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Critics Record1 : 대중음악 비평의 현재』, 전대한 엮음

2016. 7. 28. 16:47Review

 

대중음악 비평가라니.

『Critics Record1 : 대중음악 비평의 현재』, 전대한 엮음

2016, Archiview

 

글_유혜영

 

 

 

 

한국의 대중음악, 특히 대중음악 비평과 비평가들을 대단히 애정 하는 한 청년의 기획으로 탄생한 책이다. 청년은 대중음악 비평계에서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필자 4명과 인터뷰를 했고, 그 내용을 엮었다. 대중음악 비평에 대해서는 전혀 아카이빙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일종의 분노, 음악 비평가들은 분명 기록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선언적 믿음은 그에게 책을 발간하는 동력이 되었다.

 

대중음악 비평가라니. 지금 이곳에도 계속 흘러넘치는 음악을 그저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나와 같은 대중에게 그들의 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음악을 찾아 듣는다는 행위 자체가 어색한 나 같은 사람에게 그들의 존재는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왜 목을 매지? 정도의 관심조차도 없을 수 있는 일. 그런 존재들일 수 있다. 맥락은 다르지만, 존재가치의 측면에서 연극 비평가들도 다르지 않기에.

 

아카이빙이라. 아카이빙이 ‘전혀’ 되고 있지 않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가 소개해준 대중음악 비평 웹진은 다양했다. 각각의 컨셉이 분명하고 활동량도 대단했다. 책머리에 노트북을 열어놓고 소개된 순서대로 사이트를 열 때마다 부러움과 부끄러움과 짜증이 복잡하게 몰려왔다. 연극비평 플랫폼도 이 정도 규모로만 갖추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진짜 좋겠다.

 

몇 가지 회의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나는 그, 그리고 4명의 인터뷰이 모두가 글을 쓰는 일에 관심이 있다는 점, 그것도 2차 창작물로서 비평이라는 애매한 글쓰기에 목을 매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연대의식을 느낀다. “비평가는 늘 외로운 존재인 것 같아요. 권위같은 것은 개뿔도 없고, 욕만 먹고, 외롭기만해요”라는 김윤하 평론가의 말처럼 비평가는 그가 속한 ‘씬’에서 그리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더구나 개인의 취향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대에 비평이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는 우울한 기조는 연극이나 음악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의 존재 확인은 위로고 도전이었다. 비평은 무엇일까. 도대체 왜 할까. 어떻게 할까. 전대한의 질문은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자 나를 향한 질문이다.

 

 

 

 

김윤하에게 비평가는 “헤비리스너이고, 음악을 좀 더 좋아하는 사람이고, 똑같이 누군가의 팬인 건데 [...] 세련되든 구리든 확실한 자기 취향과 시선을 가지고 있고, 그런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비평가가 막 열을 올리면서 ‘이 음악이 우주 최고야!’라고 아무리 주장해봤자, 요즘 사람들은 자신과 합이나 주파수 같은 게 맞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추천하는 음악에 더 솔깃하게 반응하기 마련”이기에 취향을 토대로 음악을 추천하는 ‘큐레이팅’으로 비평이 변화해갈 것이라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평가에게도 취향은 거부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블락 또한 비평이 “절대다수를 커버할 수는 없”고 “비평을 하는 사람 나름의 브랜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각자의 취향이 좀 더 발전되거나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들이 말한 ‘취향’의 의미가 정서적 선호만이 아니라, 판단과 평가를 위한 비평가의 ‘기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진리가 거짓으로 드러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그럼에도 비평이 가능한 이유는 비평가의 기준이 선호를 넘어서는 설득력을 획득하고, 감상자와 창작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취향은 끝도 없이 개인화, 세분화되고 있지만, 비평가는 대중의 취향을 생성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창작집단이라고 믿는다. 비평가의 취향이 대중의 입맛을 따라가거나 맹목적 팬덤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강화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묘는 취향의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솔직하다.

 

“기본적으로 음악 비평이라는 게, 네 취향 구리다, 내 취향 좋은 거다, 왜냐하면...이런 식으로 나아가는 게 맞는 것 같거든요 [...] ‘취향 존중합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 누구도 그 어떤 이야기도 할 필요가 없게 되기 때문에, 음악에 대한 담론 자체가 아무 가치가 없겠죠. 그런 식으로 치고받고 싸우고 서로 욕하고 하는 것이야말로,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에 대해 말할 필요가 예전보다 더 늘어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주민혁은 또 다르다. 개인의 취향보다 공감이 중요하다. ‘취향 존중합니다’의 태도다.

 

“앞으로 비평은 대중과 친근하게 대화하는 형식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같이 공감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제가 비평을 하는 이유예요.”

 

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미묘의 것이다. 공감은 소중한 것이지만 창조를 가져오는 것은 갈등이다. 더군다나 내가 애정 하는 예술의 영역에서라면 비평가는 자신이 믿는 바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갈등은 창작의 밑거름이 될 것 이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 비평가는 무엇보다 글을 잘 써야 한다. 페미니즘 기반 음악비평을 독자들이 반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블락은 “그냥 진짜 그 글이 재미없어서 일수도 있잖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음악 비평이 권위를 잃은 이유가 사실 글을 못 써서라고 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매체의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주민혁은 웹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감안해 비교적 짧은 글쓰기를 선호한다.(지금 내 글이 너무 긴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검열이 살짝 든다. 검열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짧은 글을 쓴다고 해서 글쓰기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을 아니다. 그는 “비평이라는 건 결국 텍스트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글로 풀어내는 힘이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문장이나 글의 구성, 단어 선택 등에서 특색이나 힘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고,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면 음악학 논문은 쓸 수 있어도 비평가가 될 수는 없다는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창작자도, 가족도, 친구들도 반기지 않는 비평가가 되기 위해 참 생각할 것도, 갖출 것도 많다.

 

 

  

 

결국, 비평은 극한 마니아들의 작업. 그거 없이는 못사는 사람들이 숨 쉬듯이 풀어놓는 썰. 칭찬이든 비판이든 어쨌든 애정 없이는 한 줄도 못 쓰는 것. 그 애정을 굳이 글로 써야 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좋은 작품, 그리고 그것으로 밤새 떠들 수 있도록 해주는 동지들뿐이다.

 

음악을 잘 모르는 나는 음악에 관한 견해보다도 그들의 존재, 그들이 이 작업을 하는 이유에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글을 찾아 읽는 게 즐거웠다. 음악을 아는 독자라면 책의 다른 부분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전대한은 글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을 기록했다. 사람은 언제나 믿을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록되는 사람이란 한없이 부질없거나, 위대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록한 이에게는 더 많은 것들이 남았으리라 믿는다.

 

 

* 표지 이미지 사진 출처 _ 텀블벅 페이지

** 크리틱스 레코드 SNS 페이지 바로가기 >>> www.facebook.com/criticsrecord 

*** 크리틱스 레코드 관련 정보 >>> https://tumblbug.com/criticsrecord 

 

  필자_유혜영

  소개_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한 새내기입니다. 공연장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