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2월 레터] 같이

2018. 3. 6. 09:08Letter


늦은 2월 편지_같이

 

이번 달 편지를 시작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떤 말을 할 것인지는 마음을 정했지만 어떻게 말할 것인지는 쉽사리 정할 수 없었습니다. 몇 문장을 적어보다가 지우고, 차창 밖을 들여다보면서 떠오르는 이야기들에 긴 숨을 내쉬기도 하고, 속에서 천불이 나서 몇 시간이고 찬바람을 맞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화가 난다거나 마음이 아프다고만 할 수가 없는, 훨씬 더 크고 많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체념하지 않았지만 허탈한 순간도 있었고 그럼에도 멈추고 싶지 않아 숨을 고르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2016‘00계 내 성폭력해시태그를 통해 미술계, 영화계와 문단, 오타쿠 커뮤니티 등 여러 분야 내의 성폭력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올해 1월 페이스북을 통한 서지현 검사의 법조계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metoo’ 이후 문단, 연극, 영화, 방송 등 연예계, 체육계, 공기업과 사기업 내부의 미투가 이어지면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일들이 다시 발언되었습니다. 주로 동종업계 내의 위치를 이용해 선생, 선배, 고참, 동료 등의 자리에 있던 남성들이 가해자로 지목되었습니다. 동성 사이에도, 여성이 남성을 상대로도 성폭력은 일어나며 이 사실을 간과하거나 가벼이 생각하여 피해자를 사각지대에 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투성별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라고 말함으로써 젠더권력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이들 중 대다수는 피해 여성의 성적 수치심을 이용해 지속적인 폭력을 가하거나 남성 권력 카르텔의 방관과 묵인에 힘입어 활개쳤고, 때로는 이들이 권력을 쥘 수 있던 이유 중 성별도 존재함을 생각할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접속하면 친구들이 적거나 공유한 미투만으로 타임라인이 채워졌습니다. 읽으면 괴롭지만 그렇다고 읽지 않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타임라인에서 목도한 것은 이윤택을 시작으로 한 연극계 이른바 권위자’ ‘거장들의 성폭력이었습니다. 속속 추가되는 미투와 덧붙여지는 새 인물들을 보면서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먼저 생각난 것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역소극장에서 연극을 시작한 친구나, 불과 몇 달 전 보았을 때 극단을 찾아가서 연극을 시작했다던 청소년, 전공을 바꾸거나 졸업 후 다른 일을 하는 친구들, 예술 관련 기관이나 행사의 자원활동을 하는 친구들. 그 뒤로 예술학교에 입학한 이래 지금까지 겪고 목격하고 들은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한참 어린 후배이기 때문에, 연애 감정으로, 술김에, 원래 예술하는 사람은 자유로운(방종을 감싸는 이 무책임한 표현은 누가 시작한 것일까요) 법이니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들로 넘어갔던, 어떨 때는 정색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대개는 웃으며 넘기고 나서 혼자 방에 누워 곱씹었던 일들이 말입니다.

 

글을 읽고 나누고 이야기하면서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모두 저의 일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저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다른 여성이 겪은 폭력을 간접경험하고 후유증을 겪습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에는 밤에 밖을 걷기가 힘들었고 사건이 일어난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통해 직시와 행동을 멈추지는 않아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친구들과 가해자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명백한 진실인데도 카더라로만 말할 수 있던 이야기들도 꺼내었고, 공론화해야 할 문제였는데도 하소연으로 언급했던 얘기를 공식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가해자와 외부의 2차 가해도 거듭 마주했습니다. 만나서 얘기하자는 가해자들은 왜 이리 많으며, ‘자필’ ‘무릎을 꿇는다같은 표현에 방점을 찍으며 자기연민인지 자의식 과잉인지는 왜 보여주는 것인지 모를 노릇입니다. 성폭행범이 손수 글을 쓰고 무릎을 꿇어 대단하다고 해주어야 하나요? ‘그 사람 유명한데 몰랐냐고 자신의 아는 바(대체 방조자라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를 거들먹 얘기하거나, 해당 분야의 성장에 해를 끼친다(?)며 도리어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자신이 본 가해자의 일부를 이유로 들어 인격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분이 그럴 분이 아니라거나,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아야 한다는 레퍼토리는 어떻게 없어지지도 않는지. ‘왜 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것이냐는 소리에는 말문이 절로 막혔는데, ‘다 지난 일을’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네’ ‘이것도 성추행이냐같은 말들이 지금까지 만연한 성폭력에 어떤 보탬이 되었는지 전혀 생각지 않는 태도임이 자명합니다.

 

예술계 외의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 여럿도 매일 사내 인트라넷에 올라오는 글을 읽는다고 합니다. 가해자에게 솜방망이 징계가 내려지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단 걸 알지만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는다고요. 처음 ‘00계 내 성폭력에서 미술계 성폭력이 고발되었을 때, 물론 이야기하는 데 큰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어려운 일임은 당연하지만,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기 언어로 말하는 것이 익숙하고 개인작업을 하는 일이 많은 환경인지라 가능하였으리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집단작업이 주가 되는 연극 및 영화계의 미투가 이어지는 지금에도, 폐쇄적이고 위계질서가 강한 여러 단체에선 아직 꺼내놓지 못한 이야기가 있으리란 것을 생각하면 쉽사리 이 싸움을 멈춰선 안된다는 다짐이 더욱 강해집니다.

 

친구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면서도 글 그만 써야지 영화 안 한다 연극 싫어 미술계를 뜨자 소리를 습관처럼 하곤 하는데, 요즘 들어선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관두는 것 또한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미 떠나기도 했음을 압니다. 단지 적어도 제가 목격한 저의 주위에서, 당장 이곳에 발 붙이고 있는 사람들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며 깨달았을 뿐입니다.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사건을 공유하고, 보호와 비판 각각을 지체하지 않고, 가해자와 주변의 2차 가해나 업계에서의 지속적 활동을 저지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서요.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시작된 withyou가 우리를 서로서로 잇고 지탱하는 중입니다. 오늘도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같이 싸우자 사랑해,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매일이 싸움인데, 생각해 보면 지금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언제는 폭력이, 분노가, 슬픔이 없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은요. 그럼에도 하룻밤새의 기적 대신, 한참을 쌓아올린 연대가 만들어낸 변화가 지금까지 삶을 가능케 했음을요.

  

늦게 부친 이 편지는 여성의날을 즈음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돕고 함께 있으면 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극장에서도 이 움직임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않아야 하겠지요. 인디언밥에서도 예술세상의 성폭력, 강간 문화, 여성혐오에 맞서는 목소리를 내는 데 게을러지지 않으려 합니다. 함께 읽고 듣고 말하고 씁시다


2018228

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 




문단__성폭력 문제에 대해 여성의 입으로 스스로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의미로

20175월 출간된 <참고문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