했던 정부 당국에 대한 분노는 크게 감지되지 않았다.

이처럼 잠상은 타락한 도시와 타락한 사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지역민들의 말에 가만가만 귀를 기울인다. 은유적 상징기호들과 시적인 분위기, 다층적 영상을 통해 관객의 감각에 부드럽게 접근하고자 하는 의도가 느껴진다. 따라서 작품과 감상자의 관계는 감성적 혹은 중립적으로 설정되는데, 그런즉슨 가치판단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사람들은 왜 어쩔수도 없는 도시화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대신 무엇을 희망했을까. 상상할 수 없는 지점을 상상해보기. 근대화의 그림자를 통해 원 '사물' 의 계보를 훑어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리라.

 

 

3.

전방에 영상이 펼쳐진다. 카메라의 시선과 폐허를 탐험하는 이의 시선이 겹친다. 관찰자는 도시의 철거를 앞둔 건물의 계단을 따라 걷는다. 그의 시선은 무너진 곳, 깨어진 곳, 파묻힌 곳에 가 닿는다. 다시 카메라는 하늘을 향한다. 스크린이 올라가면, 그 뒤로 감추어진 오브제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배우들이 등장하여 나란히 포개어진 실재와 영상을 분리시킨다. 선반에 놓인 물건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배우에 의해 옮겨지고, 그것은 잔상으로 남아 있다가, 그림자가 되어 이내 흐릿해진다. 사물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잠상’ 스러운 방식으로 이미지화한 메타적인 오프닝 퍼포먼스였다.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앉아 듣고 있던 관객들에게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다. 중앙구역 콘크리트 덩어리에 매어져 있던 오브제들을 배우들로부터 넘겨받게 된 것. 관객들은 그 무게를 손수 실감하며 관극에 임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점유(?)한 사물이 매달린 천장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관람하는 중에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이러한 일차원적 설정으로 사람과 사물은 그 우연하고도, 일방적인 인연을 이어갔다.

동물들이 운다. 아시아에서 몇 번째로 큰 동물원이 과천시에 개장하였다는 대한뉴스의 보도다. 배우들이 무대 앞쪽에 설치된 작은 모래사장에 모인다. 이들은 양손을 뻗어 모래 가져가기 놀이를 한다. 한 움큼씩 퍼갈 때마다 숨겨져 있던 동물 피규어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툭, 하고 쓰러지는 나뭇가지. 게임을 끝낸 배우들은 미소를 지었지만,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모르는 눈치다.

배우들은 모래를 담은 비닐을 관객이 손에 쥔 줄에 붙들어 매기 시작한다. 교환가치로 존재하던 사물은 이제 토건개발의 산물인 '모래들' 과 평형을 이룬다. 허나 곧 비닐봉지 아랫부분이 가위에 잘려나가고 상대의 가벼워진 무게로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선반에 놓여있던 사물들이 사람의 손을 타고, 공중에 매달렸다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오브제들의 기호 놀이가 퍽 인상적이다. 이러한 사물의 운명처럼 인간의 가치도 물신화되고, 교환가치로 매매되는 것일까. 새로운 상품, 새로운 도시가 옛것을 밀어내듯, 사람도 종국에는 소외의 단계를 거쳐 소멸됨을 '사물' 에 대유하여 보여준 퍼포먼스였다.

 

 

‘내 고향 성저’ 라는 타이틀의 TV영상이 나온다. 이번엔 '고양' 이다. 영상의 적극적인 개입이 인상적이다. 몇 개의 층위로 구성된 영상이 갤러리의 벽면을 분할한다. '큰' 역사를 위한 옛 다큐멘터리, 그리고 '작은' 역사를 위한 동시대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이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유유히 돌아가는 우주의 영상이 벽면의 좌우, 그리고 천장에 이르기까지 관객의 시야를 채운다. 이러한 다층적인 시선은 과거와 현재의 충돌, 현실과 환상의 중첩이라는 이질적이고도 독특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또한 표면과 이면과 내면을 두루 살피고자 하는 '잠상' 스러운 연출형식이었다.

여배우가 과천의 막계리에 사는 전주 최씨의 이야기를 말한다. 도시개발로 인해 선산에 묻은 120개에 달하는 조상님의 묘를 이장했다는 사연이다. 비오는 날 관에다 씌었던 혼수 이불로 효부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배우는 자신이 전주최씨임을 밝히며 옛사람과의 상관성을 추측해 본다. 막연한 시도에 관객들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은 최근 작업이었던 안산. 전시의 마지막 구역에 설치된, 문으로 쌓은 탑에 안산 작업의 영상을 투사하고, 외국인 이주민의 사연을 글자로 새긴다. 입체(立體)로 존재할 때는 그 의미가 당연했으나, 평면(平面)으로 존재하는 ‘문’ 들은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자극을 준다. 닫혀있고, 눕혀있는 문은 쓸모없는 도구다. 그러하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장식으로 쌓여있는 것일까. 모두가 다른 말을 전하고 있지만 그 애틋함은 엇비슷하다. 사라지는 것들은 다 그러한 운명을 타고났다. 

배우들의 느릿하고 작은 행동 탓인지, 혹은 벽면의 스크린화로 인한 일정한 거리 탓인지, 관객들은 시종일관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심리적으로 급격한 변화는 없지만, 문득문득 비애감이 더해진다. 그런 연유일까. 외벽의 커튼이 젖혀질 때, 바깥의 기운이 실내로 스며들며 묘하게 해소의 감정이 들었다.

 

 

4.

살지 않았던 과거를 상상해본다. 신도시가 개발되고, 사람들이 이주하고, 거리가 점점 세련되지는 과정은 분명 활기가 넘쳤을 것이다. 악(惡)의 산물처럼 간주되는 근대화도 당시 사람들에겐 빛나는 미래였을 것이다. 이리도 많은 사물들이 버려지고, 폐허 속에 잠기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소외와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사물은 없다. 근대화로 인한 ‘소외’ 는 우리가 방관해 온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심지어 환영하고 받아들이기까지 했으니)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과거의 미래를 통해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일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종국에는 이렇게 변할 것이다. 과연,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결국 총체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 규정된, 지금-여기-우리는 누구인가)

폐허와 폐허 이전. 도시와 도시 이전. 자연과 자연 이전을 짐작해보는 것. 관객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비교적 명확했다. 허나 사라지는 사물을 추적하는 일과 그 소멸의 미래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는 일은 짧은 러닝타임 내내 완수하기 어려운 과한 작업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는 인내와 연민. 즉, 자신과 타인을 참아내고 이해하는 내공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는 변방연극제를 수고롭게 찾아온 관객들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시대의 '관객력' 이라 할 수도 있겠다.

 

 

5.

다시 극으로 돌아가보자. 극중 등장하는 여러 오브제에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 와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그러한 오브제들을 '갖고 놀기' 한 잠상의 배우들이다. 이들은 무대를 초속 30cm 정도로 느리게 종횡무진하면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사물들의 위치를 바꾸어 놓고, 능청스럽게 숨겨놓은 보물을 되찾고, 관객들에게 아무 상관없는 것들을 교환시켰다. 실로 진지한 분위기가 전시장 안을 감싸고 있었지만, 장난꾸러기 같은 이들이 벌이는 놀이는 훨씬 유쾌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브제들이 보여준 소외와 소멸에 대한 '슬픈' 전시는 배우들이 행한 '밝은' 퍼포먼스, 다르게 말하면 '장난감 놀이' 와 결부되면서 독특한 의미들을 만들어낸다. 쓸모없는 것들이 예술을 통해 쓸모를 만들어내고, 그것의 수명을 조금은 연장시키고, 추억을 깃들게 함으로써, 새로운 그리고 작은 인간의 역사(사연)를 다시쓰기 할 수 도 있다고.

조금만 더 말해보자. 이들의 놀이행위는 장난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그것은 미래에 대한 묵시록이기도 했다. 복제된 시뮬라크르와 동기화된 삶(사물), 흙속에 파묻힌 동물들, 쓰러지는 나무들, 모래와 뒤바꾼 원주민의 삶, 조상들을 파내 함께 떠나야하는 운명과의 동일시. 이들의 움직임 기호를 해석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은 과거의 미래이자, 암울한 내일의 모습일 것이다. 놀이에 대한 즉각적인 '즐거움' 이 가시자, 그 행위가 갖는 '끔찍함' 이 불현듯 엄습해왔다.

이처럼 잠상이 수행하는 '옛것' 에 대한 채집행위는 노스탤지어를 기반한 페티시즘이나, 지나간 사람들의 '애도' 를 우선하는 작업은 아닐 것이다. 수집된 것들을 유희하고 성찰하면서,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 자기자신의 좌표를 되돌아보고, 도시에 대한 사유와 '새 것' 의 종말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체험해 보는 것. 공연의 의미는 그렇게 서서히 다가왔다.      

한편으로 <사라지는 사물들>은 도시의 시간을 거슬러왔던, 잠상의 시간들을 재차 거슬러가는 메타적인 작업이라 하겠다. 그런즉슨, 잠상이 잠상에게 취하는 거리를 이해한 관객들에게, 이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 관객들에게, 혹은 잠상이 지나쳐온 도시들의 시민들에게는 모종의 친밀함을 더 할 수 있었으리라.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공통분모를 비껴나간 관객들은 조금은 더 어렵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수 있을까. 이러한 상상의 질문은 허무주의나 패배주의를 환기시키는 물음은 아닐 터. 아무래도 성찰과 유희를 함께 수행해온 관객들에게 보내는 각성의 메시지일 것이다. 동시에 소멸 직전의 사물들에 대해 갖는 애틋한 감정이 사회적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한 도구적 연민이 되지 않도록, 우리들은 더욱 냉철해져야 할 것이다. 자, 여기까지.

묵시록적인 상상과 함께 폐허의 자리에 연민을 품게 만드는, 잠상에 대한 감상을 마친다. 더불어 이 글은 소멸과 소외에 대한 단상이기도 했다. 소멸은 소외의 다음 단계다. ■

 

 

사진출처 : 2,3,5,6,7 프로젝트 잠상 제공 / 1,4 jin3 

프로젝트 잠상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jamsang.org 

                                              https://www.facebook.com/projectjam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