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박박parkpark <가곡실격>(No longer Gagok)

2016. 6. 14. 22:47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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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박parkpark

<가곡실격>(No longer Gagok)

 

 

글_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파리에는 백년만의 장마가 찾아왔다. 열흘 가량을 쉬지 않고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강가의 산책로로 내려가는 계단이 물에 잠겼고, 나무들은 수면 위로 겨우 지켜낸 잎새들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누런 흙탕물이 코앞에서 넘실거리는 강을 찾아 사람들이 구경나오던 때, 루브르의 미술품들은 흰 천에 고이 싸여 지상의 방들로 대피했다. 그러는 사이 조국에서는 몇 개의 살인 사건이 있었고, 사건의 근간을 이룬 여성 혐오의 실체가 사건 밖의 허다한 일상에서 검은 물결로 일렁이며 드러났다. 도시의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매일 매일, 그 두려웠던 몸의 기억들이 만리 밖에서도 깨워지던 나날 가운데, 한 작가가 해외의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했다. 며칠 뒤 우연히 그 소설집이 내 손에 쥐어졌으나 왜인지 선뜻 책장을 넘겨 읽게 되지 않는 동안 그렇게 계속, 비가 내렸다. 정말로, 백년만이라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꼭 작년 이맘 때의 파리에서였다. 우리집 테라스에 식탁을 펴고, 생강 유자 소스에 굴린 미트볼과 레몬 오일을 뿌린 샐러드를 먹으며 맥주를 마셨었다. 여름날이었다. 무엇을 공부하는가 하는 질문에 나는 퍽 성의없는 대답을 했었고, 어떤 작업을 하는가 되물은 내게 그녀는 머쓱하리만치 친절하고 긴 설명을 이어주었던 기억이 있다. 공간 속에서 소리가 들리는 다양한 방식에 관심을 가지며 그에 관한 작업을 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가곡’ 이라는 단어를 부러 입밖에 내지는 않았었다. 그저 ‘소리’ 라고 했다. 떨어져나오고 싶은 울타리에 대해 언제 어디서든 선을 긋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래서인지 나는 더욱 그녀의 ‘가곡’ 이 궁금했다. 특수하고 고유한 형식을 지닌 전통 장르로서의 무언가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두 번째로 만났던 날, 그때는 불어나지 않았던 세느강을 바라보며 그녀의 레지던시 건물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동그란 만월을 발견했을 때 그녀가 읊었던 몇 마디의 옛 시구 같은 것. 그렇게 그녀의 내면에서 역사가 된 노래들이 궁금했었다. 저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떼어와 음습한 극장 공간에 비정형적으로 그녀가 펼쳐놓은 달, 실격된 노래들. ‘가곡실격’ 프로젝트의 두 개 작품을 갖고 일년만에 파리를 찾은 그녀의 공연을 보러, 그러므로 나는 길을 나서야 했다. 도시의 거리들은 장마나 홍수 같은 단어들과는 멀게 느껴지는 평화로 무장돼 있었다. 불어난 강, 잠겨가는 다리마저도 그러했다. 다만 너무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이 넘실대는 계단 끝까지 내려가 앉아 맥주를 마시고 사진을 찍는 그들의 천진함이 때로 마음을 혼미케 했다. 날은 계속 흐렸지만 어느덧 비는 그친 뒤였다. 그토록 도저한 평화 속에서, 루브르의 미술품들은 어쩌면 헛되이 피신했을까. 그날 나는 공연장으로 끝내 가지 않았다. 오랜만의 산책에 피로해진 다리를 안고, 잠기지 않을 몇 뙈기의 방으로 헛되이 피신했다.

 

 

 

다음날은 일요일, 6월 하고도 닷새째가 되는 날이었다. 외곽 마을의 공연장은 너무 멀었고, 날은 여전히 흐렸다. 노래가 이어지는 다섯 개의 작은 방을 거닐며 때로는 등을 때로는 한쪽 어깨를 맞대고 앉아 그녀들로부터 소리를 전해 받는 <가곡실격 : 방5> 공연이 다섯시에, 네 개의 밤, 네 개의 꿈을 이어 네 편의 소품으로 펼쳐내는 <가곡실격 : 나흘 밤> 공연이 일곱시에 있을 예정이었다. 작은 방들을 직접 고요히 거닐며 소리 사이를 배회하고픈 마음도 없지는 않았으나, 나는 되려 소리들이 내 주위를 거니는 동안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편을 택했다. 고단했기 때문이었다. 일곱시 공연에 맞춰 집을 나설 때, 오며 가며 한 시간 씩의 전철 여행을 가늠해 문제의 소설집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세 개의 연작 중 첫 소설을 덜컹이는 차 안에서 반쯤 읽었다. 남자의 시선으로 쓰여있었지만 오롯이 여자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왜곡된 화법 속에서도 내가 가만히 그녀 마음 깊은 데까지를 모두 헤아릴 수 있던, 나보다 지치고 고단한 여자의 이야기. 지극히 평범하게, 티 나지 않게, 남편의 셔츠를 다리고 밥을 하고 집을 치우면서 매일 매일 자신을 지워갔던 여자. 그녀의 지워짐은 응당 그럴듯한 것으로 취급될 뿐이었고, 말하자면 길바닥에서 화장실에서 칼을 맞고 죽는 대신 여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죽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꿈을 꾸게 되고, 새벽에 깨어 냉장고를 응시하다가, 아침이 되자 그 속에 있던 온갖 종류의 고기를 버려버린다. 그날로부터 그녀는 세상에 대고 담담하게 올곧게 말한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아요. 그리고 여자는 깡마르게 야위어갔다. 어두운 숲, 헛간 속의 시뻘건 고깃덩어리, 얼굴이 비친 피웅덩이. 밤마다 꿈에 시달리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했고, 남편의 몸,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나는 고기냄새를 견디지 못해 그의 손길을 거부하며 돌아누웠다. 여자는 고립되었고, 그러나 그로써 여자는 비로소 그녀 자신이었다.

공연장은 변두리의 휑한 대로를 꺾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 곳에 은밀히 자리했다. 독특한 구조의 건물, 서늘한 돌벽 아래 앉아, 아직 오지 않은 이맘때의 여름날을 꿈꾸며 그 어느 더위를 피하듯 눈을 감았다. 대낮같이 밝은 저녁 일곱시, 커튼이 열리고 우리는 입장했다. 긴 나무벤치 여러개가 동그란 바닥을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 놓여있었다. 어느 적당한 끄트머리에 나는 자리했고, 저 너머, 공간 한 귀퉁이의 작은 간이 무대에서 돌연 첫 번째 소품이 시작되었다. 등지고 앉았던 몇몇 이들은 몸을 돌려야 했고, 그런다 해서 노래하는 여자들의 얼굴이 그들에게 다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간이무대는 사각의 프레임으로 막혀 있었고, 소리는 대개 가려진 곳으로부터 울려나왔다. 얼굴 없는 그녀들의 몸, 곧게 선 다리와 숨 쉬는 아랫배가 우리를 응시했을 뿐. 두 번째 소품에서는 그녀가 홀로 걸어나와, 내가 앉은 벤치 뒤쪽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난간 끝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밝은 조명이 그곳에만 떨어졌고, 노란 빛 안에서 그녀가 노래 불렀다. 처음 몇 마디를 가늘게 뽑아낼 때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나는 훔쳐 보았다. 아름다운, 기이한, 목소리가 멀리 허공으로 퍼져나가는가 하면 낮은 곳에 앉아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내 귓가에까지도 내려왔다. 나는 이따금 고개를 꺾어 그녀를 올려다보았고, 혹은 그녀 주위를 머무는 공기의 흐릿한 유영을 응시했고, 목소리가 타고 날아가는 어떤 파동들을 꿈꾸었으며, 주로 오랫동안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와 내가 온전히 우리 자신이라고 느꼈다. 말하자면 채식주의자 같은, 채식주의자 같은 우리였다. 세상의 위협에 맞서 단호히 입을 다물며 나는 고기를 먹지 않아요, 말하듯 우리는 거기 투명하게 존재했다. 세 번째 소품에서 세 여인이 각기 다른 음으로 종소리를 울리며 목소리를 섞어 노래할 때에, 그 가사 역시도 우리만의 주체적인 사랑을, 그 사랑의 지극히 능동적인 불협화를 지시하고 있었다. ‘묘하게 아름다운 남자를 보았다네. 뿅가게 아름다운 남자를 만났다네.’ 그리고 이어지던 네 번째 소품의 춤. 동그란 바닥에서 두 여인이 반복하던 동작과, 벤치들 사이사이를 걸어다니며 관객 옆자리에 앉았다가 발치에 웅크렸다가 원 바깥으로 멀어졌다 다시 돌아오면서 세 여인이 이어가던 노래 소리들. 시작하는 말은 아마도 ‘캄캄한 밤’ 이었으나, 특유의 입모양과 소리, 호흡법에 떠밀려 미처 가사가 전하는 이야기를 나는 따라가지 못하였고, 노래는 저 홀로의 물질성으로 자유로이 비상하며 공간을 점유했고, 거기 몸짓들이 따라붙었고, 나는 그 순간이 영원하였으면 하는 꿈에 사로잡혔으며, 문득 다시 가라앉기 시작하는 강의 수면처럼, 쓸쓸했다. No longer Gagok. ‘가곡실격’ 의 영문 제목은 이렇듯 그 노래가 ‘더 이상 아님’ 을 지시한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 더 이상 아님 속에 비치는 여전히 있는 얼굴들을 목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곡’ 이라는 노래는 꼭 이런 것이었을 것만 같았다. 바닥 같은, 다락 같은, 여자들의 노래. 길게 실처럼 뽑아지다가 결코 못 지을 흔적을 허공에 남기고 소멸하는 가락. 사실상 현재적으로 부상한 모든 아픔은 이미 있었던 아픔들이며, 아픔이 드러난 곳에 비로소 쓸쓸하고 다정한 손길 머문다. 먼 옛날 한 여자가 불렀을 노래를 그녀가 어쩌면 똑같이 이어 부르고, 시공을 뛰어넘어 고개 숙인 내가 그 하나의 노래를 듣고 있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어쩌면 이제서야 단 한 번 진짜 ‘가곡’ 이 된 노래를. 그러므로 실은 실격의 반대편에 있는 무언가를 끝내 발치에 끌어다 준 공연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환승역 과일 가판대 밑의 한 귀퉁이에 초라하게 만개한 작약 한 단이 5유로에 팔리고 있었다. 봄의 끝날이었다. 6호선 전철은 어느 지점에선가 지상철이 되어 강을 건넜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와 있었다. 노란 석양이 비치는 강물은 아직까진 찰랑하게 차 올라서, 강가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우고 나무 밑둥을 지우고 그렇게 우리들의 거닐 곳을 지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웅크리고 노래는 머무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나는 읽고 있었고, 열 줄 가량의 문장을 아낀 채 고개 들어 강을 바라보는 나를, 일렁이는 흙탕물이 안심시켰다.

 

 

 

 

 

* 사진출처_페이스북 Rencontres chorégraphiques internationales de Seine-Saint-Denis 

https://vimeo.com/159037947 영상캡쳐

 

 

 

 

박박parkpark – No longer Gagok

: Four Nights à découvrir ce week-end dans le cadre du Focus Corée #2

Samedi et lundi à 20:00 / Dimanche 19:00

La Parole errante à La Maison de l'arbre, Montreuil

Conception, direction, scénographie, musique : PARK Minhee

Interprétation : KIM Heeyeong, PARK Minhee, LEE Kipum, LEE Jeun, JEONG Eonjin

Chorégraphié avec : LEE Jeun, JEONG Eonjin

Création costumes : YUN Jaewon

Mise en scène : KIM Sangyeob

Scénographie : PARK Kiljong

Coproduction : Festival Bo:m (Sé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