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배우 김신록의, 누군가 할 때까지 일단 나라도 한다! 연기비평 <믿음의 기원2>

2018. 10. 20. 11:20Review

김신록의, 누군가 할 때까지 일단 나라도 한다. 연기비평.  

 

이 코너를 통해 누구의 호연이 빛났다는 식의 한 줄짜리 첨언을 넘어 선 본격적인 연기비평을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연극의 형식이 확장될수록 그것을 구현하는 배우의 연기 역시 여러 층위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가 연출이나 극작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온전한 비평의 대상이 됨으로써, 배우, 연출가, 관객 모두에게 분석가능하고 실험 가능한 것으로 이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필자 김신록(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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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와 실재 사이, 비어있는 몸으로 그리는_

<믿음의 기원2 : 후쿠시마의 바람>

상상만발극장 제작 / 신안진, 선명균, 주혜원, 조성현, 신지우 출연 


글_김신록

  


비어있는 몸

긴 복도식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앉은 관객들 사이로 다섯 명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배우들은 일상에서 입고 다녔을 자신의 옷을 입고 관객이 앉아있는 의자들 사이를 지나다니거나 관객처럼 의자에 앉기도 한다.

 

정말로 안전 바가 올라갔다니까, 이만큼

그러니까 난 어지러워서 저기 멀리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거 알아? 먼 데, 아주 먼-데를 쳐다보면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아주 먼-데를 봐야 돼, 그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아주 조용해져 그럼, 아무리 높은데 올라가도 어지럽지 않고, 아찔하지도 않고, 소리 지르는 것도 안 들려. 그래서 바다를 본거야. 너무 어지럽고 아찔해서, 아주 먼-바다를 본거야

 

배우 혹은 역할로서의 아우라라는 기름기를 쏙 뺀 배우(재만 역, 조성현 분)가 위와 같이 전후 맥락이 부재한 말을 내뱉기 시작하자, 배우를 바라보고 있던 관객들은 이내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고 대사의 이미지를 그려보거나 내용을 이해해보려고 애를 쓴다. 위 대사를 발화하는 배우의 몸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것을 감각하고 있는지, 바다는 어디에 있는지 등 그 어떤 것도 제시하지도, 재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배우의 몸은 어떤 면에서 대사 속의 상황이나 장소를 빗겨나 비어있고 관객은 비어있는 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눈을 감고 이 주는 정보에 매달린다. 그러나 배우의 말 역시,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감각에 가 닿으려는 노력에서 빗겨나 있다. 보통 연기 화술수업에서 훈련하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말하기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무덤덤하다.

 

이와 달리 병원에서 태어나 평생 병원에서 지내왔다는 정보로 이해되는 배우(수진 역, 신지우 분)가 객석 의자들 사이에서 바다, 바다가 있는 줄 몰랐어라고 말하는 순간에, 배우의 눈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펼쳐진 바다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울러 바다를 처음 보는 사람의 감격 혹은 애틋함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은 여기가 바다라고 믿어보자’, 저 배우가 바다를 처음 본 인물이라고 믿어보자고 잠깐 결심한다.

 

그러나 곧이어 모든 것이 석연찮다. 인물은 어디에 있는가. 바다에 있는가. 혹은 바다의 기억을 떠올리는 현재의 다른 곳에 있는가.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이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는 인물은 잘 모르겠고 배우는 극장에 있다뿐이다. 그럼에도 극의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면 인물은 장면마다 돈가스 집에도 있고, 바닷가에도 있고, 병원에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배우들은 그 어떤 장소성도 몸으로 제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배우의 몸은 자신이 발화하는 장소와 시간에서 빗겨나 있다. 허구적인 세트 없이 의자만 놓인 극장 안에 실재하고 있는 배우의 몸은, 허구 속의 말과 극장이라는 실재 사이 어디 즈음에 놓여있다.

 


어긋난 시선

배우들은 단 한 번도 서로를 직접 쳐다보지 않는다. ‘결국은 소통했네~’ 하면서 중요한 순간에 한 번은 마주 보려나 기대했으나, 배우들은 단 한 번도 서로를 직접 응시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어긋한 시선과 비어있는 몸을 통해 극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과에서 효과적으로 놓여난다. 예를 들어 돈가스 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경호 역, 선명균 분)과 여(규인 역, 주혜원 분)를 두 배우가 의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혹은 각기 다른 의자에서 다른 곳을 응시하며 연기함으로써, 관객은 두 사람의 대화를 상황으로만 이해하지 않게 된다. 각자가 기억하는 진실이 모두 다름을 보여줬던 <라쇼몽>처럼, 관객은 인물 혹은 배우 각자의 진술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조합해 나간다.

 

다섯 명의 배우들을 두고 이 둘이 연인인지 부부인지, 저 둘은 부모 자식 간 인지 남남인지 등의 인물 관계를 추적하고, 조각난 장면들 사이의 전후 관계를 유추하던 관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전후와 인과, 심지어 관계마저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 극이 기댈 수 있는 허구는 인물도 아니고 이야기도 아니고, 완결된 세계에 대한 믿음, 증명 가능한 인과에 대한 확신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여러 사건이 겹치듯 함께 발화되는 장면이 더해지면, 어쩌면 이 사람들은 역사 속에 반복되었을 유사한 상황의 조각난 조합처럼, 한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을 지도, 같은 공간 속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마저 든다.



허구와 실재 사이

극 중 객석에서 넋 놓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 즐거우라고 하는 일 아니야. 여기 극장도 아니고라고 말하는 배우(선명균 분)의 입을 빌어, 연극은 다시 한 번 허구와 실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배우는 여기 극장도 아니고라는 (아무런 극적 장치도 없기 때문에)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을 하지만, 이미 그 몸이 너무나 극장에 실재하고 있음으로써, 허구와 실재를 동시에 발화하는 것 같은 효과를 갖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연극 보는 관객의 본분에 맞게 극장도 아니고라는 허구를 믿어줘야 할지, ‘여기 극장이잖아!’라는 실재를 믿어야 할지, 믿음을 취사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같은 효과는 사사키 아타루라는 역할(신안진 분)을 통해서도 성취된다. 극 중 유일하게 이름이 불리는 역할은 사사키 아타루라는 학자인데, 이 역할은 마치 인물같은 이름을 대놓고는 천연덕스럽게 작가가 써놓은 지식과 정보를 열심히 전달해 준다허를 찌르는 사실은, 사사키 아타루는 실존하는 일본의 철학자이고 극에서 발화되는 내용은 2011년 4월 “기코쿠니아 서던 세미나”에서 그가 강연한 내용의 일부라는 점이다. 실재하는 인물의 실재했던 발화는 신안진 배우의 ‘방금 소개받은 사사키 아타루라고 합니다’라는 허구의 발화를 통해 허구와 실재 사이로 부양한다.


배우 자신의 옷을 입고 무대에 섰다는 것이 이미 힌트를 주지만, 배우들은 시간이 갈수록 배우와 인물의 중간 어디 즈음의 정체성으로 무대에 존재한다. 인물의 말을 발화할 때 배우들은 적극적으로 인물을 구축 하거나 인물이 말하는 장소성이나 감각 등을 구현해 관객으로 하여금 허구를 믿게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발화하지 않을 때 배우들은 주로 관객들과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는데, 적극적으로 인물로서의 여운을 가지고 있거나, 명확하게 배우 자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직전에 직접 발화한 인물의 말들이 지금 배우로서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가늠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다. 부실한 허구를, 혹은 규정할 수 없는 진실을 믿어보려 발버둥치지 않는 그 담백한 얼굴이 믿음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에 충분하다.


 

극의 말미에 쓰나미가 몰려오는 장면에서 음향디자이너 정혜수가 작업한 음향을 통해 빗소리와 진동소리가 극장 안으로 밀려온다. 성능 좋은 음향 장치 덕인지, 혹은 한 시간 반 이라는 공연 시간 동안 덮어놓고 허구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인지, 관객은 음향효과가 구축하는 상상 속의 시공간을 경험하는 대신, 지금 자신이 앉아있는 극장 안으로 소리와 진동이라는 실재가 밀려드는 것을 또랑또랑하게 경험한다. 뒤늦게 배우 한 명(주혜원 분)이 손바닥을 들어 빗물을 느끼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지만 허구에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몸짓 역시 믿음을 취사선택해야만 하는 허약한 믿음의 기원을 들춰낼 뿐이다.   



*사진제공_상상만발극장 

**상상만발극장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imagineatre.com


 필자_김신록

 

 소개_연극하는 김신록입니다. 오늘부터 잘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