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23. 13:08ㆍLetter
머리를 맞대고
11월 상하이에서는 기후변화연극제Climate Change Theater Action Festival가 열렸습니다. 전세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이 축제는 ‘기후변화연극운동’의 일환으로, 각국 각지에서 제각각의 방식으로 열린다고 합니다. 기후변화연극운동 허브에 모인 희곡을 지역의 연출 및 배우가 공연으로 만들어내기도 하고, 해당 지역의 활동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면서 지역과 지역 사이 교집합과 여집합을 가진, 커다란 합집합으로서의 국제 축제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상하이 기후변화연극제는 관광지로 익숙한 티엔즈팡의 우슈 도장을 활용한 극장 씨어터 인 티엔즈팡Theatre in Tianzifang에서 이틀간 5-6분 남짓의 공연을 릴레이로 진행하는 방식으로 꾸려졌습니다. 무대나 객석이 없이 널찍한 맨바닥에 좌석 겸 펜스로 쓰일 쿠션을 깔아 구역을 삼등분한 뒤 무대를 옮겨가며 틈 없이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우슈 도장의 푹신한 바닥과 운동할 때 쓰는 탄성 좋고 기다란 천, 한 쪽 벽을 채운 거울 등이 무대의 일부이자 소품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저는 이 축제에서 펭귄의 언어로 말하는 과학자로 단역 출연을 하고(?) 환경보호를 위해 출력하는 대신 웹상에서 공유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기후 변화’라는 구체적 테마가 미리 정해진 채 준비된 축제인 만큼, 공연을 보는 동안 특정 주제를 갖고 작품을 만드는 일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로는 이 시도가 어려운 것이라는 점도요. 또렷하고 명석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있는 한편 소재에 천착하고자 하는 시도가 애초에 무용할 때도 있고, 헛발질을 할 때도 있다는 걸 느끼게 하는 작품도 있었지요. 또한 ‘전세계행동’이라는 것이 사실은 참 주관적이고 일방적이라는 마음도 들었는데, 이를테면 ‘쓰나미 이후 만나지 못한 딸을 위해 매일 파도에 도시락을 실어 보내는 사람’이라는 구절 직후 ‘우리의 더러움을 모두 처리해 주는 바다에 박수를 보냅시다’라는 구절을 배치했을 때, 그것이 비록 별개의 대사이자 이어지는 논리가 아닐지언정 경솔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 특히 큰 재해와 사고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트리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크게 고려하지 않은 작가와 관객만이 쓰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그러했습니다. 모든 희곡이 영어로 쓰이고 영어로 공연된다는 점도 아쉬움이자 고민거리로 다가왔습니다.
참가작 중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본 작품은 <Oh How We love Our Tuna!>였습니다. 5분 남짓의 짧은 독백극으로, 장거리 이동에 능하고, 체온조절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고, 맛있고, 로보트가 재현하고 싶어하는 유선형의 몸통을 가지고 있는 다랑어에게 찬사를 쏟아내면서, 그렇게 사랑하는 참치를,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어떻게 생태계를 교란하는 방식으로 양식하고, 값을 매기고 치열하게 입찰하는지로 이어지는 언술의 과정이 흡인력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도리어 기후변화축제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맥락을 가져 더 재미있던 것이기도 해서, 축제의 바깥, 다른 무대에서 공연됐을 때 여전히 매력이 유효할지 궁금하기도 하였지요. 나란히 모여 머리를 맞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때로 적절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듯 좌충우돌 우여곡절에도 불구 폐막과 커튼콜을 거치며 좋은 기억이 큼직하게 남았습니다. 특히 이튿날 하우스 오픈 전 참가하는 모든 이들이 둥글게 모여서 손을 마주잡고 단전에서부터 각자의 손끝으로 기를 전달하는 즉석 야매 에너지 전달식을 했는데, 왜 항상 가장 근질거리는 일이 인정하기 수줍은 감동을 주는 것인지, 새삼 또 생각했지요.
축제가 끝나고는 명당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았습니다. <유동자회동>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 전시는 평생직장/자가주택/생활터전/정기소득 그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 ‘유동자precariot’라는 개념에 초점을 두고 세계화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전시였습니다. 세계화라는 단어의 어감과 의미와 용례가 과거와는 달라진 시점에 어떻게 다시 ‘세계화’를 전시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자리였습니다. 역시 각국 각지의 작가와 작업이 하나의 주제로 하나의 공간에 모여든 것이었지만, 주제가 먼저 정해지고 작품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전시가 결정되고 작가를 섭외한 것인지라 기후변화축제와는 내용과 결이 사뭇 달랐습니다. 이 전시에서 기억나는 것은 프랑스 내의 알제리계 프랑스인, 중국 광동 지역의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다룬 영상 작업들이었는데, 축제에서 영어로만 공연되는 작품들의 시계視界가 한정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여기선 21세기에도 여전히 ‘한민족’이라는 말을 쓰는 나라서 온 제가 일상의 고민으로 삼지 못했던 장면을 목도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문화’라는 표현은 때때로 얼마나 기만적이게 느껴지는지요. 어쩌면 다문화라는 분류이자 분리 자체가 문화가 다양하지 않다는 걸 반증하는 표현인 것은 아닌지.
여기서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전시를 한참 보던 중 벽과 바닥에 매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는 작가가 와서 이 글과 그림은 모두 본인이 쓰나요? 저는 쓸 수가 없나요? 물었더니 써도 괜찮다고 유성매직을 주어서 바닥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글을 쓰는 동안에 그곳엔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작가는 바닥이 차다고 깔고 앉을 누빔 옷도 주었습니다. 앉아서 그럭저럭 무의미한 글을 생각나는 대로 쓰자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전시장 곳곳의 문자를 소리 내 읽고 해독했던 것처럼, 제 글도 누군가 읽어내고자 할지. 당시엔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편지를 쓰다 보니 알고 싶어지네요.
서울에서는 머지않아 서울독립영화제가 시작되겠어요. (좋겠다.) 한 해 동안 만들어진 독립영화를 만난다는 건 한 해 동안 쌓인 이야기들, 때로는 한 해를 넘어 아주 긴 시간 동안, 그러나 올해 꺼낼 만할 이유가 있었을 이야기들을 만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김없이 가자미눈을 뜨게 만드는 요절복통 GV가 그럼에도 은근슬쩍 기다려지는 건, 만나서 대화한다는 게 만드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자주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틀림없이 혼자 볼 때와는 또 다른 영화적 경험이 축제에는 존재하겠지요. 날이 춥고, 어딘가에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고 따끈따끈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간절해져요.
2017년 11월 22일
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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