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대안공간들의 송년 좌담회 <안녕>2014

2015. 1. 13. 17:21Review

 

Next is what? (or where?)

대안공간들의 송년 좌담회 <안녕> 2014/2015

 

글_니문

 

세기말 같았던 2014년을 나흘 밖에 남기지 않았던 지난 12월 28일, ‘유능사’ 주최로 ‘교역소’에서 미술-디자인 평론가 ‘임근준’씨가 사회를 보며 ‘교역소’·‘반지하’·‘시청각’·‘유능사’·‘커먼센터’·‘케이크 갤러리’를 패널로 하여 좌담회가 있었다. <안녕 2014(2015 안녕)>의 제목과 달리 좌담회의 날씨는 사실 안녕하지 않아서, 서울 낮 기온이 영상 5℃로 포근하겠다는 기상예보를 배반하고, 자전거 가게가 들어선 1층을 지나 좌담회가 열리는 2층은 갈수록 추웠다. 비단 체감온도만이 아니라 신진 미술계가 느끼는 심리적 온도일 수도 있겠다. 추위를 동행하며 시종일관 울려대는 1층 초인종 소리는 은행 접수처를 연상시켰고, 이 안으로 연말정산이라도 하러 온 납부자들 마냥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좌담회는 (아마도) 신진 미술계 각지에서 정산 받아야 할 미술계의 경험들을 가지고 온 관객들이 백여 명은 족히 넘었다.

 

▲ 대안공간들의 송년 좌담회 <안녕>패널들 ⓒ교역소

 

좌담회는 크게 여섯 팀의 패널들이 자기 소개하는 시간과, 올해 커먼센터에서 열렸던 두 차례의 전시 ‘오늘의 살롱’(3/27-5/28)과 ‘청춘과 잉여’(11/21-12/31)에 관하여 패널과 관객들의 평가를 들어보는 시간, 그리고 갑자기 사회자가 내세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안에 청년관을 세우자라는 슬로건과 그에 딸린 몇몇 대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좌담 있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었다.’는 말은 할 필요는 굳이 상술할 필요는 없겠다. 좌담회에 대한 전반적인 분위기는 발군의 말솜씨를 선보이며 사회를 진행한 임근준씨와 이와 달리 전반적으로 다소 어눌하고 방어적인 언변을 구사했던 패널들이 대비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 이번 좌담회처럼 신진 미술계를 운영하는 패널들이 한 자리에 제대로 모여본 적도 없는 관계로 공간 소개에 상당한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오늘의 살롱전’과 ‘청춘과 잉여’에 대한 평가 토론회가 상당 시간 지나가고, 또 다시 사회자의 구미에 맞는 질문지에 패널들이 다소 끌려 다니는 시간이 지나갔다는 기분은 지울 수는 없다. 그리고 관객이었던 ‘구슬(a.k.a 쿠키요정)’과 ‘오도함’이 준 패널급으로 좌담회에 등장하는 모습은 흥미와 기이함 그 어느 사이. 마치, 장인어른과 시누이 앞에서 자기소개와 자기 해명을 하는 은행원 애인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묘한 좌담회였다.

여섯 패널의 소개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고민은 공간이다. 여섯 패널팀의 공통된 고민은 공간으로 수렴하는 듯 보인다. 소개 과정에서 자기 공간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며 대부분 전시 하고 싶고 놀고 싶은 욕구 분출의 장이 필요했음을 토로했기에 이 역시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시할 수 있는 공간, 작당할 수 있는 공간이 그렇게 턱 없이 부족하던가? 아주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의외로 기성세대가 만든 많은 공간들이 대관 혹은 공모의 형태로 작가와 기획자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돈만 따고 나와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문화재단들도 부지기수다. 이른 바 ‘눈 먼 땅’과 ‘눈 먼 돈’을 찾아 나서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 곳 그 돈을 찾기는 쉬워도 어디 쓰기는 쉽던가. 일단 공간은 공간의 소유 주체에 따라 규제와 규정이 도열해 있기 마련이고, 돈이라면 회계사를 곁에 두고 싶을 만큼 까다롭고 구체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들 운영자와 행정가들을 접하다보면 이 사람들이 민원으로 받은 스트레스를 우리에게 푸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지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작 OK 사인이 떨어지는 건 ‘실현가능성’이라는 관문으로, 웬만한 지인 풀이나 경력이 담보되지 않고서야 넘어서기 어렵다고 알고 있다. 지인이건 경력이건 이와 같은 경험이 없어서 선보이려고 하는 것인데, 경험을 위해선 경험이 필요하다는 동어반복의 지난한 과정이 눈 먼 땅과 돈에 입맛 다실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우리가 꿈꾸는 넓고 아늑한 지상의... (사진출처_구글검색이미지)

 

따라서 쪼랩의 상태인 신진 미술인들은 자체적으로 경험을 해결해 내거나 경험을 담보로 자기 자신을 착취 현장에 내보내야 하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후자의 후짐은 이미 다른 매체에서도 누차 얘기해왔을 것이고, 이번 좌담회는 전자의 경험들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물론 만만찮다. 그래도 남의 것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했던 모든 공모·서류작성·심사·사바사바 등의 여러 단계를 자신의 노동과 계약으로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 즉 투박할지언정 업어 치나 메치나 자기가 알아서 결론지을 수 있다. 안 그래도 전시는 이래저래 미술계 인사들의 이합집산으로 정신없는데, 전시 일정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는 현시원씨의 경우와 같이 암을 유발하는 행정관계 정도는 소거시킬 수 잇달까. 결국 공간을 얻기 위한 시간이 비교적 계획적인 스트레스로 바뀐다는 것, 시간의 질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신진 미술계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무슨 기획의 묘(妙)를 찾아내려 나타났다고 보기 보단,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등대 같은 공간을 운영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없었던 혁신적인 형식 혹은 내용의 기획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등장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우회 전략을 사용하게 된다. 좌담회 역시 이 전략이 가지는 독특함을 논하는 자리였고. 그러므로 소위 언론에서 ‘젊음’에 바라는 ‘신 개념의’·‘창의적인’·‘혈기왕성한’과 같은 수식어를 때려치우고, 자신들이 채 소화하지 못한 기획 과정 전반을 복기(復碁)한다고 볼 수 있다. 기성의 전시 공간 혹은 자본에 기생해야 하는 경우, 생략되는 기회비용을 전시 그 자체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획에 있어서 약간의 느슨함이 존재하게 되는데, 말하자면 뚜렷한 하나의 매체 혹은 주제만을 가지고 특화된 공간을 기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갤러리 반지하/ 커먼센터의 로고

 

자, 그렇다면 이 글은 이들의 복기를 다시 복기하는 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 아니 우리 미술계의 ‘미생’들은 그렇다면 그렇게 공간의 문제로 허덕거려 왔었던 것일까? 보드 게임의 세계에서 고자를 담당하고 있는 글쓴이로서 바둑인들 잘 하겠냐만 바둑의 룰이 ‘상대의 돌을 포위하여 자신만의 집을 늘리는 것’이라는 점은 안다. 즉, 바둑이란 오래된 땅따먹기 게임이라는 것이며, 회자되는 ‘미생(未生)’이라는 말도 바둑에서 자기 집을 만들어 내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곳 좌담회에 모인 미술계 사람들은 대개 미생의 처지에 공감하고 미생을 극복한(?) 여섯 명의 패널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름의 ‘연말 정산’을 생각했을 것이다. 패널인 다섯 군데 공간 외에도 대림상가에 위치하는 ‘800/40’이나 이태원에 위치하는 ‘윌링앤딜링’과 같이 유사한 연령대의 운영자들이 선보이는 전시 공간이 상당히 많이 생겼다.

문제는 공간을 얻어냈으니 상황이 반전되었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라는 점이다. 커먼센터나 케이크갤러리가 작가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운영진의 업무량이 과열되었는지 좌담회 간 공간을 사용했던 관객들 중에 미진했던 처우에 대하여 소곤거리기도 했고(현장에서 뿐 아니라 좌담회 이전에도 가끔씩 들려왔다. 물론, 그들의 입장과는 달리 패널이었던 돈선필씨는 예순아홉 명이나 하는 작가들을 일일이 방문했다는 점을 높이 사기도 했다) 공간 자체가 인테리어에 무심하여 냉장고와 같은 관람환경을 조성하였다거나, 시청각의 경우 공간을 얻고 나니 화이트 큐브로서의 기능을 하기에 부적합하여 후회하는 현시원씨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지켜봐야 하겠지만, 소위 신세대의 공간이 발생은 했으나 아직 주도적인 움직임으로 발달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해소되지 못한 블라인드 스팟이 있기 때문인 건 아닌지 싶다. 즉, 다섯 공간을 아직 완생(完生)이라 부르기엔 아쉬운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우리가 바둑판이라고 생각했던 이곳 미술계가 실은 ‘오셀로(Othello)’이기 때문은 아닐까? 한 색깔의 돌 두 개가 다른 색깔의 돌을 사이에 둘 때, 그 다른 색깔의 돌을 자기 색으로 바꾸며 진행되는 오셀로 게임 말이다. 샌드위치 된 상대편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오셀로의 판에서 우리는 부단히 집(공간)만을 바라본 바둑을 두고 있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문제는 공간이 아니라, 연대의 문제, 특히 연대를 위한 시간의 문제가 된다. 우리 고민의 중심에 ‘공간’이 있었다고 믿었지만, 공간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주력하는 와중에, 사실 우리 욕망의 룰은 집을 만들어야 하는 바둑이 아니라 내 편으로 돌려놓는 오셀로였다고 본다. 실제 좌담회 사이에서 ‘장소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냐.’는 임근준의 질문에 ‘외려 시간성이 중요하다고 본다.’는 현시원의 답변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둑과는 달리 한번에 상대의 말을 뒤집는 게임 ‘오셀로’

 

신진이 지속적으로 기성의 공간과 기성의 자본을 껄끄러워하고 비밀기지 같은 전시공간을 꾸려나가는 것은 ‘시간’이라는 기회비용을 아끼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창작과 기획은 모두 오브제와 담론을 마주하는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하다. 전시라는 행위를 진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5580원이라는 최저 시급을 견디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공모에 응하고 기획서를 작성하고 제출하고 결정을 기다리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전시장에 못은 박아도 되는지 사용 가능한 비품은 무엇인지 사무실 문을 두드리면 안에서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작가와 혹은 기획자와 상의하여 무엇이 작품을 비평을 기획을 도드라지게 하는 방법인지 논의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언론에 노출시키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사람이 많이 오면 준비한 케이터링이 부족하진 않을지 적게 오면 이대로 묻히는 건 아닌지 걱정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등록금을 쏟아 부었는데 전시라도 열어서 부모님께 나 전시하는 작가라고 변명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전시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아예 잊히진 않을까 그리고 미술로 부턴 멀어지진 않을까 우려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앞서 설명한 모든 일거리들이 더 많은 시간을 채근하는 와중에도 자기 작업에 의미를 스스로 부여해보고 즐거워 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대개는 다른 일에 치여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일거리는 시간을 배급받지 못하고 아사해버리고 만다.

전시(展示)인지 전시(戰時)인 건지 헷갈릴 법한 이 시간은 공간의 결과가 아닌 원인이다. 공간의 문제만으로 접근하는 혹자는 왜 ‘yba’와 같이 창고나 유휴공간에 침투해서 전시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자명하다, 들어간들 연대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무작정 들어가서 만들고, 보여주고, 반응을 받아들 수 있는 관계 맺기의 시간이 선행되지 않는 이상, 창고는 정말 창고일 따름이다. 공간이 주어져도, 그곳은 정말 빈 사이(空間)일 따름이다. 공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간에 의해서 저 구질구질한 시간이 상당 부분 해소되고 생략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시간의 문제 자체가 모두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공간이 원인이고 시간에 관련한 문제가 결과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시간이 원인이고, 공간에 관련한 문제가 결과이다.’

 

▲ 대안공간들의 송년 좌담회 <안녕>관객들

 

구체적으로 이 시간성이란 무얼 말하는 걸까? 자세하게 설명해준 패널이 없지만 글쓴이의 생각을 덧붙이는 김에 글쓴이가 여러 번 방문을 하기도 한 반지하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민망하기 짝이 없게도, 필자는 반지하와 시청각은 몇 차례 방문하였지만, 교역소는 당일 처음 방문하였으며, 커먼센터는 <청춘과 잉여展> 마지막 날 영등포역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들렀고, 케이크 갤러리는 아직 들르지 못했다. 이 모든 게 다 대학원 때문이라는 옹졸한 변명을 내놓으며, 편협한 시야 속에서 탄생한 글을 선보이게 되어 죄송스럽다는 말을 괄호 속에 쪼끄마하게 남긴다.)

자칭 폐쇄적으로 운영했을지언정, 반지하의 공간 운영은 시간을 유예한다는 측면에서 눈여겨 볼 만하기 때문이다. 좌담회에서 있었던 반지하 참여 작가들의 평가 시간은 약간의 간증(비꼬는 게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약간 상기된 듯한 언술 상황을 비유한 것일 뿐)과 같았는데, 실제로 돈선필씨의 운영이 한 몫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반지하는 ‘오픈베타공간’ 운영을 표방한다. 오픈베타란 ‘오픈 베타 테스트(open beta test)’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게임 프로그램이 발매되기 전에 호응도를 조사하는 임시 공개 테스트라고 이해하면 된다. 말마따나 반지하는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라고 하는 좀 더 공식적인 시공간으로 옮겨가기 전에, 미완성 상태의 작업을 반지하 형태의 공간에 선보인다. 공모의 형태가 아니고 운영자와의 협의를 통해 접수되는 형식이기에 행정암(行政癌)이 유발될 가능성은 적다. 나아가 작가들은 전시까지로 가지 않은 미완의 무언가 이기에 부담을 덜하면서 메아리로 남았을 수 있는 질문을 나눌 수 있다. 즉 관계 맺을 시간을 상대적으로 쉽게 버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의 시각이미지의 현현과 담론을 안정된 관계를 통해 비교적 쉽게 체험할 수 있다. 이 관계 맺기가 글쓴이에겐 반지하가 해결한 시간의 문제로 비춰진다.

몽골에서는 가축을 묶을 때, 목을 매지 않고 다리 한 쪽을 맨다. 가축의 공간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개의 속도(시간)를 제약하는 것이다. 텅 빈 공간에 들어와 전시를 한 뒤에 혹은 본 뒤에 밀려드는 공허감은 ‘이걸 또 해야 하나’ 싶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도 절실했던 공간을 접수하고 나서 다시 그 공간을 운영하기까지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막연함이 신진 미술계의 숨겨진 고민일 수 있다. 공간을 점거하는 문제보다, 빨리 창작하고 기획하고 글 써서 인구의 회자에서 사그라지지 않고 담론의 시야에서 희미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 시간의 다리에 매듭을 묶어 속도의 폭력을 유예시키는 것을 고려해야 할 때는 아니냐는 것이다. 조급함을 미루어둘 수 있는 연대가 사실 자기 집을 만들고도 미생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신진 미술계에 적실하다고 본다.

관계는 경험만으로 알고, 경험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공유할 수 있는 장소 실험들이 몇 차례 선행되고 좌담회까지 열린 지금, ‘공유할 수 있는 공간’에서 ‘공유할 수 있는 시간’으로 실험을 옮겨볼 것을 제안해본다. 다음 정산까지 안녕들 하시라.

 

필자_니문

 소개_학위를 얻기 위해 돈똥을 싸고 있습니다. 책을 많이 사서 인테리어로 활용하는 취미가 있습니다. '언니'가 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