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4 텃밭예술축제 “인형의 재:발견” 레지던시

2014. 12. 31. 22:13Review

 

2014 텃밭예술축제 “인형의 재:발견” 레지던시 참가 리뷰

“그 시간. 어쩌면 그걸로 충분한”

 

글_손재린

 

올해 처음으로 소박하게 인형극을 무대에 올려본 이후 인형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질 무렵 우연히 ‘뛰다’의 레지던시 참가 게시물을 발견하고 이번 텃밭예술축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무대미술 학도로 학교를 다니던 몇 년 전 ‘뛰다’의 공연을 여러 편 접하면서 이상적인 극단의 롤모델로서 마음속에 아껴왔던 터라 ‘뛰다’의 공간에서 2주간 레지던시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니 두근두근 설렘이 있었다. 물론 레지던시에 처음 참가해보는 것이었기에 새롭게 다가올 여러 가지 상황들이 두렵기도 했다.

레지던시란 단체를 통해 선별된 예술인들이 일정 기간 동안 특정 공간에 함께 거주하면서 창작활동을 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몇 개월 동안 함께 생활하는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많이 봐왔지만 2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공연을 만드는 레지던시가 새롭기도 했고 ‘전혀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2주 안에 과연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도 많았다. 특히 프로젝트 제안자로서 내가 어느 선까지 작업을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컸다. 프로젝트 제안자는 결국 연출가인가? 과연 팀원들은 나의 제안에 얼마만큼 동의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들이 레지던시에 오는 동안 그리고 첫째 주 내내 계속되었던 것 같다.

팀원들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둘째 날 아침에 비로소 우리 팀은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만나 협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미지의 세계로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미지의 여행길에서 팀원들에게 함께 고스톱을 치자고 제안했다. 첫날 우리는 그냥 돈을 걸지 않고 쳤고(역시 돈을 걸지 않으니 재미가 없었다) 다음날 우리는 동전을 바꾸러 은행이 있는 읍내로 나갔다. 우리는 각각 만 원씩 내고 100원짜리와 500원짜리 동전으로 교환했다. 이젠 진짜 게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 팀은 그렇게 며칠 동안 고스톱을 치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항상 1등으로 밥을 먹곤 했다. 그러다 나는 역시나 습관처럼 불안해졌다. “놀더라도 작업을 빨리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물었더니 우리 팀원 박동조(극단 광 소속) 배우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열심히 작업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만큼 빨리 죽는 거야.” 농담처럼 툭 던진 말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았다. 정말 그랬다. 나도 그렇고 주변의 공연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과로로 비틀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곳은 화천. 공기 좋고 물 좋은 이 시골 텃밭에서 도시의 삶을 답습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다시 따뜻한 사랑방에서 우아하게 샹송을 들으며 고스톱을 쳤다. 우리의 이런 작업 방식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울 수도, 어쩌면 걱정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는 예술텃밭이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방식으로의 작업 역시 가능했다.

 

 

레지던시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총 4개의 팀으로 구성되었다. 지역과 장소적 특성 그리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했던 호주에서 온 Sandy Mckendrick의 팀은 마을을 다니며 이야기를 수집하고 또한 집이네 집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관찰하며 그 곳에서의 공연을 준비했다. 뛰다의 두 멤버 최재영, 최수진님의 팀은 짝사랑의 에피소드들을 오브제를 통해 따뜻하고 담백하게 그려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또 많은 시각예술가들이 함께 했던 유해랑님의 팀은 변신이라는 주제로 개성 있는 가면과 인형들을 만들고 움직임을 훈련을 진행했다. 내가 속했던 팀은 초현실주의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의 희곡<티레시아스의 유방>을 고스톱과 결합시키는 것인데 고스톱 게임의 우연적인 요소를 극에 개입시키기 위한 방법과 요소들을 찾아보는 작업을 진행했다.

낮에는 고스톱의 여유를 즐겼다면 저녁에는 프로그램이 알차게 준비되어 있었다. 워크샵 팀의 프로그램인 가면 만들기 워크샵과 아티스트들이 각자의 작업을 나누는 나눔 공연이 이어졌다. 이 곳 저곳에서 각가지 형태로 작업하는 예술가들의 작업과 뛰다 소속 배우들의 일인극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매일 밤 이렇게 공연을 볼 수 있다니 이 곳이 정말 천국이다 싶었다.

물론 이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면 하나 둘씩 카페테리아로 모여들어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그 공간의 소품들로 또 하나의 인형극이 연출되기도 하고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인형움직임은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이자 공부였다.

 

 

동시대 예술가를 만난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티레시아스의 유방>을 쓴 기욤 아폴리네르가 살았던 과거 초현실주의 작가들도 그러했듯이 동시대를 사는 예술가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욱 생동감 있는 작업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는 때때로 너무나 닫혀 있었고 작업을 공유하기 두려워했다. 그런 의미에서 축제기간 동안 진행된 나눔 공연 프로그램과 아트플랫폼은 참 좋은 자극이었다. 신기하게 이곳에 모인 예술가들은 스스럼 없이 자신의 공연을 공유했다. 그런 모습이 새롭고 좋았다. 정말 많이 배웠다. 한국 뿐 아니라 인도 출신의 무용수, 태국에서 온 퍼포머 그리고 호주에서 온 인형극 연출가 등 국가를 뛰어넘어 작업을 공유하고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추억이 되었다.

한 주 동안 이렇다 할 결과물 없이(심지어 어느 팀은 무려 10개 정도의 가면을 제작해 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고민들이 마구 뒤섞여가고 있을 무렵, 토요일 저녁에 ‘인형과 생명’이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렸다. 인형극에 관련된 이렇다 할 책도 없는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으로 느껴졌다. 인형극을 오래 해오신 선배들의 인형에 대한 생각과 솔직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왜 인형극이어야만 하는가? 인형이란 무엇일까? 작업에서 인형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러한 의문이 인형극 작업을 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니곤 했다. 이유와 계기는 제각각이겠지만 그저 어떤 물질에 불과하던 것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는 놀라운 순간을 맛본 이들은 그 매력을 거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레지던시 팀은 그것과는 정반대로 인형을 생명이 아닌 오히려 진짜 인형으로, 물질로 죽어 있는 오브제로서의 특성을 극대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우리는 이미 인형이 살아나는 순간과 감정을 이끌어내는 장면들을 익히 보아왔고 충분히 경험했지만 이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의 인형극으로서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우연성의 세계에 몸을 던져보기로 했다. 출산 장려를 가장한 소란극을 만들자는 콘셉트 안에서 극 중 캐릭터들은 무언가 무던히 애쓰지만 하나같이 의미 없는 병신 짓을 생산해 내도록 만들었다. 공연 중에 설치해 두었던 무대장치가 배우의 움직임에 의해 떨어지고 부서지고 그야말로 우연한 소란들이 속출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애쓰고 또 애쓰고 무언가 이루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그것은 한바탕의 소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공연이 시작됨과 함께 파편적인 이미지들과 소리가 허공에 떠다녔고 결국 그 파편들이 관객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결합되어 어떤 의미로 남을 것 이라고 믿는다.

 

 

사실 초기에 내가 제안했던 규모는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인형극이었으나 팀원들을 만난 뒤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무대디자이너 출신의 새내기 연출가와 버나 전공의 전통 연희자 그리고 한 명의 다재다능한 퍼포머의 결합이 과연 무엇을 탄생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대사가 아주 긴 희곡은 아니었지만 대사에 익숙한 배우들이 아니었기에 나는 팀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본을 아주 간략하게 줄이는 작업을 했다. 오히려 움직임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즉흥적인 상황을 통해 우연적인 대사들과 소리를 덧입혔다. 고스톱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각자의 개성을 담아서 인형으로 만들기도 했고 비광에 나오는 빨간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마지막 공연의 결과만 두고 본다면 어쩌면 우리의 실험은 이미 과거에 행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우연성을 개입시키려는 의도나 게임이라는 요소가 실험적이었느냐 하면 이미 공연예술계에 오래 몸담았던 분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형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젊은 청년들조차 앞뒤 안 가리고 무언가에 도전하기를 망설이는 이 시대에 시골 마을에 모여 오히려 시간이 가는 것을 즐기는 신기한 사람들이 모여 신나게 작업을 했다. 그런 자세와 방식 자체가 이미 충분히 큰 의미를 나에게 가져다 주었다. 공연이 끝난 저녁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연극에서 유쾌함과 통쾌함이 느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쩌면 우리의 의도가 통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연극에서 말하고자 했던 그 무엇보다 더 진정성 있는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했었는데 이번 작업과정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레지던시에 참여한 각 팀마다 작업의 방식은 다양했지만 모두 그런 의미에서 함께 동일한 시간들을 통과 했다고 생각한다.

 

 

낯선 시골마을에 뿌리 깊이 자리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조차 못할 일이지만 그 척박했던 첫 모습을 그려보며 오랜 시간 고생해서 공간을 유지하고 꾸려온 ‘뛰다’의 노고를 헤아려본다. 축제에 참여한 작가들이 작업에 집중하고 공간들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수고에 감사한다. 그런 오랜 준비 덕분에 멋진 공간에서 쉬고 즐기며 아름다운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2주 동안 정말 잘 놀고 작업하면서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이번 레지던시는 나에게 그 시간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의미로 남을 것이다.

 

 필자_손재린

 소개_윤동주의 시를 인형극으로 풀어낸 극단 자화상의 연출. 왕년에 캔버스에 그림깨나 그렸으나 22살 이후로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공연이 좋아 극장을 서성이는 사람.

텃밭예술축제 소개

텃밭예술축제는 강원도 화천의 소박한 자연속에서 펼쳐지는 소규모의 예술축제입니다. ‘예술가의, 예술가에 의한, 예술가를 위한 축제’를 모토로 2011년부터 시작해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의 교류와 창작 그리고 주민들과의 만남을 위한 축제로 4년째 진행되고 있습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움직임워크숍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2주간 진행되는 텃밭예술축제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즐기실 수 있습니다. 자연에서 머물며, 일구고, 나누는 시간속에서 예술로 삶을 싹 틔우는 ‘텃밭예술축제’는 올해 인형과 오브제를 주제로 진행됩니다.

M.A.P 예술텃밭 레지던시 소개 “인형의 재:발견”

M.A.P(Moving Asia Project)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예술텃밭 레지던시는 인도, 호주, 태국등 아시아의 예술가들과 국내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이 모여 탐구하며 실험하고 창작하는 시간입니다. 올해는 ‘인형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공연예술에서 인형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참여 아티스트_박동조, 서재웅, 손재린, 유해랑, 장하민, 최재영, 최수진, 음대진, 이주야, 이지연, Anuradha Venkataraman, Ladda Kongdach, Sandy Mckendrick, Siva Murugan)

시골마을 예술텃밭 소개

시골마을 예술텃밭은 공연창작집단 뛰다가 자리잡은 강원도 화천의 폐교 공간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예술텃밭은 만남을 위한 공간입니다. 예술가와 예술가들이 만나고, 그 예술가들은 작업을 통해 지역주민들과 만나고 그 만남 가운데 모두는 자기 안의 새로운 ‘나’를 만납니다. 예술은 이런 만남의 순환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시골마을 예술텃밭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몸을 땅으로 삼아 농사를 짓고 그것으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음을 깨닫는 공간입니다.

공연창작집단 뛰다

예술가들의 유기적인 공동체로서 창작, 공연, 교육활동을 통해 이 땅에 예술의 밭을 일구는 문화예술집단 입니다. ‘열린 연극’, ‘자연친화적인 연극’, ‘움직이는 연극’의 세 가지 이념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2001년 창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10여년 간 배우의 몸과 소리 그리고 오브제에 대한 연극과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연극 형식에 대한 실험을 계속해 왔습니다. 2010년에는 강원도 화천으로 이주하여 그 곳을 ‘시골마을 예술텃밭’이라 이름 짓고, 예술가들의 창작공간 이자 지역의 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