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31. 01:10ㆍLetter
목소리가 들려
9월 상하이에서는 퀴어필름페스티벌이 열렸습니다. 저는 두 섹션을 관람했습니다. 한 번은 단편상영이었고 한 번은 장편상영이었는데, 단편은 영국문화원에서 상영됐고 장편은 레즈비언 바 ROXY에서 상영했습니다. 원래 단편 상영은 영국문화원이 아니라 더 전문적인 상영관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는데, 검열을 이유로 해당 공간에서의 상영이 취소되어 급히 장소를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여러 국가에서 온 여러 장르의 단편이 각자 다른 목소리로 이야기를 외치고 속삭였습니다. 여러 편이 좋았지만 그중 캐나다로 이주한 아랍 성소수자 난민을 다룬 다큐멘터리 <The Migrant Mixtape>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들은 성매매와 성폭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집안의 수치로 여겨지고 내쫓기기도 한다고 합니다. 캐나다에서는 아랍 성소수자 난민 구호 단체인 헬렘Helem이 활발히 활동하며 이들의 연대를 돕고, 이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된 난민 믹스테이프를 만들어 이들의 사연과 목소리를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급조한 상영관이니만큼 자리가 없었던지라 창틀에 걸터앉은 채로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으려니, 말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올해 상하이퀴어필름페스티벌의 슬로건이 선언적이었던 것도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We are here”
10월 첫 주에는 홍콩에서 전시를 하나 보았습니다. 주방용품과 불교공예품 등을 파는 거리 모퉁이에 있는, 쇼윈도와 아주 좁은 문틈만을 사용하는 전시장 ‘PRÉCÉDÉE’에서였습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전시장과 마주본 식당에서는 계속 닭을 튀기는 냄새가 났고, 이날 전시를 오픈한 작가가 만들어 온 피단 샌드위치가 관람객의 손에 들렸습니다. 작가는 평소 상식으로 믿었던 것이 사실과 다를 때 그것이 어쩌면 착각이 아니라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진실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느 우주에선가 내 얼굴일지 모르는, 혹은 내 얼굴이었으면 하는, 그도 아니면 얼굴을 직접 조합할 수 있는 세계라면 내가 만들 만한 얼굴을 타오바오에서 산 인조 피부와 속눈썹, 화장품 등으로 구현한 프로토타입이 같은 발상과 원리에 따른 상반신 모형 및 드로잉이 쇼윈도에 전시되었습니다. 1m도 되지 않는 폭의 쇼윈도 옆, 두꺼비집을 두는 가로 70cm가량의 공간에서는 작가가 기존에 만든 영상 작업이 재생됐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도 했지만 멈춰서기도 했고, 몇몇은 작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 광경은 마치 아주 작은 문틈이나 다락방, 벽난로에서 손짓하며 부르는 누군가와 거기에 응답하는 이들처럼 보였습니다. 아주 작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로 말이지요.
10월 상반기엔 연극을 봤습니다. 한 편은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각색하여 TIE(Theater In Education) 프로그램으로 만든 <상해호인>이었고 한 편은 상하이유대난민기념관에서 공연한 음악극 <백마카페>였습니다. <상해호인>은 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사천의 선인>을 번안하였는데, 연극 중간에 관객의 직접적인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주인공 선덕이 자신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며 신들의 선물을 거절하려고 할 때 관객에게 선한 사람의 정의는 무엇인지 쪽지에 써서 달라고 한다거나, 선덕의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직접 듣게 하고 누가 ‘선한 사람’인지 점수를 매겨서(!) 최종 합산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등장인물이 앞다투어 제 얘기를 들어 보라며 관객을 불러모으고 이야기꾼이 되기를 자청할 때, 이것이 브레히트적인지, <사천의 선인>으로 가능한 연출인지, TIE 모델로서 적합한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그 적극적인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 화답하던 관객들의 상기된 표정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어쩌면 <사천의 선인>은 이 연극에서 단순히 교육의 수단으로 활용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대본은 평평해지고 허술해진 감도 없잖아 있지만, 악역이며 단역의 변이랄지 다소 즉흥적이고 창의적인 비화를 듣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또 다른 공연 <백마카페>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상하이로 이주한 유대인 가족이 운영하는 ‘백마카페’라는 공간을 무대로 폴란드에서 온 선량한 유대인 주인공과 주인공에게 추근덕거리는 일본군, 항일운동을 하는 중국인 청년의 이야기를 엮었습니다. 근대 상하이에 머무르던 디아스포라인 유대 난민에 주목한 것은 흥미로웠지만, 공연 자체는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인물을 나누고 묘사하는 방식의 구태의연함이 그러했습니다. 유일한 악인은 일본인이고, 상냥하고 다정한 여자 주인공은 그에게도 공평한 호의를 베풀며 같이 춤을 추지요. 추석 연휴에 유덕화와 견자단이 나오는 영화 <추룡>을 보았을 때 이 영화의 악인이 영국 경찰로 특정지어지는 것에 기묘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나쁜놈’을 외부에 있는 것으로만 상정하게끔 하는 내적 판단과 외적 제약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상기하게 됐습니다. 어떤 목소리가 외치는 동안 어떤 목소리는 사라지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월의 하반기에는 상하이국제예술제가 열렸습니다. 이름은 어딘가 관변적이지만 행사의 종류는 너무나 프린지였습니다(!) 그만큼 이 축제는 저를 처음 프린지에 갔을 때, 밥을 거르고 극장에서 극장으로 뜀박질하며 공연을 보던 때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학생들이 만든 공연이 주를 이루었고 회사 내 동아리나 동료 두 사람이 참가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8일간 스물다섯 편 정도를 보았습니다. 전시, 퍼포먼스, 무용, 연극, 마임, 밴드 공연, 탱고, 음악극, 인형극 등이었습니다. 매일 구깃구깃한 리플렛을 펼쳐들고 시간표와 약도를 확인했습니다. 시간표에 이미 본 공연과 앞으로 볼 공연을 표시하고 이 공연장에서 저 공연장까지 얼마 정도가 걸릴지를 가늠하고, 거리를 걸을 때도 공연히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던지요. 축제 내내 완벽하지 못하고 완결내지 못한 것을 꺼내 보이는 용기, 열심이지만 어딘가 부족한, 노력과 우연 중 그 무엇이 응답할지 알 수 없는 시도들, 때때로 겪는 실패와 성취의 놀라운 기쁨 같은 것들이 길가에 넘실거렸습니다. 이곳에서는 많은 공연이 커튼콜 뒤 배우는 물론 연출과 스태프를 호명하며 이들에게 박수치는 시간을 갖는데, 이때 연출이 한두 마디를 더하기도 합니다. 이번 축제의 커튼콜에서는 하이난에서 온 신체연극 팀과 쓰촨에서 온 천극(경극이 베이징의 공연예술이라면 천극은 쓰촨―사천―의 공연예술로 쓰촨 사투리를 씁니다) 팀이 거의 비슷한 뉘앙스로 ‘하이난에서/쓰촨에서 하는 활동을 상하이에서 선보일 수 있어 기쁘다, 앞으로 하이난의/쓰촨의 예술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큰 대륙이지만 대도시, 베이징과 상하이에 문화예술 인프라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 만큼 이들이 지역에서 팀을 꾸리고 공연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마주할지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참,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얼마나 멋지고 재미있는 일인지요.
2017년 10월 27일
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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