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2. 22:10ㆍLetter
걷다가 머리를 툭
일주일 동안 타이베이에 갔습니다. 타이베이에 가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처음 갔을 때는 학과 답사였기 때문에 시내버스도 지하철도 타본 적이 없고 전세버스에 실려 미술관에서 박물관으로 또 다른 건축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 재미있고 참 좋았지만은 도시의 어디에 무어가 붙었는지, 말하자면 지형도를 그리기란 어려웠습니다.
아는 게 없으니 그저 용감해서 친구들이 가보라고 한 곳에 모조리 가야겠다는 단 하나의 영문 모를 목표를 잡고 전해들은 곳들을 모조리 ‘갈 곳’ 리스트에 적어 넣었습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가겠다고 마음먹은 곳에 모두 갔고, 뜻밖의 부분들이 기억하고 싶은 일을 만들었습니다.
별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식물원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한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숙소 1층에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식물원에 가겠다고 했더니 사장님이 자신이 바로 그 앞에 있는 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곳이 <고령가소년살인사건>에 나온 학교가 아닌가요? 물어보자 오늘은 평일이니 학교 안에는 들어갈 수 없겠지만 어쩌면 담을 넘는 학생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장님 본인도 학교를 다닐 때 담을 자주 넘고는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곤 일러주길, 고령가는 이전에 헌책방 거리였는데 헌책들 틈에는 금서가 많이 끼어 있었다, 학생들은 학교 담을 넘어 헌책방 거리로 가서 나라에서 유통을 금한 책을 몰래 읽고는 했다, 고령가의 의미는 그 시절에 만들어졌고 헌책방이 모두 사라진 지금은 사실 그때와 외적으로든 무엇으로든 같은 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의 맞은편에 역사박물관이 있어서 현지인들도 종종 그곳에서 특별전을 할 때나 방문을 한다고요.
역에 내려 식물원까지 걷는 길에 오래된 건물을 마주쳤습니다. 228기념관이었습니다. 실은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2.28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관람실에 적힌 설명으로 급한 공부를 했습니다. 2.28은 일제강점이 끝난 뒤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 특히 본성인을 상대로 한 차별과 억압에 맞선 대만인들의 저항운동으로, 폭력적인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다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만 전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에도 불구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무려 40년이 가까운 계엄령 아래 그 누구도 2.28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정부는 1988년에야 사건 조사에 착수하고 90년대에 들어서야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기념관에는 2.28 기록물 전시관을 비롯 희생자의 이름과 당시 나이로 채워진 벽, 현장을 재현한 공간, 영상실, 도서열람실 등이 있었습니다. 관람실을 나오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 홀에는 2.28기념관과 연대하는 세계 각지의 공간들, 광주 5.18 민주화운동기록관과 제주 4.3 평화공원,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의 이미지가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각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맨 끝 전시장에서도 맨 끝 캡션의 설명이었습니다. 2.28에 참여했던 사람들, 희생자 유가족, 이후 진상규명에 힘쓴 사람들이 2.28에 대해 일언반구도 할 수 없던 그 긴 시절 동안 대만의 여성운동, 청소년운동 등 인권운동의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 타이베이 출신의 친구에게 오늘 2.28 기념관에 다녀왔고, 여기서 시작된 불꽃이 지금의 대만에도 끊임없는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친구가 대답하길 2.28평화기념공원은 이전부터 게이 커뮤니티의 집결지로 쓰였다고 합니다. 대만에서 혼인평권이 법으로 인정된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우리의 시간도 역사가 된다는 걸 가만 생각했습니다. 서울을 걸을 때 번번이 서울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지 않지만, 종종 어떤 시간과 공간에 서울의 켜가 머리를 퉁 치고 가는 것처럼, 타이베이를 방문할 세 번째 네 번째 기회가 온다면 이곳에서도 그 불쑥 찾아오는 진동을 느낄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애정만세>의 다안 공원에서 대학생 아카펠라팀의 연습을 보고, <비정성시>의 지우펀에서 아침산책을 하다가 광산도시에 여전히 남은 무속신앙과 구복의 흔적을 보고, 필름하우스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자유석 티켓을 받곤 이번 달로 이별하게 된 부산 국도를 생각하고, 현지 인디밴드가 궁금해져 간 레코드샵에서 다른 레코드샵을 추천받아(!) 타이베이에서 활동하는 밴드들의 곡을 소개받아 듣고, 독립서점과 인디레이블 한쪽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타이베이미술상 전시를 보고, 그 여기저기들에 잔뜩 쌓인 독립예술행사며 독립영화 리플렛을 들여다보면서 이 낯선 도시가 점차 마음에 익었습니다. 죄 친구들이 시킨 대로 간 것인데 막상 도착하니 겪은 건 뜻밖의 것들이었습니다. 목표 달성하듯 해치우는 데서가 아니라 알짱알짱 기웃거리고 주위를 맴도는 데서 재미가 온다는 것을 (너무 새삼스러운 것 같아 부끄럽지만) 생각하고요.
정신을 차려 보니 끝난 2017년에 이어, 그 꼬리를 물고 찾아온 2018년 1월도 눈 한 번을 깜박이니 끝나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올 겨울 들어 제일 춥다는 말을 며칠간 연달아 듣고 나니 한 달이 그냥 사라져 버렸어요. 얼른 뜻밖의 만남을 불러올 산책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2018년 11월 29일
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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