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4월 레터] 4월을, 4월에 기억하게 될 것들

2018. 5. 2. 08:58Letter

 

4월을, 4월에 기억하게 될 것들

 

4월이 되자마자 초조함 비슷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매년 4월로 달력을 넘기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4년 전부터 4월을 나는 것은 항상 그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정한 '날짜'의 존재라는 게 그런 것 같습니다. 입 밖으로 이야기를 공유하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들을 생각하고, 소리 높여 외쳐야 할 것과 직접 발로 뛰고 손을 내밀어야 할 곳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은 일상의 실천이겠지만, 기억이 모조리 튀어나와 웅성거리는 날이 찾아온다는 건 아주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물며 생일도 사람을 울적하고 심란하게 만들곤 하는 걸요.

 

4월 중순, 나흘 동안 중국의 무용가 원회가 진행하는 워크샵에 다녀왔습니다. 영상과 신체-동작을 결합하는 퍼포먼스, 구체적인 기억과 관련된 음식을 두고 회상에 기반해 만든 퍼포먼스, 두 퍼포먼스를 만들며 구상한 최종 퍼포먼스 세 작품을 만드는 활동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중 음식을 매개로 회상을 나누는 시간에 어릴적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친구는 쌀알을 튀겨 만든 뻥튀기를 가져와서 뻥튀기 기계가 마을을 찾아왔을 때 또래 아이들이 얼마나 신났었는지, 뻥튀기 기계 앞이 어떻게 마을의 구심점이 되었는지 말했습니다. 다른 친구는 사람들이 양을 치고 소를 돌보는 마을에 살면서 할아버지를 대신해 양을 치고 오면 받았던 막대사탕에 얽힌 추억을 들려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개인적 이야기가 거시사로 넘어가는 순간을 포착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억이 사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남을 수는 없는 걸까? 의문을 갖다가 곧이어 생각했습니다. 결국 기억은 더 넓은 세계를 토양 삼아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고요.

 

그 뒤로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기억과 보존, 사라짐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던 이 시간에 몇몇 이들은 쓰촨대지진과 9.11에 대해 말했습니다. 중국의 90(90년대 이후 출생자)에게 쓰촨대지진은 십 대 시절 경험한 국가적 재난으로, 아주 개인적인 기억과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집단 기억(당시 '엄마, 울지 마세요'라는 문구 아래 현장보도와 다큐멘터리 등이 만들어지고 시와 사설이 쓰였던 것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저 또한 그 당시 뉴스가 생생한데, 그렇대도 중국인 친구들만큼 또렷한 기억을 가질 수는 없을 테고 실제로도 제겐 그만큼의 기억은 없다는 것이 새삼스럽게도 마음에 박혔습니다.

 

9.11 이야기는 또 달랐습니다. 구미 지역에서 온 친구들은 9.11이 너무나 큰 일이었던 동시에 9.11의 이미지는 기묘한 스펙터클이라고, 자연재해와 다른 감각을 준다고 말했고, 미국인 친구들은 이제 우린 9.11 유머를 하기도 한다고 했지만, 저는 눈으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재난만을 기억하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자조이건 고소이건 만들어지지가 않기 때문에, 어떤 말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멕시코인 친구와 둘이 걷다가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때 건물에서 청소를 하던, 허드렛일을 맡던, 탈출하지 못했던 사람 중 다수가 라틴계 이민자였고, 그 뒤로 이어진 이민자 정책 역시 국경을 맞댄 멕시코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고요. 어느 기억을 일반화하는 것이, '당사자로서 농담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일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전선언입니다. 아주 오래간만에 본 남북정상회담 장면인데 놀랍기 이전에 그렇게 어색하거나 생경하지가 않다는 것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눈물이 핑 핑 나서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곧장 낙관의 세계로 비행할 수는 없겠지만은, 좋은 마음을 먹고는 싶습니다.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평양냉면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북한 사람들은 다 고깃국물에 만 국수를 먹어 보았을까 생각한 뒤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종종 초등학생 때 '즐거운 생활' 첫 단원에서 배운 <서로서로 도와가며>를 흥얼거리기도 합니다. '아랫집 윗집 사이에 울타리는 있지만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내 일처럼 여기고 서로서로 도와가며 한 집처럼 지내자' 이 노래가 기억의 중요한 부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도 궁금합니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4월을 잘 맞을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하는 것에 옳고 틀린 것이야 없겠지만서도 그 방식은 여러가지일 텐데, 어떤 크기와 방법이 가장 충분하게 기억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결국 답은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확실히, 매년 똑같은 4월을 살지도 않을 거고 살 수도 없겠지요. 기왕이면은 오늘보다 내일이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잘 기억을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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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


▲ photo by Wang 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