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 17:34ㆍLetter
시절과 장소
춘삼월이라더니 달이 바뀌자 정말 날이 풀렸습니다. 영영 풀린 것은 아니고 겨울이 기습하는 틈틈이 있기는 하지만, 또 따뜻한 기운이 햇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미세먼지 이불 아래서 오는 날들도 많기야 하지만, 그래도 얼추 봄이라고 불러줄 정도는 되었습니다.
삼월에는 익숙한 희곡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중 첫번째는 <죽음과 소녀>였습니다. 원작 8막을 그대로 살려 긴 호흡으로 완성한 공연은 특별히 놀랍거나 새롭지는 않을지 몰라도 충실하고 정성스럽게 준비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소극장에서 무대전환을 하지 않고, 인물 세 사람이 가급적 백스테이지로 퇴장하지 않고 무대 위에서 목격자의 시선을 견지하면서 촘촘함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와 한참 마음 속을 자갈처럼 굴러다니던 것은 무대 위의 사정이 아니었습니다. 빠올리나가 헤라르도 앞에서 분노할 때 관객이 간헐적으로 터뜨리던 웃음이었습니다. 마치 낡은 부부 꽁트의 '바가지를 긁히는' 장면을 보듯이요. 결코 코미디를 염두에 두고 만들지 않은 장면에서, 남편을 향해 아내가 화를 내는 모습을 과민반응이고 웃음 날 법한 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적잖이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중국 여성이 중국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고 가사노동이 여성의 전적인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선물 바라는 여자' '남자에게 심술 부리는 여자' '악착 같은 아줌마'등의 여성혐오 이미지를 문제라고 느끼지 않고 소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바가지 긁는' 듯한 느낌을 '좋아'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역사적으로는 자기검열과 은폐를 필요로 했던 현대사가 독재정권 아래 고문 피해자라는 주인공의 위치와 관객 사이를 거리두게 하는 것인지 싶기도 했습니다.
리투아니아에서 온 OKT의 <갈매기>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줄인 데 없이, 중간휴식 한 번을 두고 세 시간 가량으로 구성한 공연이었습니다. (리투아니아인 친구는 'OKT는 꼭 체홉을 하지 않더라도 항상 관객 에너지를 많이 소모시켜'라고 말했는데, 이런 이미지를 가지면서 대중적 인기가 있는 극단이라는 게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작의 짧은 대사까지도 상당수 살리는 한편 무대와 복장은 현대화/간결화했고, 제4의 벽을 아예 시각적으로 내보여서 두드리고 옮기고 무너뜨리고 넘는 것을 은유하는 것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던 것은 공연 중간 중간 객석을 향해 배우들이 중국어로 준비한 대사를 읊을 때, 즉 본래의 희곡에서 빗겨간 거의 유일한 예외적 순간에, 관객이 그다지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우가 중국어로 말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배우가 중국어를 중국어로 들리지 않는 수준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못 알아들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모든 것을 떠나서 '굳이 리투아니아인이 중국어를 한다고 해서 반응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랬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시아 국가에 적용되던 서양 극단/밴드 등의) 일종의'서비스'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뒤로 멍징회가 연출한 <사랑에 빠진 코뿔소>를 보았습니다. 1999년 초연 이후 중국 본토 내 창작 현대극 중에선 단연 압도적인 인기를 얻으며 여러 지역에서 수차례 공연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베이징프린지페스티벌을 운영하고 우전연극제를 만든 멍징회가 중국 연극계에서 갖는 스타성도 그 인기에 한몫하고 있습니다. 공연은 두 주인공과 앙상블들의 코메디가 교차되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트레드밀과 침대, 비닐 장막처럼 지속성, 탄성, 무게감, 독특한 소리 등 특수한 성질을 갖는 물건들을 무대장치로 활용하는 것이 인상깊었습니다만, 본인의 일방적인 순정을 여자 주인공에게 들이미는 남자 주인공과 여성 앙상블을 성적 대상화하는 장면들, 적극적인 여성을 그 자체로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표현하는 순간들엔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여성 주인공을 아슬아슬 스치게끔 모래를 쏟아붓는 장면에선 배우를 건강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철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관객이 폭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장면에 웃음을 터뜨렸고, 시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주는 장면 앞에 셔터를 누르곤 했습니다. 이 공연이 하는 이야기는 이미 2018년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음이 자명한 데엔 어떤 반응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시절에 초연된 공연이 그 시절 그 장소를 떠나서도 계속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그렇게 공연이 지속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 걸까 생각했습니다. 매 시절 좋은 이야기라는 것이 있을 수도.. 있으려나요? 그러나 적어도 매 시절 옳은 방식이란 건... 과연 있을까요? 매 공간에서 동등한 기운을 주고받는 공연이란 건, 분명 없으려나요? 3월 내내 그 생각을 참 여러 번 했습니다. 어느 시절 어느 장소에 어느 이야기가 어느 관객에게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요?
3월 31일
인디언밥 필자
김송요
'Le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디언밥 7월 레터] 먼 곳이라는 말 (0) | 2018.08.05 |
---|---|
[인디언밥 6월 레터] 여름에 본 영화 (0) | 2018.07.02 |
[인디언밥 5월 레터] 5월에 축제 (0) | 2018.06.06 |
[인디언밥 4월 레터] 4월을, 4월에 기억하게 될 것들 (0) | 2018.05.02 |
[인디언밥 2월 레터] 같이 (0) | 2018.03.06 |
[인디언밥 1월 레터] 걷다가 머리를 툭 (0) | 2018.02.02 |
[인디언밥 12월 레터] 결산의 달 (0) | 2017.12.27 |
[인디언밥 11월 레터] 머리를 맞대고 (0) | 2017.11.23 |
[인디언밥 10월 레터]목소리가 들려 (0) | 2017.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