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굿을 통한 광대들의 저승길 패러디 <굿모닝 광대굿>

2015. 7. 31. 01:17Review

 

굿을 통한 광대들의 저승길 패러디

<굿모닝 광대굿>

 

글_최윤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사무치는 통곡의 곡소리가 잇따라 울려 퍼진다. 객석에서 극을 지켜보던 세 사람의 관객이 난데없이 무대로 불려 나와 망자가 된 사실을 슬퍼하며 우는 소리다. 세 사람의 무당, 세 사람의 저승사자, 악사 모두 운다. 악사는 통곡의 와중에 망자들의 못다한 꿈을 소리한다. 국악인의 꿈을 가졌었다던 고삐리는 앳된 얼굴로 싱글싱글 관객석을 바라보고, 아프리카에서 아이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싶었다던 여배우는 웃다 울다 웃는다. 한 어르신은, 가장된 죽음이 익살스러울지언정, 북받쳐 오르는 회한의 감정을 참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악사는 울지 마라 외치고, 무당들의 짓궂은 장난에 관객의 폭소가 이어진다. 죽음에 대한 광대들의 넉살 좋은 패러디, 연희집단 The 광대의 <굿모닝 광대굿>은 관객을 무대로 끌어들여 여섯 거리라는 구조의 드라마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떠올려보는 굿 같은 연극이다.

 

 

굿은 무속신앙의 제의식이며 신에게 길흉화복의 조절을 기원하는 행위다. 제의는 신과 무당, 신도 중 하나라도 없으면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한다. 이들의 굿은 매우 쉽게 이런 조건을 만족한다. 신은 저승사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은유하고, 관객은 신도를 대신하며, 무당은 광대들이 맡는다. 무대는 이들로 인해 숲 속이 되고, 신령이 지배하는 공간이 된다. 무당은 습관에 물든 인간사를 책망한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 해보기 위한 준비를 하려 한다. 무당에게는 하룻밤 동안 망자들을 안내하고 이들을 보듬어 돌려보내고 새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임무가 있다. 이 역할을 맡은 세 광대들은 수탉의 볏을 달고 등장해 공연 내내 무대를 활개친다. 수탉이 밤과 함께 극을 열고 아침과 함께 극을 닫는 이 숲 속에서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

 

 

수탉은 <굿모닝 광대굿>을 대표하는 광대의 이미지 중 하나다. 본격적으로 굿판을 벌이기 전에, 첫 등장에서 습관에 물든 인간에 대해 비탄했던 무당과 그를 보조하는 두 사람의 무당이 함께 무대와 관객석의 부정을 쓸어낸다. 말 그대로 빗자루로. 관객석에 난입하여 빗자루로 허공을 가르며 질병, 고통, 삶의 힘겨운 것들을 비질하고, 굿은 시작된다. 이들은 망자의 얼굴을 찾아내 그 이름이 적힌 종이 인형을 가지고 저승사자를 불러낸다. 망자를 무대로 초대하고, 이들을 씻기어 옷을 갈아 입히고, 저승사자가 망자를 괴롭히는 동안 망자 옆에서 그들을 지킨다. 저승길을 경험한 망자를 객석으로 돌려보낸 뒤 저승사자가 객석에서 관객들과 술판을 벌이는 때 광대는 비로소 수탉의 역할을 하게 된다. 아침이 오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저승사자를 돌려보내기 위함이다.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광대다. 빛이 있을 때 노는 존재인 이들은 무당과 다르다. 무당은 다른 이의 아픔을 고통을 회한을 대신 울어주는 존재다. 광대는 다른 이의 눈물을 웃음으로 풀어낸다. 광대들의 굿이란 웃음의 한 판 놀이다.

 

 

세 사람의 무당 외에도 세 사람의 저승사자가 주된 인물이다. 이들은 숲 속의 신령을 대신한다. 세 사람의 망자가 죽음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인 저승사자는 극의 초반에 무당의 의식을 통해 무대 위에 검은 장막을 드리우고 초대된다. 이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무당은 술과 고기로 설득시켜(저승사자는 그들의 솔직한 욕망으로 인해 인간적인 캐릭터로 해석된다.) 망자를 죽어봐야 아는 인간에서 죽어본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그 과정에서 현장성이 살아있어 생동하는 민속 예술인 연희를 통해 관객과 어울려 논다. 풍물이 흥을 돋구고 기예로 박수 갈채를 자아내며 춤과 노래로 신명 난다. 만신 김금화는 말했다. 굿은 신명 나는 잔치이며 눈물겨운 한풀이라고. 무속이 연희와 만나 관객과 놀며 저승을 이곳으로 불러온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자아낸다는 것이 이 공연이 획득한 성과일 것이다.

 

 

반면 텍스트에 담긴 극의 주제가 의식적이라는 것과 이를 실현하는 구조의 결합이 성글다는 것이 공연이 획득한 성과와는 다른 것을 관객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극의 초반과 말미에 습관에 물든 관객에게 삶의 특별함을 깨우쳐주고자 함을 반복하여 강조하는데, 이는 새 아침이 떠오르는 결말과도 연결되어 의식적인 테마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극의 주된 제재는 삶이라기보다는 죽음이다. 죽음의 체험을 하는 망자의 표정과 이들을 마주하는 관객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죽음을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재현하는 그 과정에 관객은 폭소했고 함께했다. 그렇다면, 극은 더 나은 삶이 아닌 더 나은 죽음으로의 안내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삶에 대한 욕망보다는, 페이소스에 가깝다.

 

 

죽음을 광대라는 친근한 이미지를 통해 굿으로써 풍자한 <굿모닝 광대굿>. 전통음악의 무대적 활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즐거운 해석을 보여주었고(악사들이 다루는 수 많은 악기소리로 무대가 가득 찼으며 위에서 언급한 재치 있는 노래 또한 그러했다.), 간단한 소품을 통해 캐릭터를 구분할 수 있었다는 점(저승사자가 쓴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검은 우산, 망자들에게 쥐어준 종이 인형과 작은 불빛이 들어오는 등의 활용 등.), 무엇보다 광대들의 신명 나는 놀음이 관객석을 들썩였다는 것이 극을 더욱 빛나게 했다.

죽음을 앞둔 삶에 대한 연민을 떠올린다. 광대들은 울음으로 웃는다. 그리고 관객은 폭소한다. 극의 주제는 그 폭소에 담겨 있을 것이다.

 

 

  필자_최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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