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NEWStage 선정작 <#검색하지마> 나를 보는 누군가, 누군가를 보는 너

2016. 2. 10. 10:26Review

 

나를 보는 누군가, 누군가를 보는 너

NEWStage 선정작 <#검색하지마>

정주영 작/연출

 

글_황지윤

 

해시태그(#)의 일차적 기능은 분류에 따른 검색이다. 이는 SNS상에서 특정한 주제를 모아볼 수 있도록 돕는 용이한 검색 수단으로 활용된다. 고로 해시태그는 그 자체가 이미 검색을 요청하는 지시 기호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 <#검색하지마>의 제목은 형용모순이다. 검색하지 말라는 명령 앞에 보란 듯이 해시태그가 달려 있다. 검색하라는 건가, 하지 말라는 건가. 보여주고 싶은 걸까, 보지 말라는 걸까.

 

 

제목의 형용모순처럼

검색창에 제목을 타이핑 하던 순간부터 공연은 이미 시작되었다. 수학 교사 나라의 인스타그램(@ladywoolf)에 관객이 방문한 시점부터 공연은 이미 막이 오른 셈이다. 연출은 인스타그램을 이용하여 무대 공간을 확장하고 캐릭터의 퍼스낼리티를 드러내 보인다. 인스타그램의 활용은 짧고 간결한 50분의 공연을 보다 풍부하게 만든다. 이는 무대의 시공간적인 제약을 일부 극복하며 촌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자연스럽고도 능청스럽게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훔쳐보기’, ‘보여주기’, ‘바라보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 즉 주제 전달의 측면에서도 인스타그램이라는 디지털 매체의 활용은 상당히 적절했다.

그리하여 관객은 스태프들이 만들어 놓은 ‘컨셉 계정’을 훑으며 공연 이전에 캐릭터의 내밀한 일상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다. 그녀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미를 가졌는지, 어제는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목욕할 때 모 브랜드 입욕제를 넣는 것을 즐기는 그녀의 사적이고도 사적인 취향마저 파악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녀를 무대 위에서 실제로 대면하기 이전에 얻은 정보들이다.

공연 전에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느린 관객이다. 누구에게나 SNS 하나 즈음은 있다. SNS가 판을 치는 시대에 면대면 관계 만으로는 상대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으며 관계를 선점하기도 어렵다. 공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공연 스태프들이 떠 먹여주듯이 제공한 인스타그램이라는 요긴한 정보를 사전에 활용하지 않은 당신은, 전략적이지 못한 관객이다. 하지만 @ladywoolf 계정을 샅샅이 살피고 공연을 감상한 당신은 전략적이기에 아주 약간 위험하다. 당신은 흔히 볼 수 있는 또 다른 수영이다.

 

 

바라보기와 훔쳐보기의 경계

수영은 얼마 전 나라가 수학 교사로 부임하고 있는 학교로 전학을 온 남학생이다. 수영은 나라의 SNS를 빼놓지 않고 챙겨보는 애독자이다. 수영은 바라보는 자이기도 하며 훔쳐보는 자이기도 하다. 그는 애독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음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한 끗 차이이다. 수영은 그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무대 효과는 수학 선생님을 향한 관심과 관음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수영의 욕망을 증폭시켜 보여준다. <#검색하지마>는 감각적 요소가 풍부한 공연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서사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필요한 만큼의 무대 효과를 적절히 배치한 미덕이 돋보인다.

조명은 무대 중앙 부를 향한다. 조명이 비추는 무대 한가운데에 나라가 앉아 있다. 그녀는 교무실,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며 잔업을 처리하는 중이다. 수영은 입장과 동시에 무대 가장자리를 따라 크게 걷기 시작한다. 그가 걷는 무대의 가장자리는 무대 위의 주 공간, 즉 나라가 앉아 있는 교무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둡다. 어두운 공간에 서 있는 수영이 밝은 공간에 앉아 있는 나라를 응시하며 무대를 천천히 거닌다. 물론 나라는 수영의 바라봄을 인지하지 못한다. 명암의 대비를 통해 불균형한 시선을 부각한 것은 흡사 파놉티콘의 감시 체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수영이 무대 가장자리를 천천히 거닐 때, 조명에 의해 그의 그림자가 벽면에 확대되어 비친다. 검게 확대된 수영의 그림자는 그를 익명적으로 만든다. 그는 익명의 존재이기 때문에 나라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수영은 나라의 관심 밖 존재라는 점에서 미미하다. 하지만 수영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나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벽면에 확대되어 나타난 수영의 검은 상은 그가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나라를 응시하며 무대를 몇 바퀴 거닌 수영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린다. 그리고 그는 나라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딘다. 그는 어두운 공간에서 밝은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환한 교무실에 한 전학생이 엉거주춤 서 있다. 그는 자신이 SNS를 통해 엿보던 수학 선생에게 어색하게 말을 건넨다. 그가 ‘피핑 톰’의 윤리를 무시하는 순간이다.

 

 

피핑 톰과 레이디 고다이바

엿보기를 좋아하는 사람, 또는 관음증 환자를 일컬어 ‘피핑 톰(Peeping Tom)’이라 한다. 11세기 영국, 영주인 남편의 요구에 따라 농민들의 세금 감면을 위해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 한 바퀴를 돌았던 레이디 고다이바의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농민을 위하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나체로 거리에 나선 동안 모두 커튼을 친다. 그 와중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톰만이 유일하게 커튼 틈 사이로 레이디 고다이바를 슬쩍 엿본다.

온라인을 통해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이 일상이 된 오늘, 우리 모두 조금은 피핑 톰스러운 구석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선은 있다.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규율이 없지는 않다. SNS상에서 읽었다 하더라도, 아주 친밀한 사이가 아닌 이상 상대의 지나치게 내밀한 것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는 정도의 매너는 갖추는 것이 예의다. 피핑 톰으로서 나름의 윤리라고 해야 할까.

수영은 관심을 받기 위해 그가 나라의 SNS에서 보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라며 쳇 베이커의 음악을 틀기도 하고, 그녀가 즐겨 마시는 차의 티백을 느닷없이 뒷주머니에서 꺼내 선물하기도 한다. 그녀가 드레스덴을 인상 깊게 여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굳이, 책상 위에 놓인 사진 속의 여행지가 어딘지 묻는다. 심지어 그녀의 남자관계, 더 나아가 성적인 내용을 담은 게시 글을 언급하기에 이른다. 본인의 훔쳐 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미숙한 피핑 톰의 성급함과 충동은 긴장과 불편,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한다.

나라: 상상력이 좋은 편이구나

수영: 저는 눈에 보이는 대로 믿어요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다는 수영의 대사는 그의 나이브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피핑 톰의 상상이 사실이라는 것은 판타지에 가깝다. 그리고 그 상상이 향하는 욕망은 아소 아슬아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투른 피핑 톰의 관심과 관음 사이의 모호한 응시가 마냥 불쾌하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왠지 모르게 수영의 응시를 즐기는 듯한 나라의 표정, 행동, 대사 때문이다. 자칫 불쾌할 수 있는 욕망, 아슬아슬한 사제 관계는 연출에 의해 수영과 나라가 모호한 긴장을 유지하는 선에서 끝난다. 수영이 미숙한 피핑 톰이라면 나라는 숭고하지 않은, 피핑 톰의 응시를 즐기지 않는 듯 은근히 즐기는 레이디 고다이바이다. 딱 거기까지만.

 

 

본 리뷰는 서울연극센터 ‘뉴스테이지(NEWStage : 서울문화재단 유망예술지원사업 연극분야)'의 연출가-젊은비평가 매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진제공_서울문화재단

 

  필자_황지윤

  소개_연극을 보러 다니는 철학도입니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