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의 궤도에 위치한 눈에 띄는 창작의 세 가지 방법

  

 정금형의 일곱 가지 방법을 오마주해서 글의 제목을 정해 봤다.

 가령 ‘동시대의 젊은 작가들은 어디에서부터 창작의 아이디어를 얻는가?’


 페스티벌 봄의 ‘중요하거나 흥미로운 발전의 영역’에 있는 ‘커팅 에지’ 프로그램 안에는 신인 작가 세 작품이 들어왔고, 페스티벌 기간 중 연달아 열렸다. 이바 메이어-켈러의 『Death Is Certain』, 크리스티나 블랑코의 『네모_화살표_달리는 사람』, 정금형의 『7가지 방법』이 그것이다. 이 작품을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어떤 범주에 집어넣을 수 있을지 약간 난감한 측면이 없잖다.






『네모_화살표_달리는 사람』 : 기호를 해독하는 방법


 

Photo © Maria Jerez



 기호를 해독함은 언어를 가지고 사회에 속한 인간의 보편적 작용에 가깝다. 신호등의 빨간 불을 보고서도 그냥 건넌다면 당장 사고를 피하기 어렵다. 크리스티나 블랑코의 작업은 벽면 전체 곳곳에 설치된 픽토그램이나 문자를 해독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실행에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스페인어로 출구, 비상구(Exit)를 뜻하는 'SALIDA'를 의자를 딛고 손으로 가리키며 시작하는 작품의 첫 순간, 극장 공간은 하나의 실내가 되었다. 동시에 (극장 너머의) 바깥을 상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극장을 벗어나는 환영적 세계가 생겨났다.


 수시로 그녀는 또 다른 진짜 비상구를 들락날락하며 극적 환영을 깨뜨리고 실재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몰입을 요구하는 기승전결의 스토리 대신 이것이 기호를 읽고 해독하고 실행하는 단순한 프로세스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공연임을 명시한다.


 처음에 출구를 지정하여 그녀가 안으로 들어왔음을 가리키는 것과 함께, 무대 오른편(관객석에서 왼편)에서부터 기호 해독을 해 가는데, 먼저 소화기에 적힌 문구들을 무미건조하게 읽어 대기 시작한다. 그것은 소화기의 생산 정보이다. 법적으로는 반드시 명시되어야 할 것이지만, 일상에서는 사실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단지 소화기 안에 적힌 표식으로서만 존재함 직이 맞을 듯한 것이다. 그것은 문자로 기록되어 있을 뿐 막상 기표로 분출되는 경우는 일상에서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앞서 말한 신호등의 예처럼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과 같이 기호 역시 어떤 식으로든 해독의 작용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의 의미는 보통 정박되어 있고, 실행으로 옮겨야 하는 수행적 발화 기능을 지닌다.


 SALIDA에서 IDA를 손으로 가리고 나서, ALI를 다시 가려 SALSA라는 문자를 조합시키면서 살사 춤을 직조하여 웃음을 일으키는 등 문자를 실행으로 고스란히 옮기던 블랑코는 점점 그러한 정박된 의미들을 깨뜨리기 시작한다. 가령 옷에 적힌 세탁 기호들을 커다랗게 벽면에 그리고 나서 그것들의 의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서 웃음 지었다. 그것은 자의적인 언어 자체의 특성으로 돌아가서 ‘정박된 의미 작용의 강박’을 의도적으로 떨쳐버리기 때문이다. 40도씨, 손세탁 등의 옷에 적힌 세탁 기호를 행성에 착륙한 어느 우주인의 이야기 따위로 바꿔 버리는 건 거의 언어 유희적 장난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딱딱한 언어 내지 기호 해독 작용은 그녀의 자의적인 해석과 유희, 장난에 가볍고 경쾌한 그녀의 리듬에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게 했다.

 인류의 본질적인 기호 해독에 대한 작용, 어쩌면 거기에 강박과 스테레오타입화된 시선이 담겨 있을 수 있음을 포착해 낸 것이지만 그것은 방 안에서 문득 간단한 기호에 대한 연상 작용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콘센트의 작은 구멍을 간단히 사인펜으로 그려 사람 얼굴을 만들고 이어폰을 연결해 팔을 삼아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장면은 작은 공간을 마치 사적인 그녀만의 내밀한 놀이를 보는 착각을 주었고, 이는 기호 해독이라는 큰 구조의 아이디어 아래 아주 유치할 수도 있는 작은 실행을 온전히 포함시켜 재미를 이끌어 내며 무대라는 것을 해체하고 일상 공간을 무대로 재형성해 충분히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데서 어떤 창조적 지침을 줄만 했다.






『Death Is Certain』 : 현실을 상기시키는 방법들


 

 

Still photo © Eva Meyer-Keller



 이바 메이어-켈러 『Death Is Certain』은 단순히 딸기를 죽이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지만 그 수십 가지의 방법론은 온갖 살인과 전쟁의 갖은 죽음의 형상들을 떠올리게끔 한다. 딸기를 목 졸라 죽이고 찔러 죽이고 압사시키고 익사시키는 등의 수십 개의 딸기 하나씩마다 해당하는 각각의 죽음의 방법론은 죽음 자체에 대한 의미를 궁구하기 이전에, 단순한 프로세스 아래 고안해 낼 수 있는 방법론의 가짓수의 일부를 나타내는 데 불구하고, 그녀가 펼치는 무미건조한 행위는 연기가 아닌 그러한 방법 체계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사실상 어떤 연기의 메소드 자체에 대한 것은 없다.


 어쨌든 그와 같은 단순한 행위의 연속은 단지 딸기를 죽인다는 것과 그것에서 수많은 죽음에 대한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면서 도저히 거기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측면이 있다. 아이디어를 덧붙이거나 변형하는 것으로 작품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요는 단순히 딸기를 죽이는 것이 유희나 실험이 아니라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죽음의 형상을 안겨 주는 것인가이다.


 어찌 보면 수십 개의 죽음이 지겨워지는 순간이 문득문득 있다. 이바 메이어-켈러가 임신한 관계로 그와 공동 작업을 많이 해 온 이바 뮐러가 메이어-켈러의 아이디어를 갖고 퍼포머로 왔지만, 어쨌든 뮐러의 몸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고 죄의식이나 충동이 읽히지 않는다. 우리는 쉽게 지치거나 딸기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세는 데 집중을 쏟기도 한다. 이 작품은 그런데 분명 자극적이다. 그녀의 실험실에서 빚는, 어쩌면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것 같은 익숙한 광경들의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흥미를 느낌과 동시에 그것을 조금 더 명료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단지 재미가 아니라 그것의 잔혹성을, 동시에 딸기가 인간으로 변해가는 감각을.


 특히나 딸기 맛 같은 붉은 사탕 여러 개로 딸기를 치는 행위는 더욱 실재와 같은 차원의 것이었다. 비교적 같은 크기로 비슷한 부류의 붉은 종족을 집단 공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기에. 모든 것들은 방법론의 측면이라는 표피를 띠고 있었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각각의 행위들이 비유로써 와 닿는 셈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이라면 사실상 죽음이란 이름 하에 모든 생명체는 같고, 그녀가 투여하는 행위는 죽음에 변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죽임으로써 그것이 살아 있음을 인지시키는 것이었기에 이것을 단순한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려웠다.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을까? 인류에 대한 공통적 기억, 만약 홀로코스트나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는 그것이 더할 나위 없이 참혹한 것일 테고, 게임을 통해 죽음을 경험하는 세대라면 그것은 조금 더 내밀한 몸에 와 닿는 감각을 안겨 줄 것이다.


 환영적 세계를 구축하는 공연의 특성에서 실재를 다루면서 실제를 심상으로 불러일으키는 것. 이는 곧 일상에 묻어 있는 현실의, 실제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예와 연관 지어 가령 어머님이 도마에 칼을 내려치는 데서 인류의 전쟁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7가지 방법』 : 삶의 내밀한 진실에서 풍겨져 나오는 세계

 


Still photo © Geum Hyung Jeong



 정금형은 『7가지 방법』에서 자신의 여러 작품을 패치워크처럼 모아 놓고 있다. 단순한 컬렉션의 개념일까? 각각의 공연의 이음매는 설득적이지 않지만,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환영과 실재 사이에서의 묘한 간극을 선사한다. 인형을 또 하나의 실재하는 존재로 나타내고, 그것과 동등한 관계로써 자신을 내세우는 것. 이 둘이 엮어가는 관계, 내지 인형의 몸이 된 정금형을 인형-엄밀히 말해 인형이 아닌 제 3의 그녀가 만든 존재-으로 보는 것이 관람 형태로 나타난다.


 그녀의 그런 각각의 다른 여러 작품들을 모은 것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뚜렷한 작품의 구조 및 체계를 가지고 있고,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가 이만큼이나 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장치인 것 같다.


 팔뚝에 낀 마스크이지만 그녀가 명명한 신화적 세계의 '트리스탄'이 살아 움직일 때 트리스탄은 정금형의 생명으로 전이된 것이다. 반면 정금형은 트리스탄으로 현현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정금형이 아닌 뭔가 다른 생명체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지점이 미묘함에 가닿는다. 인형은 그녀의 몸의 일부이면서 그녀의 또 다른 자아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다른 자아를 낯선 타자인양 또 다른 존재로 삼고, 자신의 의식을 공연에 투여하여 또 다른 자아 되기로서 타자를 형성한다. 그녀는 환상을 만들지만 환상은 거꾸로 그녀를 직조하는 것이다.


 진공청소기와 스펙터클 대서사시는 섹스와 욕망의 카타르시스의 극점과 거기서 오는 처연한 슬픔, 고독한 생명체의 진실을 보여 준다. 다른 작품들이 아이디어와 감각적 지점을 건드리는 데 흥미를 준다면, 이 두 작품은 아마도 어떤 극적 진실이 숨겨져 있다. 여자(누워 있는 정금형)를 욕망하는 진공청소기는 이를테면 정금형의 보이지 않게 신체가 작동하게 하는 일종의 트릭이 작용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인간 같고, 그녀를 덮은 푸른 천, 그 위로 장난감 배 한 척은 그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동시에 진공청소기의 누워 있는 여자의 신체, 푸른 천에 덮인 여성 신체의 굴곡은 관음증과는 또 다른 그녀의 내적 섹스의 동인을 어떤 미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 보는 이에게 또 다른 내적 작용의 몰입과 긴장을 일게 한다.


 아이디어들의 묘묘함과 극적 판타지의 극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번 무대는 특별히 그녀의 작업실에서 볼 수 있는 그대로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너저분하게 널어놓은 데 그 특징이 있다. 무대는 그녀의 사적 공간, 내밀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작업실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은 작위적인 무대 세트의 자원이 투자되어야 함에서 벗어나면서 힘을 얻는다. 실제 그녀의 작업실에서의 공연은 무대 이상의 편안함과 함께 진지함이 베어 나온다. 극본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작품의 구상에서부터 실행까지 모든 것은 그녀의 머리와 몸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이 조금 더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단순한 결론일까? 무엇보다 환영을 가지고 노는 그녀의 행위가 연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대사와 무용을 최대한도로 생략하되 이야기와 움직임을 얻는 공연, 그녀가 얻으려는, 보여 주려는 것이 뚜렷하고, 그것이 단순함이나 설사 유치함에서 출발했을지언정 실제로는 완벽히 몸으로 체화된 진실을 구가하기 때문일 것 같다.




 


P. S. 작품의 범주를 판단하기는커녕 결과적으로 작품 분석의 차원에 그친 바가 없지 않다. 스스로의 창작의 방법론을 찾는 길은 누군가의 획기적인 소위 요즘 잘 나가는 아이디어 자체를 모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즉 어떤 하나의 분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창작의 지평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느냐 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사회를 뒤집어보기, 현실을 재위치 시키기, 자신의 욕망에 가닿기 등, 앞서 언급한 작품들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지만 기본적인 전제가 붙는다. ‘여기에서부터!’



필자소개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예술 분야 자유기고가, 現다원예술 비평풀(daospace.net) 활동 중