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3 아비뇽 페스티벌 - 비바리엄 스튜디오 <SWAMP CLUB>

2013. 9. 23. 09:21Review

 

이토록 짠한 뻘짓의 향연

Vivarium Studio, SWAMP CLUB,

2013.7.17-24, Festival d'Avignon (2013 아비뇽 페스티벌)

 

글_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Pieter Bruegel, Patientia (1545-1570)

 

이제는 극단 체제가 거의 소멸돼 버린 프랑스 연극계의 한구석에서 꾸역꾸역 제 길을 모색하다 어느덧 창단 10주년을 맞은 비바리엄 스튜디오(vivarium studio)가 2013년 아비뇽 연극제에서 나름의 기념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살 끝만 닿아도 짜증이 솟구치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혹자는 제목부터가 무덥다며 진저리를 치기도 했던, SWAMP CLUB. 늪지에 세워진 예술가들의 안식처.

2009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되었던 세르쥬의 효과(L'effet de Serge)나 2010년 아비뇽에서 공연된 빅뱅(Big Bang) 등의 전작에서 익히 그들의 천진한 뻘짓을 보아왔던 터였다. 초록색 잔디 위를 몇 십분 동안 꾸물거리며 기어 다니는가 하면, 커다란 튜브 보트를 만들어 무대 한 켠에 끝도 없이 쌓아 올리던, 그 어떤 통상적인 기대나 요구에도 아랑곳없이 자기들만의 언어로 유희하던 그들의 천진함이 10주년을 맞아 어떤 방식으로 지켜지고 또 확장될지 사뭇 기대되는 마음이었다. 의미가 없는 것에서 끝없이 의미를 찾게 만들고, 단순한 뻘짓에 불과할지라도 이번에는 과연 어떤 뻘짓일지를 여지없이 궁금해하게 만드는, 그 기묘한 힘이 바로 그 작은 극단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탱해온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끈적하고 어지러운 더위 속에서 그들이 우리를 초청한 안식처가 선선한 바닷가도 계곡도 아닌 위태롭고 습한 늪지대라는 것부터가 과연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천진함의 시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현실이 진창인 동시대의 예술가들을 진짜 늪으로 불러 모으는, 귀여운 도발이자 진실한 손내밈이었다.

축제 기간 중 한 기자가 연출가 필립 켄(philippe Quesne)에게 물었다. 이 작품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일종의 공동체적 저항인지. 그는 기자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한 어휘를 정정한다. "공동체(collectivite)가 아닙니다. 뭐랄까 가족(famille)이거나, 말 그대로 클럽(club)이라고 해야겠죠."그러니 물론 저항(resistance)이라는 말도 무겁다. 그가 말하기를 자신들은 교훈을 주거나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특정한 개개인이 특정 장소에 모여 있다가 점차 어울려가는 어떤 그림을 무대화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극단을 나타내는 명칭에조차 스튜디오(studio)라는 말이 붙어 있고 그 앞의 비바리엄(vivarium)은 "유리를 통해 보면서 자연에 가까운 환경에서 작은 동물을 기르는 동물 사육장"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의 연극은 그래서 저항이라기보다 뭐랄까 살아감 같은, 그런 시간을 끌어안고 있다. 그 커다랗고 둥근 시간 속에서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리듬을 맞춰 부유한다. 자궁 같은 그곳을 둥둥 떠다니며 우리가 바라보는 광경은 브뤼겔(Bruegel)의 그림에 나오는 기이한 풍경들을 닮았다. 실제로 이번 공연의 최초 모티프가 된 인내(Patientia)라는 그림을 소개하며 필립 켄은 묻는다. 이 들끓는 세상 속에서, "인내하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지를. 그것은 결국 저항이라기보다, 뭐랄까 살아감 같은.

브뤼겔의 그림들은 다갈색의 벨기에 풍광을 다정하고 정직하게 담는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단정한 색깔 속에 이상하고 기묘한 분위기가 침투한다. 한가로운 어촌 풍경 너머로 소년의 첨벙대는 두 다리만이 먼 바다에 조그맣게 그려진 이카루스의 추락만 떠올려보아도 그렇다. 브뤼겔의 이 같은 환상은 아마도 비바리엄 스튜디오에게 있어 "함께 살아가는 것들의 확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인내하며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에게로, 사랑스런 괴물들과, 늪의 동식물과, 몇 만년 전의 두더지에게로 다정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들을 초청한다.

 

▲ 2009,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선보였던 비바리엄 스튜디오의 <세르쥬의 효과>(2009, SPAFL)

 

사실 "초청"이라는 모티프는 비바리엄 스튜디오의 공연에서 매우 중요하다. 가령 전작 세르쥬의 효과에서 세르쥬는 매주 일요일마다 자신의 골방으로 사람들을 초대해 작은 쇼를 선보이는데, 이때 초청받는 사람들은 공연이 올라가는 각 지역의 일반 시민들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자세한 정보 없이 무대 위로 올려지고, 따뜻하게 맞아진다.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그들 사이의 공기가 다정한 전파를 타고 객석까지 전달될 때, 관객들도 다 함께 세르쥬의 친구가 된다. 실제로 그렇게 연을 맺게 된 다양한 국적,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 지금의 비바리엄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10년 후 지금, 또 다른 세대를 초청하려 한다. 늪의 클럽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특별히 무대 위 세트 안에서 콰르텟 연주가 라이브로 이루어지는데, 그 연주자들은 초청받은 아비뇽의 음악가들로 구성되었다. 자신들의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축하 파티를 연 예술가들이 지역 음악가를 초청했고, 또 거기 젊은 예술가들과, 관객들과, 심지어 자기 자신들까지도 정중히 초청한 셈이다. 음악은 슈베르트에서 쇼스타코비치를 넘나들며 잔잔히 흐른다. 무대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뻘짓에도 돌출됨 없이,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달래고 어르듯이, 라이브 연주의 존재 자체가 쉬이 잊혀질 정도로 무던하게, 음악은 흐르고 있고, 연주자와 배우의 경계도, 예술가와 일반인의 경계도 거기 묻혀 사라져 버린다. 급기야는 슈베르트나 쇼스타코비치도, 혹은 당시의 음악 애호가들까지도 시대를 뛰어넘어 모조리 초청받을 기세다. 어쩌면 이 클럽이 그 시절부터 존재하던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하던, 연출가의 궤변이 어쩐지 궤변으로 여겨지지 않는 순간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어둡고 텅 빈 세트 안에 두어명의 사람이 들어와 무언가 한참 컴퓨터로 작업을 한다. 관객의 존재는 아랑곳 없이 저들끼리 골몰한 수근거림이 우습다. "아… 그래, 이게 좋을 것 같아.""아냐, 이 부분은 이렇게…"얼마 후, 그들이 속한 공간의 투명한 벽면에 모니터의 영상이 투사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체 무대 세트의 입체 설계도면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관객도 함께 그것을 들여다보며,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아우르는, 늪의 클럽의 전체 공간을 가늠하는 일에 동참한다. 공간 구획이 완성되면 영상이 거두어지고, 바깥에서 연습 중이던 연주자들이 무대 위로 호출된다. 무대 오른편의 동굴 위에 하나, 투명 세트 안에 하나, 글자가 지나가는 레이저 자막 판이 있어, 오늘의 일정 및 예정된 연주곡명이 나열되고 있다. 음악이 흐르고, 기존의 멤버들은 새로운 예술가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세트 안에 선물을 가지런히 놓는가 하면, 언덕 위로 올라가 누가 오는지 기웃거린다. 대사라 할 것도, 그저 말이라 할 것도 없다. 이렇다 할 행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침묵 속에, 늪 속에, 음악이 있고 기다림이 있을 뿐.

필립 켄은 말한다. 무대 뒤쪽 벽면에 그려진 도시의 풍경이 암시하듯, 늪이란 항시 위협받고 있는 공간이라고. 그러나 동시에 그곳이 세상으로부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노라고. 세계의 속도를 늦추고 싶었으며, 혹은 적어도 공연의 시간이라도, 늦출 수 있기를 원했다고. 과연 후자는 이루어졌고(!), 이어 그의 바람에 동조하는 각기 다른 국적의 젊은이들이 무대 위로 (한참을 굽이굽이 걸어) 등장한다. 따스히 환대 받은 젊은 예술가들은 쉼이 필요해서 그곳에 왔노라고 말한다. 예술을 그만두고 쉬는 쉼이 아니라, 예술을 할 수 있기 위한 쉼이, 그러니까 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고, 세상의 흐름과 관계 없이 너의 템포를 지키며 이대로 주욱 걸어도 괜찮노라는 위로가, 혹은 그저 숨통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그들을 늪의 클럽이 맞이하는 방식은 진실로 짠하다. 같은 언어를 공유하지 않아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점 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기존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사우나 가운을 주고, 나무로 만든 활을 준다. 그들은 함께 일광욕을 하고, 동굴 탐험을 한다.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 한참 후 기어 나오는 그들의 손에 크고 작은 금덩이가 들려 있다. 한 선배 예술가가 후배들에게 다정하게 말한다. 그 금을 팔아서 작품을 지속할 돈을 벌라고. 자기가 캐낸 큰 금덩이를 누군가의 작은 금덩이와 바꾸어주기도 한다."대박, 이거 정말 저 주시는 거예요?" "그럼, 나는 또 캐면 돼."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두더지 이야기가 있다. 클럽에 사람들이 가득 차기 훨씬 전부터, 두 대의 레이저 자막 판에 프랑스어로, 독일어로, 영어로 연이어 흘러나오던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오랜 옛날, 땅 밑에는 두더지들의 세계가 있었고, 그들의 왕은 아주 반짝이는 예쁜 동굴을 갖고 싶어 했다. 왕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다양한 제안들이 오갔고, 두더지들은 계속해서 더 빛나는, 더 아름다운 동굴을 지었다. 두더지들에게 금지된 색깔이었던 흰 빛으로 지은 동굴이 두더지 왕을 만족시켰다.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삼천 년을 앉아 있던 두더지 왕은 그러나 문득 그것에 싫증을 느낀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하들이 묘안을 내 파란 빛의 동굴을 만든다. 그 아름다움에 탄복한 왕은 또 거기서 삼천 년을 보낸다. 삼천 년이 지나니 그 동굴의 아름다움도 빛을 잃는다. 결국 두더지 왕은 지상을 향해 기어 올라가기로 한다. 위를 향해 위를 향해 하염없이 올라가던 두더지 왕은 마침내 지상으로 나와 그때껏 꿈꿔본 적 없던 눈부신 빛을 만난다. 그리고 그 빛 때문에 눈이 멀어버리고 만다.

늪의 클럽에는 이처럼 무심하게 툭툭 던져지는, 그렇지만 무언가 아득하고, 어딘가 발이 푹푹 빠지는 이야기들, 이미지들이 있다. 헌데 그것들은 그 의미에 잠시 잠겨들 겨를조차 주지 않는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두더지가 눈 앞에 있을 뿐, 그리고 그를 반겨주는 다정한 예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사우나를 즐기고 있던 예술가들이 이상한 느낌에 동굴을 보니 커다란 두더지가 주춤거리며 동굴 문을 나서고 있다. 사람들이 달려가 두더지를 부축해서 클럽 안으로 데려가서는 긴 의자에 눕히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한다. "얘가 많이 아픈가 봐."그들은 두더지에게 무언가 마시겠냐고 묻는다. 두더지는 물론 말이 없다. 두더지를 쉬게 한 뒤 그들은 사냥을 나간다. 한참 뒤 정신을 차린 두더지가 조용히 일어나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마신다. 어떤 관객들은 그 장면을 지나치고, 어떤 관객들은 알아보고 폭소한다. 그렇게, 굼뜨고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처절하게 진실하던 뻘짓들이 있을 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모든 강박을 무력화시키던, 무겁거나 절박한 대신 무신경하고 무덤덤한 탓에 오히려 더 슬프던, 그 살아감 자체가 바로 세상에 맞서는 '인내'라면 인내이지 않을지.

 

 

끝으로, 세트가 비워지고 그 속에 늪의 동식물이 채워진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안식처에서 자신들을 치우고 그곳을 다른 존재들로 채운다. 그 비움과 채움의 시간이 여전히 굼뜨고 느리다. 하염없는 이동과 짊어짐과 부려놓음이, 그 기나긴 시간이 관객에게 각인된다. 늪의 빛이 각인된다. 어느덧 누가 사람이고 누가 늪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예술도 사랑도 삶도 아득한 오늘의 우리에게, 해답보다는 잠시 한 순간의 쉼이, 공연이 이루어지는 시간만큼이라도 지속되기를 저들이 빌어 주었던 짧은 쉼이 있었을 뿐이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혼자인, 두더지도 금도 없는 우리에게, 그러니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묻기를 멈추고, 그래도 너희는 초청받은 소중한 사람들이니, 늪의 존재들로 너희를 채워줄 테니, 인내에 대해서, 살아감에 대해서 느껴 보자고, 못 알아들어도 괜찮은 외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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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사진_ Christophe Raynaud de Lage / Festival d'Avignon

** 비바리엄 스튜디오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vivariumstudio.net/

*** 아비뇽 페스티벌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festival-avignon.com

 

 인디언빵(indie-n-braod)은 해외에서 보내온 인디언밥 필자들의 소식을 다루는 코너입니다. 이번에는 2013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상연했던 비바리엄 스튜디오의 <SWAMP CLUB>에 대한 공연 리뷰를 게재합니다. “인디언빵” 은 해외 체류의 경험과 사례를 가지고 한국의 독립예술과 소통을 모색하는 공간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와 관심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