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청춘여행자 - <침대 밑에 아버지가 산다><못>

2015. 1. 8. 15:15Review

 

그 상처는 어디로 갔을까

극단여행자의 세 번째 창작단막극장 "청춘여행자"

<침대 밑에 아버지가 산다><못>

 

글_율

 

사는 것이 고단하다는 말에 공감하지 못할 사람이 몇 없을 것과 같이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흔치는 않을 테다. ‘관계 맺기’는 상대에게 나를 인식시키는 행위다. 각인이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 같은 그 행위는 서로에게 온기를 전하면서 계속 교류하는 관계로 이어지기도 하고, 머릿속에 이름 석 자만 남긴 관계만을 남겨둘 수도 있고, 때때로는 날카로운 자상을 서로에게 입힌 채 끝나기도 한다. ‘관계 맺기’가 좋은 결과로만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와는 다른 존재인 타인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리든 나이가 많든 우리가 ‘관계 맺기’에 익숙해 질 수 있을지언정 가벼이 느낄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상대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없다. 아무리 가까이 지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심리상의 상처들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지만, 동시에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자주 은폐된다. 하지만 그렇게 은닉된 상처들은 연이은 파도 속에서도 수면 위로 떠오르는 부표와 같이, 언젠가 우리 생애 속에서 한 번 쯤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한 자각의 순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곤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러한’ 상처가 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려내는 순간은 바로 그 상처와 비슷한 종류의 경험을 하게 되는 때, 그로 인해 상처를 직시할 수밖에 없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처를 다시 떠올리게끔 만드는 매개체는 <못>에서처럼 깊은 구멍만 남아버린 ‘못자국’과 같이 무척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오래된 상처는 <침대 밑에 아버지가 산다>에서처럼 또 다른 이에게 새로운 상처를 남기는 형식으로 그 형태를 바꾸며 존속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침대 밑에 아버지가 산다>와 <못>, 이 두 개의 단막극으로 구성되어 있는 <청춘여행자>는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들을 다루는 이야기다.

 

 

침대 밑에 아버지가 산다

한 가족의 가장인 태성은 오늘 명예퇴직을 당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살아오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는 후회감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의미 있는 일을 만들기 위해, 신혼 초를 제외하고선 챙겨준 적 없었던 결혼기념일을 챙겨주기로 결정한다. 아내에게 선물할 꽃다발까지 사 온 태성은 더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침대 밑으로 숨는다. 「예상치 못한 사건」은 더 인상 깊은 순간으로 남는 법이라며 침대 밑에서 아내를 기다리던 태성은 곧 침대 밑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이 기다렸던 아내가 자신의 초등학교 동창과 동침하는 사건을.

그 장면을 목격하면서 태성은 문득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코끼리를 봤던 기억, 자신의 부모님이 겪었던 상처, 자신의 아내에게 청혼했던 기억, 그리고 과거에 자신이 한 여자에게 주었던 상처. 아내가 자신에게 준 상처를 직시하는 순간, 시간 속에 파묻혀서 떠올리지도 못했던 과거의 기억들은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된다. 모두 다른 사람과 다른 시기에 일어났던 사건들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그 사건들 속에 숨어있는 ‘상처’들의 유형은 모두 엇비슷하다. 침대 밑에서 남자가 숨어있었던 것은 무척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낸다.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지만, 그 과정은 꽤나 해학적으로 묘사되기에 심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태성이 침대 밑에서 나오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상처 입었다고 여겼던 사건이, 사실은 자기가 아내를 상처 입혔던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극 중 앞에서 연출되었던 가벼운 분위기는 사라지게 된다. 이런 연쇄의 과정은 마치 상처가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어 그 생명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연쇄는 태호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말로 인해 비로소 끊어지게 된다. 아니, 어쩌면 또 다른 상처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태호가 과거에 상처를 주었던 여자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태호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말이다.

아이는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장년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상처를 주는 데에는 무심하고 상처를 받는 데에는 예민하다. 그 순간에는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무할 수 있을지라도, 상처는 어느 순간 떠올라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웃음 속에서 전해지는 내용은 꽤나 씁쓸하다. 관객은 곧 스스로 생각하게 되리라. 그렇다면 이 잔인한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리고 나가던 중 동행인에게 감상을 물어보았다. 동행인은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아, 그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관객 각자가 안고 나가는 해결책은 모두 각기 다를 것이다.

 

 

한 소극장이 두 개의 무대로 나뉘어져 있는 <청춘여행자>의 인터미션은 무대전환이 아닌 객석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조금은 혼잡하고 약간 소란스러운 시간 가운데, 넓은 쟁반 위에 막걸리, 커피, 녹차가 든 종이컵들을 빼곡하게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관객들은 뜨겁진 않지만 차갑지도 않은 음료가 든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연극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왜인지 그 풍경이 자판기에서 종이컵 커피를 한 잔 뽑아들고, 눈이 가득히 쌓인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길 기다리는 여행자들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극 중 배경이 겨울을 맞은 바닷가의 한 술집이라 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눈 내린 새벽을 맞는 바닷가 술집의 모습을 보여주는 <못>은 누군가의 삶 속에서 떼어온 파편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 같은 극이다. 내일 열리는 축제를 대비해 사람들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시인을 꿈꾸는 청년은 여자 친구를 위한 시를 썼다. 그리고 가게를 운영하는 청년은 노래방 기기를 빌렸다. 애석하게도 밖에 퍽퍽하게 내리는 눈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지만, 네 명의 사람들은 가게 안에서 축제를 기념하는 전야제를 벌인다. 전야제는 즐겁고 흥겹다. 하지만 어느 순간, 좁지만 깊이 뿌리내린 구멍 속에서 마음 속 깊게 뚫려버린 잔상을 발견했던 것인지, 한 남자가 비어버린 못자국에 집중하면서 그들 마음 속에 있던 ‘상처’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리들은 상처를 암묵적으로 잊은 것처럼 보이도록 합의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각자가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 또한 다르기에, 겉보기엔 정말 그 상처를 잊은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다. 하지만 상처의 깊이는 단순히 그것을 표면에서 본 뒤 미루어보는 것만으로는 알기 힘들다. 타인이 갖고 있는 상처의 깊이를 알게 되는 순간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와 상대의 상처가 마주보게 되는 순간이다. 극 내에서 두 남자가 그러했듯이.

관계는 상대와 나, 두 사람 사이에서 맺어지는 행위이다. 그런 만큼 마음의 잔상은 한 쪽에만 남지 않는다. 그리고 대상이 소중한 만큼 그 사람의 흔적은 가슴 속에 단단하고 깊숙하게 뿌리내린다. 그리고 이별의 순간이 찾아오면, 그 깊숙이 박혀있던 무언가는 단숨에 뽑혀나가게 된다. 하지만 뽑혀나가는 것과 그 자리가 아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것이 바로 누구나 겪어보았을 이별의 상처, 우리 가슴에 못자국을 남기는 상처다. 단막극 <못>은 시간을 켜켜이 쌓아올려 감추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가슴 한 켠에 깊게 새기고 있을 어떤 상처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청춘여행자>

청춘은 사회 초년생 특유의 미숙함을 극복하기 위해 더 열심히 부딪히고, 새롭게 만나는 자극들로 인해 의욕에 가득 찬 시기다. 그리고 사실 과거 중 아름답기만 하거나, 혹은 추하기만 한 어떤 기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청춘’은 위와 같은 성질로 인해 많이들 미화되고 회자되는 시기다.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미화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실 설익은 채 살아가는 건 퍽 힘든 일이다. 청춘의 순간들에는 열정으로 인해 얻는 기쁨만큼이나 미숙함으로 인해 얻게 되는 아픔의 순간도 많다. 하지만 그렇게 미화될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면서 아픈 기억들은 모두 휘발되어 옅어지고, 기억하고 싶은 반짝이는 순간들만을 모아둔 하나의 ‘집합’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청춘여행자>의 공연은 이름으로 ‘청춘’을 내세우지만, 청춘이 가지고 있는 반짝이는 이미지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이 두 개의 단막극은 청춘 속에서 미숙하게 넘기고 말았던 것들을 어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어른이 되고 시간이 흐른 게 아니라, 시간이 흘러서 어른이 된 나’, ‘어른이 되었지만 강해지지는 않은 나’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에는 능숙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이겨내는 데에는 미숙하다. 그리고 아무리 가깝고 막역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그 사람의 속내, 상처를 알아채는 데에는 미숙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청춘’이란 이름을 20대에 한정지어서 쓰긴 아깝다. 우리가 생애에 익숙해지지 않는 이상,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지점까지 ‘청춘’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상처 받는 데에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지 않게 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게 될까. 우리가 ‘관계맺기’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정말로 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것에 있어서 능숙해지고 스스로가 오롯이 설 수 있게 되는 날까지 우리 자신을 ‘청춘’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사진제공_극단 여행자

  필자_율

  소개_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