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12월 레터] 올해가 가기 전에

2018. 12. 11. 12:09Letter


올해가 가기 전에

 

그새 12월이라니요. 하루하루는 느릿느릿 흘러가면서 일주일 한 달 일 년은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만 같습니다. 실감을 거부할래도 하기가 어려웠는데, 11월부터 12월의 초입인 지금까지 매주 거의 한 번씩 크리스마스 마켓에 갔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크리스마스 장식물에 사람들의 이름을 써주는 일을 했지요.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려니 연말이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제가 지내는 도시는 겨울이 좀 늦게 왔습니다. 언제 가 버릴까 애면글면 가을의 꽁지깃을 붙들고, 얇은 옷 주머니에 환절기 기침을 대비한 사탕 두어 알을 넣은 채로 공연을 보러 다니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보이체크>를 봤는데요, 해외에서 연출을 초빙해 만든 공연이었습니다. 부조리극의 장치로 쓰인 유머가 문화적 차이에 의해 튕겨져나오는 순간이 어색했고, 모든 장면이 정면을 향하고 있어 (중국 연극에서 자주 목격되는) 변사에 가까운 내레이션의 개입을 재연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곳 상하이에서는 서방국가(!)에서 연출을 초청해 공연하는 일이 적지 않은데, 이때마다 과잉이라고 해도 좋을 기대가 뒤따릅니다. 이 공연에도 큰 예산이 책정되고 비교적 긴 공연기간이 배정되었으며 작품에 학생들의 직접적인 의견 반영이 어려움에도 불구 졸업공연으로 지정되어 대대적 홍보를 거쳤습니다. 바깥의 시선을 끌어오는 것은 재미나지만 그 바깥이 언제나 서양이고 그걸 맹목적인 '좋음'으로 여기는 것은 2018년에 하기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일 년간 본 상하이의 공연도 돌이켜 보았습니다. 서양희곡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고, 중국 근현대 작품도 계속 공연되기는 하나 대표적인 현대극 극장인 상하이화극센터가 장기 개보수에 들어가면서 이른바 정통극의 무대가 줄어든 상태입니다. 창작공연의 경우 경향성이 있었는데 '응답하라'류의 학창시절 회상 이야기이되 남자가 주인공으로 평면적인 첫사랑 여자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관객참여형 미스터리 극 역시 종종 만날 수 있었는데, 서사 자체는 간단하고 예측 가능하되 관객이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작품이 많았습니다. 낭독공연이나 신체극도 꾸준히 볼 수 있고, 뮤지컬은 꽤 큰 파이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이중 적지 않은 숫자가 한국 공연의 라이센스판인데 최근엔 <라흐마니노프>가 있었고요, 12월 공연되는 <랭보>는 한중합작으로 한국 스태프들이 중국판 제작과 연출에 참여했습니다. 뮤지컬은 상하이 관객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는데 그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상하이에서 유독 많이 만날 수 있는 이 장르가 어떤 방향으로, 얼마만큼의 크기로 힘을 발휘할지 궁금해집니다.

아직도 독립예술을 만나기란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독립영화는 현지인들도 '나도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가 왕왕이고, 연극계에서 가장 '독립'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공연은 상하이 거주 외국인들이 만드는데 여기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비전문인력이 많은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프로덕션이 언제나 '알음알음'으로 꾸려지고 현지의 전문인력과(아니, 아마추어와도) 전혀 교류하지 않아 특히 기술적인 면에서 발전이 없다시피한 상태입니다. 독립예술을 만날 공간으로 떠오르는 곳은 전시공간입니다. 4-5년 사이 우후죽순 생겨난 전시장들은 규모가 천차만별인 작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비록 대안공간의 규모나 성격은 아닐지라도 비교적 다양성을 갖습니다. 특히 전시장에서 하는 공연이 새로운 가능성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시공간에서 일어나는 퍼포먼스에는 극장에 올라가는 연극에 따라붙는 제약이나 검열이 크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가 바뀌기 전 본 반가운 얼굴도 생각납니다. 하루는 청두에서 온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는 지금 다니는 극단 일을 잠시 쉬고 내년 일 년간 상하이에 올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청두는 모든 것이 느리고 변하는 것이 적어서 평화롭지만 아쉬운 점도 많다고요. 소수의 작품이 장기 공연되고,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일이 적고, 청두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 도시들을 포함하는 순회공연이 많다고 합니다. 청두라면 쓰촨의 대표적인 도시인데도 공연의 흐름이 아주 느리다는 것이지요. 지난번 청두 출신의 다른 친구와 지아장커의 <쟝후알뉘>를 보았을 때 그 친구가 '중국 소도시에서 온 사람에게 더 공감을 불러올 영화'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중국처럼 지역문화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에서도 도시간의 격차는 여전히 존재하고, 실상 상하이 정도의 대도시 또한 근 몇 년 동안 큰 보폭으로 달려 겨우 베이징의 문화자본을 따라잡고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됐어요.

영화도 조금 봤습니다. 어쩌다 보니 극장에서보단 VOD를 많이 봤는데 그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나는 약신이 아니다>입니다. 상반기 가장 이슈가 되었던 영화인데 그때는 보지 못하고, VOD 오픈일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통에 서비스가 시작되자마자 빨려들어가듯(그도 그럴 게, VOD 서비스 사이트의 모든 페이지에 배너가 있었기 때문에) 보게 되었어요. '중국과 외국'이라는 보편적 소재에 의약산업이라는 뜻밖의 요소를 결합한, 아주 손쉽게 말하면 휴먼드라마지만, <전랑>을 비롯 근래 흥행에 성공한 다수의 여타 현지 영화처럼 납작하게 묘사된 외국을 바닥재 삼아 애국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아니란 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영화에서 중국은 복합적인 감정으로 묘사됩니다. 배금주의, 의료사업과 민영 제약업체, 사람들의 순종과 불신과 체념, 호연지기, 자아비판, 소극적 태도.. 그 모든 요소들이 현재의 중국이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는지 상상하게 했습니다. 이 영화가 아주 예외적이고 비판적이라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시사하는 점이 많은 것은 분명합니다. 개혁개방4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행사 중 이 영화의 개봉 및 상영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한편 생각한 것은 최근 영화관의 풍경입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는 딱히 큰 반응이 돌아오지 않고, <아쿠아맨>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중국 국산 영화가 다 그렇듯) 중국인(실은 중국 국적이 아니지만)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코미디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한데 어쩌면 그중 한 원인은 이 영화가 서구권에서 세탁소, 수퍼마켓, 동아시아 음식점을 하는 중국계 이민자의 생활보다 동남아시아에서 굳건한 화교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상류층의 삶을 사는, 기득권으로서의 중국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묘한 배경 설정이 할리웃에서 아시안 주연의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데서 오는 고무적 감정 이전에 익숙한 드라마 문법을 소비하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고요.

<아쿠아맨>은 외국영화 첫날 흥행기록을 경신하고 현재 최단시간 최다관객을 동원한 외국영화 자리까지 등극했습니다. 단순하고 친절한 스토리텔링과 히어로 중에서도 사뭇 신화적인 면이 강한 캐릭터의 특성, 전세계 프리미어 개봉이라는 이점의 영향이 컸을 테지만 감독인 제임스 완이 말레이시아 이주 화교 가정에서 태어난 호주인.. '중국의 아들'로 간주된다는 것도 아주 무시할 순 없는 고려사항일 것입니다. 제임스 완처럼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상업영화 제작자이자 감독도 중국에서 '화교'로 정체화된다는 것도,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대신 자막에 그의 중국 이름을 써서 꼭 짚어주는 태도도 흥미로웠습니다.

지난달에 아크람 칸의 <제노스>를 보았습니다. 아크람 칸이 댄서로서 참여하는 마지막 공연이라고 해서 진작부터 기대하고 갔는데, 이야기의 내용도 방식도 정말 작정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아크람 칸이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꺼내놓고 가겠다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열흘 쯤 지나 극장에서 공연에 사용된 솔방울 백 킬로그램을 나누어준다는 공지를 올렸습니다. 집에 가는 길 극장에 들러서 낱개로 포장된 솔방울을 받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장식 대신에 이것을 간직하자고 생각했습니다. 한 해가 저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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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필자

김 송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