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리뷰] <연극- 개와 인간> "휴머니스트와 도그니스트의 만남"

글_조원석


예술인 연구소에서 연극 한편이 오른다. 예술인 연구소는 종로6가와 종로7가가 만나는 사거리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하얀색 타일의 2층 건물이다. 건물 입구 왼쪽에 신문지 한 장이 붙어 있다. 형광색 동그라미가 군데군데 신문지에 그려져 있고 그 동그라미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다. 나는 모여 있는 사람들 틈에 나를 끼우고 신문을 훑는다.

‘헛간’, ‘불’, ‘개 두 마리’, ‘의리의 견공’, ‘구조’, ‘살신성인’, ‘각박한 사회’, ‘교훈’, ‘시비’, ‘말다툼’, ‘홧김’, ‘살인’, ‘돈’, ‘이웃 간의 정’, ‘두 남자’, ‘오랜 친구 사이’, ‘폭행’, ‘사기’, ‘교훈’,
 
신문지 밑에 신문지 너비만 한 길이의 띠종이가 연극 제목과 더불어 짧은 언급을 하고 있다.

‘개와 인간-본능을 잃어버린 개와 본능을 잃어버린 인간이 본능을 찾아 집 안에서 뒹구는 어드벤처 연극’

이 짧은 문구는 내가 이 연극을 보게 된 계기가 된다. 이 문구를 난 우연히 만난 짜라시에서 보았다.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를 걷다가 만난 수많은 찌라시의 향연. 그 향연 속에 소크라테스처럼 특출난 찌라시가 있었는데 이 찌라시의 특별함은 디자인이나 질에서 오는 특별함이 아니라 수량에서 오는 특별함이었다. 다섯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한 줄로 걸어가며 아스팔트 대지 위에 찌라시를 뿌리고 있었는데,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 ‘찌라시 뿌리는 사람들’로 환생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연극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찌라시들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다 덮어 버리는 것이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일지도 모른다. 엄청난 찌라시의 공포. 하찮은 벌레라도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공포는 커진다. 그 공포에 대한 각인. 그 각인을 이용한 홍보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겐 이런 홍보가 먹혔다. 지금 이렇게 연극을 보러 왔으니까. 

무대에 앞과 뒤가 뚫린 정육면체의 나무 상자가 놓여 있다. 그 상자는 일종의 개집이다. 그리고 그 개집에 두 사람이 두 마리의 개처럼 앉아있다. 흰둥이와 검둥이. 흰 옷과 검은 옷을  입었지만 개처럼 분장하지는 않았다.
 
 “ 어이! 잡종.”
 “ 왜 불러? 형제.”
 “ 심심해 죽겠다.”
 “ 그럼 굶어. 한 이틀 굶으면 심심한 건 싹 사라질걸. 그리고 생기가 돌 거야. 안 그러면 진짜 굶어 죽을 수 있으니까.”
“ 미쳤냐! 주인이 있는데 왜 굶어?”
“ 줘도 먹지 마.
“ 안 먹으면 주인이 가만히 있을까? 만일 내가 굶으면 주인은 큰 병이 난 줄 알걸. 왜냐면 난 개니까. 본능을 거부하는 개는 없어. 만일 본능을 거부하면 개를 개로 안 볼걸.”
“ 바로 그거야! 개가 개처럼 굴면 사람들은 싫어해. 오히려 사람처럼 굴어야 사랑을 받지.”

이무상 연출의 ‘개와 인간’의 주제는 이무상씨가 얘기했듯이 단순하다. ‘사랑은 본능이다. 사랑하기보다는 사랑 받는 것을 좋아한다.’

‘사랑하기보다는 사랑 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연극에서는 ‘사랑하기’와 ‘사랑 받기’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사랑을 받고 싶으면 사랑부터 하라’고 얘기하지만 결국 처음 시작은 ‘사랑하기’이다.

 개들은 관심을 받기 위해 애교를 떨거나, 아픈 척을 한다. 마치 인간의 아이 같다. 심지어 관심을 받기 위해 식욕을 거부하기로 계획 한다. 식욕을 거부하기로 했지만 식욕을 거부하는 자신을 걱정하는 주인을 오히려 걱정한다. 이것이 ‘사랑’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상대방을 괴롭게 하면서도 자신의 행위는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경우 말이다. 이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개는 단식을 하지 않는다. 주인에 대한 걱정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단식을 제안했던 검둥이는 인간에 대한 혐오를 지니고 있다. 그 혐오는 인간이 자신들을 중심에 두고 다른 생물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 인간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 우리는 그냥 욕이야. 다 큰 개한테 개새끼라고 하잖아.”
“ 가끔 칭찬도 하잖아.”
“ 어떻게?”
“ 인간보다 나은 개라고 동상도 세워주고. 우리의 영웅 오수의 개처럼 말이야”
“ 개가 개다워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짓을 하니까 칭찬하는 거야. ‘개보다 못한 인간’을 보라고. 인간이 개 같은 짓을 하니까 욕을 하는 거라고.  우리는 그냥 욕이야.”
“ 그래도 개들을 칭찬한 경우도 있을 거야.”
“ 유일하게 하나 있지.”
“ 어떤 개?”
“ 서당개.”

‘개보다 못한 인간’이든 ‘인간보다 더 나은 개’든 결국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내린 평가다. 인간의 우월성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충견이나 명견들은 개의 본능을 뛰어 넘은 걸까? 주인을 위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뛰어 넘은 개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온 개들. 희생이라는 것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일까? 어쩌면 희생도 개들의 본성이 아닐까? 지극한 사랑을 받은 개들이 가지는 본성. 희생이 사랑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면, 사랑이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듯 희생 역시 인간만의 특권은 아니다.

개들의 주인은 벙어리이고 직업은 도둑이다. 도둑이라고 해서 은행을 털거나, 집을 털거나 하는 도둑이 아니라 거리에 나와 있는 과일이나, 빵 등을 훔치는 잡도둑이다.
 벙어리이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신세 한탄이나 외로움은 없지만 개들을 쓰다듬거나, 훔쳐온 빵을 개들에게 줄 때 간간히 나오는 “어버버”와 개들의 대화를 통해 잠작할 수 있다. 

“ 어버버 버.”
“ 맛있게 먹어야 돼. 그래야 주인이 좋아해.”
“ 그렇다고 그렇게 흘리냐. 난 깔끔한 게 좋더라.”
“ 어 버버버.”
“ 난 수컷이라서 안 되는데...”
“ 암컷이 그리운 거야. 암컷 흉내를 내봐.”
“ 어떻게?”
“ 입술을 핥아.”
“ 어버버버.”
“ 봐, 더럽게 좋아하잖아.”

주인인 인간은 무기력하다. 개들 곁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멀뚱히 천장을 보며 한참을 앉아 있기도 한다. 마치 무료한 개들이 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반면에 개들은 그런 주인 곁에서 주인을 걱정하고 애교를 떤다. 오히려 개들은 활기차다. 사랑받기 위해 활기찬 개들과, 타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주인은 기운이 없다. 왜 주인은 개들의 사랑에 만족 못하는 걸까?

" 야야! 그만해. 애교 그만 떨어. 잠들었잖아.”
“ 왜? 우리 주인은 힘이 없을까?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 미래가 없잖아. 돈도 없고. 인간은 사랑만 갖고는 살기 힘들어.”
“ 우리는 사랑만 받으면 충분한데.”
“ 먹을 것하고.”
“ 주인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없을까?
“ 100일 동안 마늘과 쑥만 먹어봐. 100일 후에 여자가 될 지도 모르잖아.”
“ 난 수컷인데.”
“ 그럼 개놈인데... 그건 주인이 싫어할 거야.”
“ 주인한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얼까?”
“ 돈이야. 돈만 있으면 관심을 살 수 있거든.”

은행 앞에서 돈지갑을 뺏어 물고 달아나던 흰둥이를 잡은 경찰이 도둑의 집에 찾아와 주인 까지 잡아가는 것이 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다. 경찰에 잡혀가면서 주인은 개들을 끌어안은 손을 놓지 않는다. 흰둥이는 그런 주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행동을 원망한다. 그때 검둥이가 흰둥이를 위로한다.

“ 걱정마. 우리를 벌하지는 않을 거야. 우린 개야. 개의 잘못은 주인이 받는 거야. 그리고 우리에게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 줄 걸 아마. 혹시 알아. 맛있는 걸 많이 주는 주인일지도 모르잖아. ”
“ 우리 꼴을 봐. 우린 잡종이야. 그것도 귀여운 곳은 하나 없는 덩치 큰 잡종. 누가 우릴 데려가겠어. 주인의 사랑을 받느라고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잊고 있었어.”

우리는 사랑하느라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사랑 받느라 눈이 먼 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먼 눈은 자신을 향한 눈이다.

연극 ‘개와 인간’에서 개와 인간은 서로 닮아 있다. 인간은 개처럼 연기하고, 개는 인간처럼 연기한다. 그리고 그 둘은 사랑이라는 본능을 공유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특이하게도 공유할 때만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공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을 향한 눈이다. 타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떠한지. 타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나에게 있는지. 그런 눈을 뜨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 그런 사랑이 ‘개와 인간’ 사이에 있다.

필자소개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