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5. 20:11ㆍReview
다시, 입자의 스퍼트
<신의 입자>
낭만유랑단 @혜화동1번지
글_권혜린
송경화 작, 연출, 출연의 <신의 입자>는 혜화동1번지 6기 동인의 ‘마지막 축제’인 2018 가을 페스티벌 [막판 스퍼트] 참가작이다. 현대물리학의 개념과 이론이 제목에서부터 전면적으로 등장하여 긴장감을 주기는 했지만, 극 속에서 현실적인 문제와 잘 어우러져 추상적인 듯한 개념에 실감이 부여되었다.
극이 시작되면 극작가이자, 연출가이자, 유일한 배우인 주인공이 커튼을 치며 등장한다. 벽에 걸려 있는 바람개비와 그림들은 주인공의 딸과 관련된 것이다. 주인공은 딸이 만들어 준 컴퓨터로 작품을 쓰는 동시에 진행하기 시작한다. 새벽하늘색이 LCD가 되는 낭만적이면서도 간결한 새 노트북은 특이하게도 Delete 키와 Enter 키만 존재한다. ‘삭제’ 키와 ‘문단 바꾸기’ 키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새 대본을 쓸 수 있다. 그것이 엄마와 연극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내용을 담은 연극 <신의 입자>를 만들어 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극이 이어지면서 문단을 바꾸는 Enter 키는 자주 등장하지만 상대적으로 Delete 키는 부재한다. 이는 있던 것을 지워 버리거나 거슬러 올라가거나, 또는 되돌아가기에는 고민의 정도가 깊고 치열함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으나 과거 회상이 아닌 다른 방식의 Delete 키를 기대했던 입장에서는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고민과 갈등의 치열함을 일관되게 잘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막판 스퍼트’라는 주제에 적합했다.
‘엄마-연극인’의 공존이 분출하는 에너지
사실 정체성 간의 충돌이라는 주제 자체는 새롭지 않다. 그러나 삶이 투영된 정체성의 충돌을 신의 입자를 통해 보여 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벽에 있는 화이트보드가, 야광으로 써서 빛나는 바닥이, 또 다른 벽에 있는 흑색 칠판이 신의 입자에 대한 강의가 이어지는 장소가 된다. 이렇게 삼면이 강의실이 되는 곳에서 ‘신의 입자(God Particle)’, 즉 힉스 보손(Higgs boson)이 나온다. 기본 입자에 존재로서의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인 신의 입자는 주인공에게는 곧 자신의 존재에 질량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한다. 연극을 통해 연극인이라는 존재가 되는지, 딸을 통해 엄마라는 존재가 되는지, 그리하여 연극과 딸은 존재를 부여하고 있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다양한 물리학 용어들이 등장하다 보니 나아가는 과정이 녹록지는 않다. 물론 강의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의 상황도 자주 틈입한다. 극단 낭만유랑단 단원의 절반은 육아 휴직으로, 남은 절반의 절반은 공연 휴직으로, 또다시 남은 절반의 절반은 지긋지긋하다는 이유로 공연에 참가하지 못한다. 여기에 더해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입자인 주인공이 유일한 등장인물로서 자신의 말을 직접 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작품 소개에서는 ‘긴 독백’이라고 표현하지만 독백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주인공을 ‘누나’라고 부르면서 연극의 사건, 의도, 목적 등 연극의 이론을 환청처럼 되풀이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있고 딸의 목소리와 딸과의 대화도 때때로 끼어든다. 그렇다면 결국 존재에게, 즉 존재가 되기 위한 입자에 필요한 것은 관계이자 상호작용일 것이다. 신의 입자와 상호작용을 많이 해야 질량이 커지고, 반대로 상호작용을 적게 하면 질량이 작아진다는 점에서 상호작용은 신의 입자의 존재론적인 조건이자 근거가 된다. 상호작용이 사건을 만들고 사건이 존재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입자의 존재를 증명해 줄 상호작용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 작품에서는 딸의 비중이 커 보인다. 꼭 딸이 만들어 준 노트북으로 대본을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연극을 하면서 딸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 딸이 투정을 부리거나 남편과 딸이 자신과 거리를 두는 것 같고 분리될 때 ‘사이, 암전’처럼 어둠이 내린다. 암전이 편리한 방식이라면서 비난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지만 그렇게 혼자서 묵묵히 견뎌야 하는 시간도 상호작용의 일부일지 모른다. <꽁꽁꽁>이라는 동화를 통해 ‘엄마가 집에 안 들어온다’고 하는 딸의 말이 의도와 목적에 부합하는 ‘연극적인 사건’이라고 바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상호작용에서 드러나는 상처이다. 이는 자신의 일에 대해 아무리 항변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갈등을 살면서,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왔기에 다소 억울한 감정을 갖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갈등의 핵심인 듯한 딸은 역설적으로 주인공에게는 글루온으로서 연극인과 엄마 사이를 붙어 있게 해 준다. 입자와 반입자, 즉 연극인과 엄마라는 존재는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없으며 반대 방향에서 존재한다. 이것이 오히려 자멸을 막는 길로서 역설적인 균형 상태를 만들어 낸다. 반입자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스스로 붕괴되는 것이다. 이처럼 딸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연극인과 엄마라는 반대 방향의 위치가 존재할 수 있다.
또한 글루온은 풍차를 돌리는 바람 같은 것으로서 삶의 원동력을 상징한다. 바람개비가 돌아가지 않고 벽에 붙어 있기만 한다면 정적인 장식품 외의 역할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극 속에서 맹렬하게 돌아가는 바람개비는 ‘에너지’를 보여 준다. 맥주를 마시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일과 가족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어려워 한쪽이 희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절감했기에 나타나는 반응일 것이다. 그렇지만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딸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움직일 수 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반대로 바람이 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가족과 연극의 충돌이 빚어낸 질량
‘신의 입자’ 강의도 계속 이어진다. 시장, 광장, 공장으로 연달아 나타나는 ‘장’은 ‘힉스 장’을 경유하여 ‘극장’으로 나아간다. 딸의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극장으로서의 장 역시 그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 장은 또한 연극 안에서 분절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장과 장 사이가 길어도 그 시간을 견뎌야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문단이 다시 바뀌면서 ‘시공간’ 장에서는 바닥에 형광으로 필기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수인 실수에 대해, 1차원적인 시간에 대해, 3차원적인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까지만 나온다면 비교적 평화로울지 모르나, 우리라는 입자는 빅뱅 이후에 나타난다. 혼돈 이후에야 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극 속에서 호두를 망치로 깨는 것으로 가시화하는 폭발은 안정감 있게 모여드는 존재가 아니라 파편으로서 산산조각 나고 흩어지는 존재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존재는 허수의 시간으로서 수직적인 시간이며 휘어진 공간에서만 만나는 시공간, 구로 흘러서 계속 출발점에 도착하는 시공간, 팽창하고 수축하는 시공간과 맞물린다. 일직선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이 튕겼다가 돌아오듯이 예측할 수 없는 불확정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입자로서의 존재도 이와 같아 동일성이나 안정성을 유지하기 어려우며 그렇기에 주인공이 겪는 모든 갈등과 고민도 어쩌면 존재론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자로서의 존재를 신은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극은 여기에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신을 왜 믿어야 하는가?
‘신은 없지만 신의 입자를 발견하고, 신은 믿지 않아도 신의 입자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마지막 장의 주제이다. 커튼이 젖히면서 나타난 공간은 신의 입자를 발견하게 되는 실험실이다. 신의 입자는 자연적으로 발견할 수 없고 입자를 충돌시켜 만든다고 한다. 그리하여 과학자들이 만든 인위적인 ‘장’인 실험실에서 입자는 막판 스퍼트라도 하듯이 맹렬하게 달린다. 살아남기 위해 빨리 뛰므로, 조금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뛰므로 볼 수 있는 것은 흔적들뿐이다. 충돌의 흔적들인 것이다.
그 흔적 속에는 삶에서 겪는 많은 충돌로서 ‘모든 애들은 가족이랑 있고, 모든 가족은 애들이랑 있다’는 딸의 말도 담겨 있고, 세 시간씩 쪽잠 자고 극장에서 밤샘하고 집에서도 대본만 붙들고 있던 치열한 연극 만들기의 과정도 담겨 있다. 질량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라톤을 하는 듯한 극한의 상황에서 주인공은 계속 뛴다. 4천만분의 1초가 영원처럼 느껴지고, 백억만 번의 충돌 중에서 단 한 번만 신의 입자를 만날 수 있다. 그 안에는 고통이 가득하다. 가족은 ‘너만 없으면 된다’고 이야기하고, 글쓰기는 고통스럽다. 신을 향해 책을 던지면서 ‘문장, 젠장, 환장’이라고 하며 또다시 장의 목록이 늘어설 때 뛰는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껴진다. ‘신의 입자(God Particle)’는 원래 ‘빌어먹을 입자(Goddamn Particle)’였는데 언어가 순화되면서 Goddamn에서 damn이 떨어져 나가 God으로 변했다고 한다. Goddamn과 God의 간극 혹은 연관성이 이 작품과도 연결되어 보인다. 알 수 없지만 존재하고, 빌어먹을 정도로 안 보이지만 그게 있어야 살기에 필요한 것. 그러한 역설과 양면성이 연극과 가족이라는 존재의 근거에 두루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양쪽 다 버릴 수 없다면 치열하게 겪어 낼 수밖에 없다. 다시 엄마라고 불렸던 날을 담은 일기와, 연극을 할수록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질문이 입자와 반입자로서 공존하면서 막이 내린다.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기에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공존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하나도 소멸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다른 하나도 자동으로 소멸할 테니. 충돌과 상호작용이 존재 자체이다. 그러니 두 가지를 양손 저울에 올려놓고 조금씩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개의 존재, 두 개의 에필로그
이 작품에는 에필로그가 두 개 나온다. 첫 번째 에필로그에서는 엄마가 해로 등장하여 바람과 공존한다. 팔을 벌리고 안아 주는 것 같은 이미지이다. 마치 딸과 화해하는 듯하다. 충돌 후의 입자는 처음의 입자와 달라야 한다. 그래야 다음 장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만 끝나지는 않는다. ‘다음 장’이 무엇인지 다음 에필로그에서 약간의 암시를 준다. ‘진짜 에필로그’로서 두 번째 에필로그에서는 4차원을 이야기하며 3차원은 허상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진짜로 진실한 4차원의 세계는 아마 극장에 존재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막이 내린다. 충돌의 공존을 보여 주는 ‘지금, 여기’로서 극장의 시공간이 진실의 ‘장’일 것이다. 에필로그 역시 입자와 반입자로서 두 개가 필요하며 두 개의 존재인 엄마와 연극인이 함께 있어야 가능해진다. 전반적으로 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연극 역시 놓치지 않고 있다.
작품을 되새김질하면서 ‘막판 스퍼트’와 ‘신의 입자’를 함께 놓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막판 스퍼트’에서 ‘막판’, 마지막 판이라는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신의 입자’에서는 신이라는 더 큰 존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점점 그 위치가 이동하면서 ‘스퍼트’와 ‘입자’ 쪽으로 무게 중심이 변했다. 입자가 끊임없이 스퍼트하는 한, 막판은 그대로 끝이 아니라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을 느끼자 끝나지 않을 연극과 극장의 존재들에 대해 조금, 사실은 아주 많이 안심할 수 있었다.■
*사진제공_극단 낭만유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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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_권혜린 소개_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
신의 입자
10.18(목)-10.28(일), 평일 20:00 주말 15:00 (월요일 공연없음) 나는 어떻게 존재가 되는가, 누가 나에게 질량을 부여하는가 나는 모든 것일 수도, 그저 아주 작은 입자일수도 있다. 나는 나만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여기 존재하고 있지만, 너는 나를 보지 못한 채 스쳐 지난다. 그렇다고 여기 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 힉스 보손(Higgs boson)은 현대물리학에서 기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즉 존재를 부여하는 입자이다. <신의 입자>는 질량을 얻고자 힉스 보손을 찾는 한 입자의 긴 독백이다.
낭만유랑단 지역 간, 세대 간의 허물없는 소통, 내적치유와 회복, 잃어버린 자기 발견을 모토로, 삶에 치어 웃음도, 꿈도, 낭만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시 낭만을 찾아주고 싶어 2009년 결성되었다. 최근작으로는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2018) <제12장 불완전성 정리>(2017) <프라메이드>(2016) <뼈의 노래>(2015) 등이 있다. - 작·연출·출연_ 송경화 무대_ 최현주 조명_ 박성희 음악_ 김운환 무대감독_ 이유성 조연출_ 유주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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