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신록의, 누군가 할 때까지 일단 나라도 한다. 연기비평 <애들러와 깁>

2018. 11. 18. 18:47Review

김신록의 누군가 할 때까지 일단 나라도 한다’, 연기비평

 


배우와 인물 사이, 존재의 층위에 대한 탐구

<애들러와 깁>

손원정 번역, 연출 / 팀 크라우치 작 / 극단 코끼리만보 


글_김신록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서 오늘날의 예술과 소비, 그리고 욕망의 관계를 질문하다.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팀 크라우치(Tim Crouch)’는 연극이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꾸준히 탐색해왔다. 그는 최신작 <애들러와 깁>에서, 연극 특유의 놀이성과 허구성을 이용해 현대인들이 예술과 예술가를 어떤 방식으로 소유하고, 소비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소위 사실주의연극의 현실 재현 방식이 허구적인 세계의 내부적인 의사소통만으로 완결되는 닫힌 세계를 지향한다면, 팀 크라우치 작/손원정 연출의 <애들러와 깁>은 내부적으로 완결된 허구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열린 세계를 탐색한다. 허구적으로 완결된 닫힌 세계에서 인물로만 존재하던 배우는, 균열된 허구 사이로 실재가 침범하는 열린 세계 속에서 배우와 인물 사이, ‘진짜와 가짜의 경계어디 즈음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요구받게 된다. <애들러와 깁>은 배우와 인물 사이의 세분화된 존재의 층위를 탐구하기에 제법 유효하다.

극은 크게 세 개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예술가 애들러와 깁에 대한 논문을 발표 하는 학생(김은정 분)의 세계, 둘째는 애들러와 깁의 삶을 영화로 만들고자 하는 배우 루이즈(윤현길 분)와 매니저 샘(문성복 분) 그리고 그들과 맞닥뜨리는 깁(최희진 분)의 세계, 셋째는 이 전체를 관조하고 있는 소녀(김윤희 분)의 세계이다.


 

<외부적 세계>

첫 번째 세계는 한 학생이 장학금 수혜를 위한 논문 프리젠테이션 중이다라는 상황 설정 하에, 학생 역을 맡은 배우(김은정 분)가 관객에게 극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 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학생의 이름은 루이즈 엘리자베스 메인으로 두 번째 세계에 등장하는 루이즈라는 인물의 12년 전 모습인데, 이 사실관계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12년 전의 루이즈라는 설정은, 학생이라는 역할을 맡은 배우가 자신이 전달하는 정보에 절대적인 애정과 관심, 열정과 관점을 갖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학생 역을 맡은 김은정 배우는 시종일관 무대로 진입하지 않고 무대와 객석 사이 통로에 서서 논문발표를 듣는 청중으로 상정된 관객에게 직접 정보를 전달한다. 사실 애들러와 깁이라는 예술가는 극작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이므로, 학생이 전달하는 예술가에 대한 정보는 결국 모두 가짜. 하지만 김은정이 수행해야 하는 학생이라는 역할의 핵심은 관객이 이 가짜정보를 진짜로 착각하도록 프리젠테이션을 잘 해내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는 ‘12년 전의 루이즈라는 인물이 논문을 발표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대신 논문 발표 중인 학생이라는 느슨한 허구에 기대어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시하게 된다. 정보를 전달한다는 실재가 학생 혹은 12년 전의 루이즈라는 허구보다 더 강력하게 작동 할 때, 무대는 제 4의 벽을 넘어선다.



<내부적 세계>

학생이나 소녀와는 달리 인물들이 각자의 이름을 가진 두 번째 세계는, 전통적인 희곡에서 볼 수 있는 허구 안에서 완결된 닫힌 세계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난꾸러기 극작가는 장면 초반의 한참을 인물들 각자가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가만히 서서 대사를 발화하게 함으로써 허구적인 세계가 신체적으로 완결되지 못하게 만든다. 배우들은 등장하자마자 차렷 자세로 객석을 향해 대사를 읊어대는데, 아무리 사실적으로 열심히 연기를 하려해도 이미 아주 사실적이지 않은신체적 상황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 관객은, 배우라는 진짜와 인물이라는 가짜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인물이라는 가짜가 진짜가 되도록분투 중인 배우를 보게 된다. 시간이 지나 배우들이 인물의 몸으로 공간을 움직이며 연기하기 시작하면 관객은 비로소 마음 놓고 인물을 바라보게 된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배우의 인물 되기 과정을 병치시킨다면, 이 작품에서 가장 다양한 존재의 층위를 가질 수 있는 인물은 루이즈다. 루이즈로 접근하는 윤현길, 루이즈, 애들러로 접근하는 루이즈, 애들러 등 총 4개의 층위가 그것이다. 영리한 작가가 주인공의 직업을 배우로 설정함으로써 실제 이 역할을 맡은 배우는 배우와 인물의 관계를 중층적으로 설계 가능하게 된다. 주제적으로 루이즈는 예술과 소비, 그리고 욕망의 관계를 묻고 있지만, 형식적으로 루이즈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 대한 중층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매개적 세계>

세 번째 세계에 존재하는 소녀(김윤희 분)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세계에 개입할 수 있으며 관객과도 소통할 수 있는 매개적인 세계에 위치하고 있다. 공연 도입부에 관객에게 소품을 하나하나 소개하듯 들어 보여준 소녀는, 논문 프리젠테이션을 핑계로 관객에게 정보 전달 중인 배우를 바라보고 있거나, 한창 연기 중인 배우의 손에 상황과 동떨어진 삽, 인형, 망치 같은 생뚱맞은 소품을 쥐어 주거나, 극 전개에 필요한 음향을 무대 위 카세트로 직접 틀어주기도 하고, ‘보이라는 이름의 개를 대신해 위치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소녀의 행위는 허구의 세계를 보조하면서도 동시에 허구의 역설(力說)을 무화시킨다. 소녀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무대 전체가 연극놀이 중임을 제시하고, 소녀를 통해 극장과 관객, 무대 장치, 소품, 배우 존재의 실재가 노출된다.

다만, 연출적으로 소녀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지 않다. 김윤희 배우는 마치 초월적인 존재처럼 무표정으로 말없이 무대 이곳저곳에 개입하고, 등장인물들은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무대 위 허구 속 인물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팜플렛에는 소녀라고 명시되어 있는 이 역할은 허구의 인물인가, 아니면 연출적인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진짜 배우인가. ‘소녀혹은 김윤희 배우는 인물로서 가져가는 허구의 흐름이 있는가 아니면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과 그에 따른 기능만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한 결정이 연출적으로 더 명확했다면 연기적 수행의 성격이 더 선명했을 것이다.

 

팀 크라우치는 허구와 실재, 가짜와 진짜의 정글짐 안에서 배우와 인물 사이의 다양한 정체성이 노출되도록 극을 구조화 해 놓았다. 관객과 배우 모두 배우=인물이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배우와 인물 사이 존재의 층위에 대한 더 세부적인 탐색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됐을 때 작품 소개 글에 언급된 연극의 허구성과 놀이성,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희곡의 구조와 연출의 구성을 넘어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서도 시도될 수 있지 않을까.


*사진제공_K아트플래닛 


 필자_김신록

 소개_연극하는 김신록입니다. 오늘부터 잘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