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12월 레터] 결산의 달

2017. 12. 27. 16:58Letter

결산의 달


눈 깜짝할 새 12월이 됐습니다. 쏜살같다, 눈 깜짝할 새, 세월이 유수처럼, 같은 비유가 얼마나 적확한지를 새삼 느낍니다. 하루하루는 긴 것만 같은데 일주일은 금방이고, 그렇게 쌓인 한 주 한 주가 한 달을 채우는 것 또한 순식간인 것만 같습니다.


12월이 되었음을 처음 체감한 것은 '00결산' 글이 속속 올라오는 것을 보고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좋아했던 것이며 기억에 남는 것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니 휘뚜루마뚜루 찾아오기야 했어도 연말은 연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간 딱히 보고 들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과연 저 스스로는 무슨 결산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들기도 하고요.


월초부터 '결산'의 일환을 학교 안 극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졸업공연이며 기말발표가 속속 무대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올해 처음 본 졸업공연은 루쉰의 <주검鑄劍>(국내에선 <주검>또는 <검을 벼린 이야기>로 알려져 있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작품이었습니다. 준비 단계서부터 기대를 많이 받은 작품이었던지라 전석 매진에 실제로도 만석을 기록했건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니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원작 자체가 친숙한 복수극 서사를 빗겨가는, 심리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라 공연을 위해 윤색하기가 어려웠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그보다도 개별 인물이 눈에 띄지 않고 구분하기 어려운 덩어리로 보인다는 점이 마음 쓰였습니다. 이 공연을 위해 바르샤바극장에서 연출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왔습니다. 참여하는 배우와 현지 스태프에 대한 이해가 적은 외부 연출과 키스태프가 졸업공연을 만들었을 때 놓치게 되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의 모국어를 곧장 통역하는 통역사가 있어 준비하는 동안 언어의 장벽은 낮았다고 하지만,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통하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롭고 스케일 큰 시도라고 해서 결산에 적합한 것은 아님을 한참 생각하였지요.


그 다음으론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과 <북경인>을 보았습니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아서 밀러의 원작을 거의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는데, 원작이 익숙해서인지 속도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북경인>은 조우의 희곡을 바탕으로, 전쟁 중 고전적인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대가족이 안팎으로 겪는 가치갈등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길이가 긴 작품이라 여러 막으로 나누어 세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으로 구성했는데 개별 인물의 소서사와 일상적인 사변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어서 아주 느릿느릿 흘러가는 것만 같았지요. 같은 극장에서 서로 다른 빠르기로 꾸려진, 서로 다른 배경의, 오래 사랑을 받은 레퍼토리를 갓 학교를 졸업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노력으로 보게 된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작품들이 졸업 레퍼토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에 자답을 하기는 어려웠는데, 결산이란 건 여러모로 고민이 필요한 것이려니 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창작극 한 편과 장면발표를 더 보았습니다. 잘 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고 개선되었으면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중 여러 차례 생각한 것은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중국에서 공연을 보고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낀 것은 많은 이들이 중국 내 여성인권의 수준을 긍정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재된 여성혐오는 얕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가지를 긁는, 치장애만 관심이 있는, 비싼 선물만 원하는, 같은 여자를 시샘하는,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인 존재로 여성을 묘사하는 것을 어렵잖게 마주했고, 여성의 사회적 위치(혹은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와 실제 목도할 수 있는 여성혐오 사이의 괴리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내년을 위한 올해의 결산이 될 수도 있겠네요.


한편 많은 공연에서 치파오를 입은 인물을 볼 수 있었다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현대희곡의 여성캐릭터는 이전 삶의 양식을 고수하는 여성이든 신여성이든 치파오를 입는 것으로 설정되곤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마다 한 벌씩의 치파오와 구두, 숄, 장신구로 정제한 이들을 보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이유에서보다도, 그동안 중국 희곡을 영 모르고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더욱 눈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다른 것은 얼마나 아냐고 한다면, 이제부턴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또 올해가 아닌 내년으로 미룰 다짐거리 하나를 마련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결산이라는 말엔 수확의 뉘앙스가 있고 그래서 어쩐지 좋은 것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올해 처음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 풍경, 작품, 이야기가 있는 한편 올해 이별한 것들 또한 그만큼 많다는 것을 자꾸만 생각하게 됩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떠올리기를 마다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이별을 상정하고 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의 이별 또한 영영 끝이라는 뜻은 아니기를. 결산은 돌아보지 않을 매듭짓기가 아니라 앞으로 기억과 생각을 꺼내다 쓸 곳간을 만드는 일이기를.


2017년 12월 25일

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