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박찬규 작, 전인철 연출, 극단 돌파구

2016. 12. 23. 12:50Review

 

취향 있는 자들에게 고함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박찬규 작/전인철 연출 - 극단 돌파구

 

글_유혜영

 

 

1.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있을까? 어느새 서른 줄에 접어든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가족과 친구들, 주변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범위 안에 삶을 가두고 눈치를 본다. 그 ‘범위’라는 것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귀신같이 안다. 그 안에 있을 때 내 취향은 당당해지고, 소통의 기회를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내 취향인지 모른 채 적당한 범위 안의 것들을 복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눈 질끈 감고 한 발짝 벗어나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스멀스멀 타협점을 찾아 다시 선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도감을 찾는 것이 아마도 취향이란 것의 발전 과정이다. 행복하기보다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더불어 사는 삶’, 그것은 달성해야 할 무엇이기보다는 우리의 욕망이자 본능이기에.

 

 

 

 

2.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의 제목이 흥미로운 이유는 한눈에 봐도 특이한 ‘물체’와 샤랄라한 학창시절을 완성하는 필수품을 한숨에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안에서 투엑스라지 레오타드는 ‘미친 변태’의 것으로 낙인 찍히지만, 안나수이 손거울은 그럴만한 것이고, 오히려 훔쳐서라도 갖고 싶은 것이다. 안전을 위협하는 취향과 안전을 보장하는 취향이 나란히 배열되어 둘의 관계를 견주게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취향도 매번 은밀함과 당당함 그즈음에서 눈치보기 해왔음을 알게 된다. 제목에는 꽤 기묘한 긴장이 있다.

고2. 대학 갈 준비로 학생도, 선생도, 부모도 분주한 때다. 작품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어른인 체육 선생님은 공연 내내 무대를 종횡무진 한다. 극장을 들어서면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조금의 틈도 없이 똑같은 간격으로 설치된 철 기둥들을 보게 되는데, 그 기둥을 모서리 삼아 바둑판처럼 구획된 무대에서 선생님은 길을 지키고 각을 맞춰 뛰어다닌다. 맥도날드에 학생들 알바비 제대로 지급하라고 항의 전화를 넣는 그도 기둥을 뽑아낼 수는 없다. 그래서 아이들도 똑같이 길을 지키고 각을 맞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집이 잘살건, 못 살건 간에 그 지점에서는 모두가 공평하다고 무대는 말한다.

반면, 아이들은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이미 계급을 달고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쳤다. 임대아파트 산다고 안 놀리는 게 어딘 데 스터디까지 끼워줄 수는 없다. 엄마들끼리 만든 3단지 모임은 준호와 민지의 세계, 빨간색 맥도날드 유니폼을 입고 종종 휴식도 해야 하는 것은 희주 세계의 방식이다. 상위권 성적에 싸움도 꽤 하고 좋은 아파트에 사는 준호와, 부모님의 이혼 이후 아르바이트와 학교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전교 왕따 희주에게 사회로부터 요구되는 ‘개인의 취향’은 다르다. 작가는 투엑스라지 여성용 레오타드를 준호에게, 안나수이 손거울을 희주에게 쥐여주고 갈등을 극대화한다. 게다가 준호와 희주는 공연 내내 호흡을 맞춰 춤을 춰야 하는 체육 수행평가 파트너가 된다. 그들은 최선을 다한다.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희주의 절친이었지만 ‘안나수이 도난사건’으로 멀어진 민지는 준호의 여자친구로, 임대아파트에 사는 희관과 설교가 특기인 태우는 준호의 내적 갈등을 드러내는 인물들로 이야기를 엮어간다. 이탈되지 않는 이들의 관계로 인해 작품이 던지는 질문도 균형감을 갖는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가?

레오타드를 입은 변태로 자신을 몰아가는 희관에게 폭력을 퍼부은 준호는 선생님 앞에서 오히려 왈칵 눈물을 쏟는다. 그냥 막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면 어떡하냐고, 왕따시키면 어떡하냐고 울부짖는 준호에게서 도저히 이기지 못할 배제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진다. 엉덩이를 조여오는 레오타드를 입고 진심으로 행복해하며 선을 그리던 배우 백성철은 남자 몸에 입혀진 레오타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주었기에 두려움은 더욱 깊이 사무친다.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극 중 모든 인물이 행동하는 이유이자 동력이다.

 

 

 

 

 

3.

준호가 레오타드를 입은 채 친구들 앞에 서고, 희주는 안나수이를 돌려주기 위해 민지 앞에 선다. 둘은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내며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겨운 파 드 되 이후에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미덕이다. 철 기둥은 견고하다. 준호는 전학을 가고 희주는 또다시 철봉을 본다. 오래 매달리기 60초를 기어이 채워낼 것만 같은 희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체대 입시 준비 따위는 그만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기에도, 화이팅을 외쳐주기에도 씁쓸함이 남는다.

나는 공연을 통해 사회적 통념에 종속된 노예적 취향을 본다. 사회적 편견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동여매고 있는 것을 느낀다. 아니, 내가 그 안에서 나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을 깨고 나오는 것만이 정말 해답일까? 나는 분노하고 용기 냄과 동시에 타협한다. 준호의 취향은 언제까지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 희주는 안나수이를 깨버릴 필요가 있었을까? 철 기둥을 의식하며 사는 것도 결국은 나를 존중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내 두려움을 마주봐야 했던 객석에서의 긴장이 아직 생생하다. 두렵다는 건 분명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 진정 나로서 행복하고 싶다면, 우선 미리 구획된 선을 잊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사진제공_극단 돌파구

 

  필자_유혜영

  소개_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한 새내기입니다. 공연장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